〈 32화 〉백수가 여왕님을 만나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나는 편의점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사과를 드렸다.
사장님도 CCTV를 보고 사정을 파악하신 모양이었다.
“다행히 자네가 바로 연락을 줘서 금방 수습할 수 있었어. 크게 파손된 것도 없으니너무 신경 쓰지 말게.”
“그래도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물러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네 덕분에 매출이 쏠쏠했는데. 아쉽구먼. 자네도 고생이야. 졸지에 여난에 시달리다니. 어쨌든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게나.”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백수로 돌아왔다.
이제 조절 장치가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더는 편의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사장님같았으면 소동을 부린 손님이나 근무를 하던 나에게 소송이라도 걸었을 것이다.
“권아영...”
“주인님, 괜찮으세요?”
그녀가 날뛸 때는 모든 전화를 무시했었다.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집까지 찾아와서 설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하지만 이제는 내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와 그때 손님들의 안위는 살필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어, 나는 괜찮아. 그보다 별일 없었지?”
“네. 저도 잘 기억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때 누가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던 거 같아요.”
불행 중 다행이다.
마치 좀비처럼 나를 쫓던 그녀들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때 주인님에게 달려들어서요.”
“그건 괜찮아. 다친 사람도 없고. 그보다 나 편의점 그만뒀다.”
“!!!”
그녀는 놀란 기색을 보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저 때문에 화나서그러시는 거예요?”
그녀는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무래도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미안.
사실 나 때문이야.
그녀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도, 손님들이 날뛴 것도 모두 나 때문이었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 때문이었다.
그걸 알게 되었으니 그녀를 마냥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요즘 여자들이 너무 꼬여서 힘드네.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네.”
진심 어린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착하게 굴면 계속 주인님으로 있어줄 생각이니까.
권아영은 음험한 성격이지만,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섹파로는 나쁘지 않다.
“그러면 우리 계속 볼 수는 있는 건가요?”
“내가 언제 인연 끊겠다고 하든? 그렇게 기죽을 필요 없어.”
나의 대답에 그녀는 화색을 띠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네! 저 힘낼게요!”
그녀와 몇 가지 자잘한 대화를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공허해진 마음으로 방을 둘러봤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최종적으로 경영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참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세상의 톱니바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반골 근성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 조금 쉬면서 어떤 아이템으로 어떤 사업을 할지 생각을 해보자.’
나는 이번 일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막연하게 생각하는 일은 막연하게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는 종잣돈을 마련할 욕심에 뭐라도 일을 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사업을 할 수 있는 걸까?
어림없는 소리다.
뭔가 확실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음을 다졌다.
‘페로몬 조절 장치 매뉴얼’
책상에 놓여있는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책자를 훑어봤다.
신지혜가 설명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알약은 사람의 뇌 구조를 변화시켜서 페로몬을 생산하게 만드는 용도였고, 스마트 워치는 지금까지 규명된 페로몬 성분을 입력해 놓아서 필요할 때 뇌에 신호를 보내게 만드는 용도였다.
쉽게 말해서 뇌는 ‘공장’이고, 스마트 워치는 작업을 조율하는 ‘작업반장’이라는 뜻이다.
개미를 조종하고 싶으면 개미에게 유효한 페로몬을 내뿜도록 신호를 보내고, 사람을 유혹하고 싶으면 사람에게 유효한 페로몬을 내뿜게 만드는 것이다.
‘어? 이거 뭔가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냐?’
책자를 훑어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나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허둥대거나 사태를 진정시키려고만 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과 주변의 반응을 종합해 보면 이건 ‘상대를 조정하기 위해서 설계된 물건’이었다.
말 그대로 ‘마인드 컨트롤’에 특화된 능력과 아이템인 것이다.
이거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면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냐?
[부-우우웅!]
뭔가 떠오르려고 하는 찰나에 스마트폰이 몸을 흔들었다.
최영훈에게전화가 온 것이다.
“무슨 일이야?”
“너 연락 안 했지?”
“어? 무슨 연락?”
“주아린에게 연락 안 했잖아!”
아, 그 혜성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여자.
클럽에서 소동이 일어난 이후에 나에게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내가 꼭 연락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그런 일로 따지냐?”
“그건 그런데 그쪽 사람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관심을보였는데 연락이 없으니 약이 오른 모양이더라고. 뭐, 그런 거 있잖아. ‘특별한 내가 관심을 주는데 반응이 없어?’같은 태도.”
그렇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권과 특혜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특히나 그런 경향이 강하다.
나는 그런 사람들만 보면 잡아다가 개고생을 시키고 싶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우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
대기업의 소유주, 벼락스타가 된 연예인, 친일파 후손, 하는 일 없는 고위공직자, 불법적인 사업이나 속임수로 돈을 벌어들인 졸부들.
“어쨌든 나를 들볶는 통에 아주 못 살겠어.”
