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 한마디에 그는 마지막 남은 전의마저 상실했다. 어쩌면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것 같다. 결국엔 그녀가 바라는대로 마음을 내어주고 패배할 운명이라는 것을.
아란은 누구보다 너그러운 승자이며, 가장 무자비한 약탈자였다. 사랑을 자각하고 부풀어 오르는 그의 마음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모조리 가져갔다. 그는 더없이 기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심장부터 시작된 떨림이 전신으로 번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내려 수줍게 벌어진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붙였다. 영원한 굴종을 맹세하는 순간이었다.
키스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조급하거나 거칠지는 않았다.기다렸다는 듯 아란이 화답했다.
곧 그의 입술 위로 아란의 화장이 붉게 번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다가 또다시 입술을 겹쳤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에녹은 오래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파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응.”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그가 홀린 듯 내뱉었다. 그가 아는 맹세와 밀어 중 가장멋없는 말이었다. 초라한 청혼에 실망해 거절하지는 않을까 초조해하는 그에게 아란이 물었다.
"그리고?"
에녹은 고심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해야 그녀를 더 흡족하게 할 수 있을지, 오래오래 제 곁에 붙잡아둘 수 있을지.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어느 동화 속 요정에게 홀린 사내가그랬듯, 날이 밝자마자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갈피를 못 잡는 그에게 자비로운 아란은 이번에도 실마리를 주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말해줘야지. 날 동정해서 청혼하는 게 아니라고."
에녹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녀가 바라는 말을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아란이 활짝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그 역시 웃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바보 같은 얼굴에, 입술은 아란과 똑같이 붉게 물들인 채로. 그러나 창피하지도 무안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보가 맞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머저리였다. 그런 자신을 받아준 아란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사랑합니다, 아란흐로드.”
달이 저물고 풀벌레들이 이슬을 피해 달아날 때까지 그는 끊임없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 간절함에 감복한 아란은 동이 터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곁에 남았다. 그리고 에 녹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주었다.
***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건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뀐 걸 기민하게 눈치챈 황제는 조바심 내던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그가 황녀를 품 안에 끼고돌며 2년이나 시간을 끄는 동안, 에녹은 황궁의 대리석 바닥이 다 닳을 만큼 뻔질나게 황궁을 드나들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조만간 역사상 가장 충성스러운 로아크 대공을 얻게 되겠다며 농담 삼아 떠들어댔다.
그 꼴을 보다 못한 현 로아크 대공이 다시 정무에 복귀하겠다 엄포를 놓자, 에녹은 기다렸다는 듯 그길로 수도에 올라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에녹을 압박하려던 의도였던 대공은 아들의 작태에 분개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늘 순종적이던 아들이 이번만큼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공이 부랴부랴 수도로 올라왔을 때, 에녹은 풀밭에 앉아 황녀와 꽃반지 따위를 만들어 나눠 끼곤 시시덕대던 중이었다.
대공은 눈을 의심했다. 머리와 옷에 잔뜩 꽃을 꽂은 저머저리가 제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대체 황녀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입가가 온통 붉은 연지로 범벅이었다. 뒤늦게 자식을 하나밖에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제 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황제에게 결혼을 서둘러 줄 것을 간청했고, 황제는 마지못한 척 허락했다.
새하얀 면사포가 물거품처럼 흔들렸다. 그 아래 언뜻 보이는 여자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에녹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곧고 또렷했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 실은 천사가 아닐까? 에녹은 아직도 이 식이 끝나면 아란이 제 아내가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있지만 에녹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겐 얼굴을 가려줄 면사포가 없었다.
“너 귀 빨개. 괜찮은 거야?"
터질 것처럼 빨간 귓바퀴를 본 아란이 놀라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에녹이 전혀 개의치 않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에겐 면사포는 없었지만 대신 철판처럼 두꺼운 낯짝이 있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결혼식을 주관하던 대사제가 두 사람을 주의시켰다. 그는 막 맺어지려는 어린 부부의 수줍은 속삭임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만큼 늙은 자였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차기 로아크 대공의 미움을 사는 일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긴 예식을 마친 그가 마침내 딱딱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분은 신성하고 엄중한 결혼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신 앞에서 맹세하십시오. 신랑은 신부의 면사포를 벗기고 경건한 마음으로 키스를…...”
사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면사포가 벗겨지고, 에녹이 성급하게 입술을 겹쳤다. 마치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 같았다.
어쩔 줄 모르고 그의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내던 아란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목과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부부라면 뭐든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것이 비웃음과 민망함일지라도 말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혔다. 신이 축복을 내려주는 대신 역정을 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지나치게 농밀한 키스였다.
