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스파이, 그녀 (1)
거친 섹스와 폭풍 수면을 마치고 모텔을 빠져나왔다.
간만에 스트레스를 발산하니 숨통이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상대가 권아영이라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제대로 된 애정도 담기지 않은 몸짓에 혹여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정말 이런 관계로도 만족하는 걸까?
“이런 관계로도 괜찮은 거야?”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건 내 쪽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닌데.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음~. 진지한 연애도 좋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요. 무엇보다 기분 좋기도 하고요.”
헐~.
이런 반응은 이것대로 서운하다.
그래도 애걸복걸하며 매달리고 그러면 농락하는 재미라도 있을 것을.
이러면 그냥 섹스 파트너가 아닌가?
뭔가 복잡한 심경이다.
이게 그런 느낌인 건가?
상대가 내 몸만을 탐할 때의 허전함?
애초에 이런 관계를 원한 건 나였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묘하게 서운한 것이다.
그런데 권아영은 서운한 기색도 없으니 도리어 약이 오른다.
츤데레라고 욕해도 할 수 없다.
이게 나의 솔직한 마음인 것이다.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뭔가 찝찝하고 아쉬운 마음.
“앞으로 애인이 생기든, 결혼하든 간에 만나 주기만하면 돼요.”
나는 그녀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이거나 물어봐야지.’
내 팔에 매달려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나 요즘 인기 있는 거 맞지?”
“음~. 그렇다고 생각해요. 하도 사람들이 몰려서 사장님이 알바도 늘린 거잖아요?”
“그런데 인터넷은 조용하더라? 보통 ‘얼짱’이나 이런 건 인터넷으로 막 소문나고 그러지않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편의점 앞은 북새통이 되면서도 인터넷은 잠잠했다.
보통 이러면 인터넷으로 소문이 퍼지고 그러지 않나?
요즘 같은 SNS 시대에 이렇게 조용한 것이 말이 되는 건가?
하지만 곧 나는 그녀의 입을 통해서 그럴듯한답을 들을 수 있었다.
“주인님, 그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봐요.”
“그게 뭔데?”
“네. 일단 주인님은 실물이 매력적이지 비주얼은 별로예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는 거죠.”
알고는 있었지만, 여자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조금 충격이다.
하지만 거울을 보면 바로 이해가 되었다.
예전 70년대나 80년대 만화에나 나올 법한 꺼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놈이 바로 나였다.
“그리고 여자들은 ‘보고 즐기는 사람’과 ‘가지고 싶은 사람’을 다르게 대하거든요.”
“두 개가 다른 거야?”
“당연하죠. 예를 들어 잘생긴 연예인은 ‘보고 즐기는 사람’에 속하죠. 이런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예쁜 가방이나 옷을 발견한 것처럼 여럿이서 의견을 나누고 싶어지거든요. 나와 공감하는 사람들과 무리를 만들고 싶어지죠. 하지만 가지고 싶은 사람은 달라요. 숨겨놓고 나만 보고 싶어지거든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면 나는 ‘가지고 싶은 사람’에 속하는 거다?”
“전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녀의 대답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의문이 해소되었다.
뭐,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이 이상 광신도가 늘어나면 일하기 곤란할 뿐이다.
지나친 인기는 연예인을 할 것이 아니라면 ‘독’에 불과하다.
경찰청에서 발표하는 자료에 따르면 살인 사건 중에서 ‘치정살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의외로 크다.
그만큼 지나친 남녀관계는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도 너무 마음 놓지는 마세요. 꾸준히 주인님의 팬이 늘고 있으니까요. 조만간 편의점에서 일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서슴없이 불길한 예언을 날리는 권아영이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게 좋아?”
“에~이. 편의점에서 해고되고 외톨이로 지내는 주인님을 위로하는 건 제 몫이 될 테니까요.”
아하!
그녀가 음험한 성격을 지닌 여자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소름 끼치는 감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얼른 집으로 향했다.
“이게 다 뭐냐?”
“아, 이거? 러닝머신.”
집에 도착하니 어떤 상자가 보였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트레밀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쉬는 날에 맞춰서 도착하도록 배송을 신청했었다.
그게 잘 도착한 모양이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창가에 자리를 잡고 설치했다.
동력이 필요 없는 수동식 트레밀이었다.
나는 시운전을 삼아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슬쩍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시선이 느껴진다.
아직도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또 언제 따라붙은 거지?
‘지겨운 놈들!’
나는 따가운 시선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속도를 붙여서 달렸다.
[쿵-! 쿵-! 쿵-!]
속도를 붙이니 제법 육중한 소리가 난다.
그러자 부모님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매트라도 깔고 뛰어! 밑에서 올라온다고!”
트레밀 밑으로 매트를 깔면서 나는 생각했다.
감시가 없어지는순간 미친 듯이 달리겠다고.
밖에서 미친 듯이 달리겠다고!