말을 들어보니 최영훈이 중간에서 고충을 겪은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급기야 협박 비스름한 말로 나를 불러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학교생활도 해야 하고, 나름대로 밤놀이도 즐기는 최영훈으로서는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지가 회장 딸이면 딸이지. 어디서 사람을 오라 가라야?’
순간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영훈을 생각하면 거칠게 나갈 수도 없었다.
상대는 대기업 회장의 딸이다.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성질대로 막 나갔다가는 최영훈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나의 앞길도 막힐 수가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제 한가하니까.’
나는 불쾌한 마음을 다스리며 말했다.
“알았어. 내가 연락할게.”
“전에 받았던 번호는 이제 안 쓴다네? 그냥 약속을 잡았어. 그날 나오면 된다고 하더라.”
마음대로 하는구나.
아주 제멋대로다.
그녀의 안하무인 행동에 부아가 치밀었다.
만약 내가 바쁜 일이 많은 상황이었으면 어쩌려고 저랬을까?
하지만 화를 낸다고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녀가 갑이고, 우리가 을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기분 좋게 나가자.
“알았어. 날짜와 시간, 장소를 톡으로 보내줘.”
며칠 후 나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워, 여긴 뭐~.’
강남에 위치한 그곳은 평범한 주점이 아니었다.
방을 잡고 술을 마시는 소위 ‘고급 룸살롱’이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퇴폐적으로 노는 ‘룸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고급 룸살롱(고급 주점)’을 흉내 낸 ‘텐프로’같은 곳도 아니었다.
정말 상위 1%만 이용할 법한 고급 주점이었다.
깔끔하고 평범한 인상의 웨이터와 지적인 매력이 넘치는 아가씨들이 가득한 술집이었다.
“조향기 씨?”
“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입구에서 신분을 밝히자 웨이터가 나를 안내했다.
마치 궁전처럼 화려한 홀을 지나서 어느 방에 도착했다.
“네가 조향기냐?”
방문이 열리기 무섭게 어떤 미녀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곁에는 잘생기고 건장한 남성들과 제법 부티가 나는 여자들이 앉아있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술잔을 홀짝이고 있는 최영훈도 보였다.
‘어휴, 무슨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내가 들어서자 모든 시선이 쏠렸다.
민망한 기분을 감내하며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조향기입니다. 저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일단 내 옆으로 와봐.”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곁에 앉히고는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민망한 기분에 시선을 피하던 나도 곧 그녀를 마주 봤다.
그녀의 키는 170 정도는 되어 보였다.
앉은키가 작아서 언뜻 키가 작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다리가 상당히 길고 늘씬했다.
딱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도 군살이 없는 걸 보니 체중은 52~54kg 정도로 보였고, 어깨를 넘어서는 긴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윤기가 흐르고 찰랑거리는 것이 고급 미장원(헤어샵)을 꽤 다니며 관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눈이 가늘고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이 여우를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표정이 대단했다.
자신감과 활력이 넘쳐 보였다.
[더듬더듬-. 주물럭-. 주물럭-.]
“!!!”
나는 그녀가 한 행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뜸 나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초면인 사람을 갑자기 만지다니!
그녀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만지면 안 되는 곳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나의 존슨까지 말이다!
“뭐야? 고작 이 정도야? 별거 없는데?”
제법 근육질에 훈남으로 이미지가 바뀌기는 했다.
하지만 근본은 여전히 나였다.
타고난 미남들과는비교가 되질 못 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놓고 품평을 하다니.
게다가 곁에 있던 남자들과 여자들은 주아린의 말이 끝나자 비웃으며 술을 들이켜는 것이 아닌가?
민망한 표정으로 최영훈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죠?”
나의 항변에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아니, 그날 사람들이 난리를 쳤잖아? 얼마나 대단한지 좀 보고 싶어서. 그런데 뭐 별거 없네?”
그녀의 말에 또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아무래도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머릿속 상태가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무례하고 건방진 것이 정도를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인간들이었다.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그녀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기본적인 예의는 차렸으니 앞으로 뭐라고는 못하겠지.
이 불쾌한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겠다.
“야, 무슨 남자 새끼가 몸 좀 더듬었다고 정색을 하냐. 일단 좀 있어 봐.”
그녀는 자신의 고급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것은 돈다발이었다.
“자, 천만 원이다.”
“!!!”
“어디 가서 성추행이나 폭행이라고 나불대지 마라. 뭐, 고소하고 날뛰어도 소용없겠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떨림이나 불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분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사법체계도 두려워하지 않는 돈과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이 시간이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최영훈과의 의리를 지키겠다고 이 자리에 나온 내가 등신이었다.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나를 왜 부른 거죠?”
간신히 분기를 누르며용건을 물었다.
사람을 불렀으면 뭔가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내가 너한테? 용건은 무슨 용건? 그냥 궁금해서 불렀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롱하는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