“아, 아니! 이, 이…………”
신 앞에서 벌어지는 무엄한 작태에 삭막한 감성을 가진 대사제조차 당황했다. 그는 분노로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입맞춤이 끝난 후, 아란은 뒤늦게 식장 분위기를 살폈다. 이제 그녀는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이 새빨갰다. 황제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간신히 화를 삭이는 중이었고, 황후는 젊음이 좋다며 손뼉을 치더니 포도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아란은 모후가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옆에서 대공 부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채 아들을 외면했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이 에녹에게 절연을 선언하더라도 그녀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른 하객들의 반응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태연한 건오직 에녹뿐이었다. 그는 뻔뻔한 낯짝을 쳐들곤 태연스레 신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때까지도 얼이 빠져 있던 그녀는 허둥지둥 에녹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뒤늦게 시녀와 시종들이 두 사람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며 허공에 꽃을 뿌렸다.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아란은 이 결혼식이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라는 서글픈 예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기척에 아란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에녹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로연이 끝나고 먼저 신방으로와 에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새 깜박 잠이 든 모양이다.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으응..….…….”
아란은 잠을 쫓기 위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얼마나 오래 잔 걸까.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래 잔 건 확실했다. 에녹을 보니 그는 이미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상태였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에녹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란은 한순간 그 입술에 시선을 빼앗겼다.
"잘생겼다."
아란이 배시시 웃었다. 뜬금없는 말에 실소를 짓던 에녹이 문득 술 냄새를 맡고 얼굴을 굳혔다. 고개를 돌리니 절반 이상이 사라진 술병이 보였다. 그가 알기로 아란은 포도주 두 잔을 마시면 만취였다.
"저건・・・・・…."
“내가 마셨어. 기분이 좋더라. 이래서 다들 술을 마시나봐.”
아란이 당당하게 말했다. 실제로도 기분이 아주 좋았다. 신방에 막 들어섰을 땐 몹시 긴장되었는데, 술을 조금 마시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에녹의 얼굴을 여기저기 만졌다.
“아무리 봐도 이마가 참 잘생겼어. 눈썹도 잘생기고, 눈도 잘생기고, 코도 잘생기고, 그리고……….”
이마부터 눈썹, 코를 훑어 내리던 손가락이 입술에 닿기 전에 에녹이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정확히는 일으키려 했다.
“어디 가? 가지 마.”
갑자기 아란이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무 데도 안 갑니다.”
“거짓말 마. 그럼 왜 일어나려고 하는데?”
아란은 덜컥 겁이 났다. 에녹이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라, 에녹은 별수 없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발이허공에 뜨자마자 아란이 그의 목에 답삭 매달렸다.
“이제 넌 내 거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결혼을 물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누가 할 말을.”
에녹이 웃으며 아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로 신방 곳곳에 켜진 촛불을 차례로 불어 껐다.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그는 다시 침대로 가 아란과 함께 누웠다.
“이제 주무세요."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솔직히 잠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일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싫어."
그녀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얇은 천 아래 감춰진 몸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이를 악물었다. 진작부터 아래가 뻐근했지만 인내는 익숙했다. 2년간의 기다림이 고작 하루 더 늘어난 것뿐이다.
그러나 아란은 이대로 잠들 생각이 없었다. 별다른 일을 기대하기보단 그냥 그와 더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다시 오지 않을 특별한 날을 이대로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눈 떠봐. 피곤해도 나랑 조금만 더 얘기해. 응?”
에녹은 그 말도 무시했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아란이 검지와 엄지로 그의 눈꺼풀을 잡아 벌렸다.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기는 몇 명이나 낳을까? 세 명? 난 가능한 한 많이 낳고 싶은데.”
곧 나머지 한쪽 눈도 떠졌다. 그건 아란이 한 일이 아니었다.
“첫날밤부터 취해서 주정이나 부리고.”
에녹이 가볍게 그녀를 타박했다.
“너는 더 많이 마셨잖아. 내가 다 봤어.”
잘못을 알긴 아는지, 아란이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저는 술을 잘 마시니까요.”
“아무튼, 지금 자긴 싫어.”
그녀가 꾸물거리며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술에 취한 자신보다 그의 체온이 더 뜨겁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에녹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린다고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그는 놀랍도록 진지한 표정이었다.
“말 들으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뭐, 뭐야………”
술 취한 와중에도 아란은 그게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도 에녹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단단한 뭔가가 그녀의 아랫배를 쿡 찔렀다. 아란은 이게 무슨 뜻인지도 알았다. 부황의 감시를 피해 비밀스럽게 서로의 온기를 탐할 때마다 겪은 일이었다. 에녹은 그것이 그가 그녀를 원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 두 사람 사이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초야.
