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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146화 (외전 완결) (146/146)

14화

그 말을 듣자 아란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우유부단한 자신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단호하게 행동할 필요를 느끼곤 읽는 척하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그러곤 도발적으로 에녹을 쏘아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너는 내 모, 몸만 원하지?”

“예?”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냥 나랑 그러고 싶어서 꾀어내는 거잖아. 봐․ 지, 지금도…………”

아란이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고작 천조각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에녹은 그만 머쓱해졌다.

“저는 다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전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나, 나를…………”

아란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그녀를 상대로 벌인 낯부끄러운 짓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에녹은 아란이 생략한 이야기를 즉각 알아들었다.

미친놈, 짐승 같은 새끼 ・・・・・・.

에녹은 속으로 지난날 자신을 욕했다

. 알지만………….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간 제 행동이 오해를 살 만하다는 건

“남자가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로……아니, 아무튼 누가 그랬어.”

에녹은 이제 로지나의 로만 들어도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그 시녀는 내 아내에게 어떤 헛소리를 지껄인 거지?

하지만 이 자리에서 로지나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해봐야 이로울 것이 없었다. 아란은 그녀의 헛소리를 교리처럼신봉했고, 그에 반해 자신은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짓들을일삼아온 탓에 신뢰도가 바닥을 쳤다.

“시녀보다 제 말을 더 못 믿으신다니, 서운하지만 제 업보이니 어쩔 수 없겠지요.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몸에 손대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어긴다면 절 시종으로 부리셔도 좋습니다.”

"시종이라니, 어떻게 널 시종처럼 대해………! 그러고 싶지도 않고, 설령 그런 짓을 했다가 네 부모님께서 아시면어떻게 생각하시겠어?"

시종이란 말에 아란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미 그녀는 에녹이 맹세를 어길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에녹은 그 사실에 씁쓸해하면서도 거듭 약속했다.

“사이 좋은 부부구나, 하시겠죠. 아무튼,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까.”

“아란, 제 말을 믿으세요.”

아란은 진위를 확인하듯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루비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엔 순수한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런 눈빛이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또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내심 그의 말이 진짜인지 시험하고 싶기도 했다.

"정말이지..…..…?"

“예.”

에녹이 힘주어 대답했다.

"좋아, 지켜보겠어. 어기면 침실 출입을 금할 거야…………!"

하잘것없는 엄포였지만, 에녹에겐 시종으로 부리겠다는말보다 더 무서운 선고처럼 들렸다. 그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신용을 회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겉보기에 두 사람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매일 아침, 에녹은 새벽처럼 일어나 세숫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아란이 눈을 뜨면 얼굴과 손을 씻겨주었다.

“졸려. 더 자고 싶어………”

반쯤 눈을 감은 아란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녹이 가져온 미지근한 물로는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아침은 드셔야죠."

에녹이 잘게 찢은 빵을 그녀의 입 안에 넣어주었다. 빵을 씹느라 입술을 우물거리자 그가 그 위에 쪽, 뽀뽀했다. 졸음에 취해 있던 아란이 눈을 반짝 떴다.

"손대지 않겠다고……….”

“아침 인사."

항의하는 그녀에게 에녹이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약속을 지킨다는 말이 진짜인지, 그 후에 뭔가를 더 하지는 않았다.

"......."

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처럼 애정이 가득 담긴 농염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이런 인사도 나쁘지는 않은 듯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아란은 에녹과 함께 정무를 보았다.

온화한 오전 햇살이 둘 위로 내려앉았다. 아란은 아까부터 에녹을 힐끔거렸다. 이 시간에 그와 함께 깨어 있는 건오랜만이라 새삼스러웠다.

낮의 그는 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냉엄하고 금욕적이었다. 아란은 정갈하게 내리깐 속눈썹을 쓸어보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아란? 하실 말씀이라도……….”

그녀의 눈길을 느낀 에녹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조금 내렸다.

“손이."

"어?"

그를 따라 시선을 떨군 아란이 멍한 소리를 냈다. 언제 떨어진 건지, 새까만 잉크가 손등에 방울방울 묻어 있었다. 에녹이 설핏 웃으며 손수건을 꺼냈다. 무심코 손을 내밀자 그가 아주 당연한 일을 하듯 손등을 닦아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란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으음?"

아직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시종처럼 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 역시 그런 그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왜지?

답은 간단했다.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난 여태 에녹을 시종 취급했던 건가? 아니, 애초에 에녹은 왜 이런 일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거야?

뒤늦은 자각으로 아란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에녹이 물었다. 아란이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그는 그녀의 발을 닦고 침구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졸려서 그런가 봐."

“수면에 좋은 향초를 태워두었으니 푹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아란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좋은 꿈 꾸십시오."

인사를 마친 후, 그는 그녀를 안아주거나 팔베개를 해주는 대신 멀찌감치 떨어져 누웠다. 그러고도 모자라 등까지 돌린 채 잠들었다.

그간 의심했던 일이 민망해졌다.

다음날도, 모레에도, 그리고 글피에도, 에녹은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처음엔 좋았다. 아란은 아낀 체력으로 그간 못했던 일을 실컷 했다. 밀린 업무를 보고, 책을 읽고, 소풍도 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에녹의 널따란 등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분명 함께 누워 있는데도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란이었다.