그때까지는 이걸로 천천히 걸으면서 참는 수밖에 없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건 신지혜가 얼마나 빠르게 일 처리를 하느냐에 달렸다.
“혹시 잠시 시간 있으세요?”
그렇게 집안에서 트레밀로 답답한 심정을 달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편의점 근무가 끝날 때쯤 한 미모의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청초한 외모와 다르게 알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체육계 출신의 사람들이 풍기는 예의 그것이었다.
강한 생명력.
묘한 강인함.
그런 느낌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인기가 많아진 이후에 부쩍 이런 일이 많다.
분명 사귀어 달라거나, 같이 모텔을 가자고 하겠지.
신지혜의 일이 있고 난 뒤에 나름대로 충격을 먹었던 걸까?
아니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야망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동정을 뗀 이후에 연달아 밀려든 여복 때문일까?
최근에 나는 그다지 여색에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귀찮다.
그녀의 외모가 제법 내 취향이기는 하지만, 사귀거나 몸을 섞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카페로 향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저는 서유진이라고 합니다. 지혜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네?”
“지혜 씨가 조향기 씨의 몸을 검사해 보라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고백은 아닌 모양이다.
신지혜가 엮인 일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일을 진행할까?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저는 신지혜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이상한 낌새에 나는 일단 잡아뗐다.
그녀 성격에 누군가를 보낸다면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이 아무나 보내겠는가?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저건 분명 나를 낚으려는 수작이다.
“아, 네? 어, 그...그게 향기 씨에게 가면 협조해 줄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 모른다고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황한 낯빛으로 둘러대는 그녀를 뒤로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는 급하게 나를 따라오며 팔을 붙들었다.
“거...거짓말이에요. 사...사실은 향기 씨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런 거예요.”
처음에는 신지혜의 지인을 연기하더니, 이번에는 내 팬을 자처한다.
분명한 거짓말이다.
‘혹시 그거 알아? 내 팬들은 신지혜와 나의 관계를 모른다고!’
보나 마나 ‘화이어 제약’이나 ‘에이스 원’에서 보낸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끝까지 잡아떼면서 유도신문에 걸리지 않으니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이다.
경멸감이 솟아난다.
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말했다.
“그래요? 그런데 왜 내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죠?”
“...그 사람과 친한 줄 알고 그랬어요.”
“미안합니다만, 전 그런 사람도 모르고요. 그쪽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욕이라도 시원하게 퍼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나와 신지혜의 관계를 눈치챌 수도 있다.
여기서는 일단 참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때였다.
“저...정말 좋아한다고요! 이렇게는 못 보내요!”
그녀는 붙잡은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엄청난 힘이다.
‘무슨 여자가 힘이?!’
역시 내가 짐작한 대로 체육계 출신이 맞는 것 같다.
겉보기와 다르게 엄청난 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우악스럽게 나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지금 가버리면 소리를 지를 겁니다. 가슴을 만지고 도망갔다고 소리를 지를 거라고요!’
하?!
사람을 속여 넘기려고 한 주제에 나를 성추행으로 몰겠다고?
속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정말 이런 여자라면 때릴 수 있다.
진심으로 때릴 수 있다.
하지만 팔로 전해지는 완력으로 봐서는 진지하게 싸워도 내가 질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서 화를 내면서 본색을 드러내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지혜와 내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만 들킬 뿐이다.
그렇다고 거친 행동을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목청과 나에게 불리한 정황만 남은 상황이니 말이다.
“...알았어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저와 모텔에 가주세요.”
진짜 속셈은 내 몸을 살펴보려는 거겠지.
나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얌전히 따르는 수밖에 없다.
“당신이 오자고 했죠? 그러니까 계산은 당신이 하세요.”
나는 일부러 그녀를 유인모텔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이유가 뭐냐고?
잠깐의 틈을 만들기 위해서다.
아주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민망해하거나 헤매기 마련이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할 것이다.
“숙박이요? 대실이요?”
“...네...아..,그...그게...뭐죠?”
옳거니!
역시 헤맨다.
나는 그녀의 주의가 흩어진 틈을 타서 신지혜에게 톡을 보냈다.
그녀에게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몸을 보여도 되는지를 물었다.
‘맨눈으로 관찰하는 것은 상관없음. 단, 표본은 주지 말 것.’
그냥 만지거나 눈으로 보는 건 상관없는 모양이다.
그러면문제 될 것이 없지.
머리카락 한 올도 내어주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헤헤헤, 열쇠 받아왔어요. 어서 가요.”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미소가 울상으로 바뀌게 해주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뜨거운 눈으로 그녀의 몸을 훑으며 말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릴 정도로 좋아한 겁니까?”
“네? 아, 저...그...그게...”
“뭐,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제대로 놀아드리죠.”
과할 정도로 음탕한 표정까지 드러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몸을 뒤틀면서 나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직 밖이에요. 안에서...”
안에서는 본격적으로 할 마음은 있고?
그런 마음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그녀를 나는 속으로 비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