“자?”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작은 소리로 그를 불러보았다.

“아뇨."

에녹도 작게 대답했다. 아란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등에 얼굴을 붙였다. 그 온기가 너무 반가웠다. 에녹이싹싹 빌기 전까진 절대 먼저 손 내밀어선 안 된다는 로지나의 조언 같은 건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 “에녹・・・・・・….”

그의 이름을 부르며 슬쩍 탄탄한 허리에 팔을 감았을 때, 갑자기 에녹이 벌떡 일어났다.

"가지 마!"

아란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에 매달렸다. 에녹이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꾸 이러시면 약속을 못 지키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됐어. 네 마음은 충분히 알았어.”

“.......”

“난 그런 게 싫은 게 아니고, 그냥 잦으니까 힘들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에녹이 약속을 지킨답시고 침실을 나가버릴까 봐, 아란은 다급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커다란 남자의 몸이 얼마나 쉽게 딸려오던지, 그녀는 한순간 자신이 장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아직 제 각오가."

에녹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전에, 아란은 재빨리 제입술로 그의 입술을 덮어버렸다.

* * *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왜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을까?

아란은 침대에 파묻힌 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에녹과 화해 아닌 화해를 하고 수일이 흘렀다. 그녀는 이전처럼 밤낮으로 시달리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 한번 시작하면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게다가 더 집요하고 끈질겨졌다.

에녹이 체액으로 끈적해진 그녀를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후희는 곧 질척이는 애무가 되었다. 아란이 질겁했다.

“더는 안 돼…………. 이러다간 보, 복상사를 할지도 몰라.” 나른하게 아란을 바라보던 에녹이 그 말에 낯을 굳혔다. "복상사라니요. 체력만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너 말고 내가, 내가 죽을 것 같다고!”

아란이 부끄러움도 잊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질렀더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그녀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를 힘껏 밀쳤다. 그러나 이미 진이 다 빠진 뒤라 에녹에겐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되레 그녀만 더 힘들어졌다.

손해 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괜히 화만 더 뻗친 그녀는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속으로는 내심 그가 자신을 달래줄 거라 기대하면서,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잘못을빌면 못 이기는 척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의향도 있었다.딱 한 번뿐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에녹이 움직이는 기척은 느껴지지않았다.

뭐야, 소리 질러서 화났나? 그렇지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정말 그가 침실을 나가버릴까 내심 걱정된아란은 이불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다 에녹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란의 속내를 훤히 읽은것처럼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우, 웃지 마. 정말로 화났거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아란도 어느 순간부터 비죽비죽웃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니 화가 봄날 눈 녹듯 사르르 녹았다. 실은 처음부터 화가 난 적도 없었다.

“화가 나셨다고요?”

“그래. 진짜니까 말 걸지…………. 아, 간지러워!"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입술에 에녹이 입을 맞췄다. 아란이 베개로 그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그는 얻어맞으면서도진득하게 아란에게 들러붙었다. 이런 의미 없는 투닥거림마저 즐겁기만 했다.

“아마 복사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 전에 제가 먼저애가 타서 죽을 테니까요.”

“지금 같아선 천 년, 만 년도 넘게 살 것 같은데……….” “제가 죽는 걸 바라지 않으시면 어서 허락해 주세요. 사랑하는 아란흐로드.”

아란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는 처음 그 말을 입에 담은 이후로 지겨울 만큼 사랑을 고백했다.

볼을 붉힌 아란이 어물어물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결국, 이번에도 그녀는 그를 받아주었다.

매번 이러는 건 그녀가 바보여서, 학습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선하고 너그러운 것이 천성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본질부터 다른 인간이었다.

이 결혼이 그에겐 더 없는 행운이지만 아란에게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조그맣고 순진한 아내를 말 그대로 벗겨 먹을 생각밖에 없는 뻔뻔한 남편이었다. 제 반절도 되지 않는 아내 품에 안겨선 온갖 음탕하고 추잡한 상상을 했다.

애당초 뼛속까지 글러 먹은 그를 이렇게 다정히 안아주는 건 오직 아란뿐이었다. 아란흐로드는 그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주었다. 그것에 취한 그는 아침에 눈을 떠 밤에 감을 때까지, 그것으로도 모자라 꿈속에서까지 아란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렸다.

지금 이 평화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에녹은 잘 알고 있었다. 결혼 전, 하루가 멀다 하고 황궁을 드나들며 그는 황자들의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성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황제가 죽고 나면 반드시 황위를 두고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란은……00,

에녹은 아내의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계승권을 가진 데다 부유하기까지 한 누이를 황자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아란을 황제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이 지

금과 같은 평화라면 두 황자 중 한 명에게 기꺼이 머리를 조아릴 수도 있었다.

앞날이 어떻든 확실한 건,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천수를 다 누리고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영원히 그녀는 그의 아내로 남을 터였다.

만족감에 겨워 길고 가는 목을 집요하게 애무하자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에녹은 모든 것을 일단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지금 그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아내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었으므로.

<폐하의 밤> if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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