비로소 그 단어가 실감났다. 그간 시녀들이 숨죽여 속삭이던, 혹은 책에서 보았던 은밀한 행위가 이제 코앞으로 닥친 것이다. 술기운으로 눌러두었던 긴장이 다시 스멀스멀올라오려 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도 안 무서워."
“거짓말도 못 하면서. 무섭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만 떠시고 주무세요."
에녹이 피식 웃으며 그녀를 달래듯 토닥였다. 그제야 아란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에녹이 그녀를 무섭게 할 리 없었다. 아란은 그리 믿었다.
“무서울 때만 떠는 건 아니잖아."
에녹은 다시 눈을 감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그녀가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단단한 것이 손아귀에 잡혔다. 생각보다 훨씬 큰 부피에 깜짝 놀란 그녀는 그만 손을 미끄러뜨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에녹이 펄쩍 튀어 오르며 놀랄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잘생긴 얼굴이 화가 난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란은 속지 않았다. 다시 쥔 그의 것이 조금 전보다 더 단단해져서 이젠 옷을 뚫고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의 턱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도 널 원해.”
에녹은 여전히 사나운 얼굴이었다. 긴장과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아란이 조금 웃었다.
그는 마주 웃는 대신 물어뜯을 듯이 입을 맞췄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무시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조급한 몸짓이었다.
“아!”
짧은 신음마저 그가 삼켜버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사이도 없이 잠옷과 속옷이 한 번에 끌어내려졌다.
졸지에 상체가 전부 드러나자 놀란 아란이 가슴을 가리려 버둥거렸지만 에녹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양 손목을 한꺼번에 잡아 그녀의 머리 위에 고정한 그가 다른 손으로 창백한 맨가슴을 틀어쥐었다.
뜨거운 체온에 아란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성년이 지나고 그가 간혹 키스를 하며 옷 위로 가슴을 건드렸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진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늘 조심스러웠던 이전과 달리, 지금 그는 거침없었다.
계속 입을 맞추는 와중에도 그는 연약한 가슴을 손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움켜쥐었다가, 긴장으로 바짝 일어선 유두를 엄지로 꾹 누르기도 했다.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제멋대로인 애무에 아란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에녹은 마음껏 제 욕심을 채웠다.
그러나 그녀를 더 당황스럽게 하는 건 자꾸만 새어 나오는 비음이었다.
“아으……………”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맞닿은 입술을 통해 낮게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번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문질렀다. 점점 숨이 찼다.
아란이 입을 크게 벌리고 헐떡이자 그가 드디어 입술을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마치 네가 자초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란은 그 시선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호흡할 때마다 창백하고 둥근 가슴이 가파르게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했다. 에녹이 그곳으로 눈을 내렸다.은근히 느껴지는 수치심에 아란이 입술을 깨물었다. 만져질 때보다 지금이 더 부끄러웠다. 아란이 결박된 손을 겨우비틀어 빼내 그의 눈을 가렸다.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곤눈이 가려진 상태 그대로 고개를 숙여 정확히 가슴을 물었다. 유두를 포함한 가슴 절반이 그의 입술 안으로 사라지는모습에 아란은 충격을 받았다.
“잠깐만 잠깐만 ・・・・・・ 흐읏・・・・・・.”
살갗 위로 느껴지는 뜨겁고 촉촉한 점막 역시 지나치게자극적이었다. 발끝을 꽉 오므리던 그녀가 뒤늦게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이제 못 물립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조그만 상체를 단단히 끌어당기며 에녹이 말했다. 아직도 가슴을 물고 있어 발음이 불분명했다.
“무, 물리려는 거, 앗,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너, 너도 버, 버, 벗으라고."
그녀는 움츠러든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허세를 부렸다. “아하.”
에녹이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어쩐지 놀리는 것 같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아란은 허둥지둥 이불 속에 숨어 몸을 가리곤 간신히 숨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에녹이 옷을 벗는 모습을 훔쳐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의 벗은 상체를 몇 번 보긴 했지만 어쩐지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순식간에 옷이 던져지고 마지막 속옷이 남았을 때, 그가 몸을 겹쳐왔다. 그것마저 벗을 용기는 아직 그에게도 없는 모양이었다. 에녹에게도 조금은 수줍은 면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우면서도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아란은 용기를 내어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에녹혼자만 그녀를 만지는 건 억울하니까.
보드라운 손바닥이 닿자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몸이었다. 그 아래로 빠르고 힘찬 맥동이 느껴졌다. 그 역시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그 또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아란은 조금 전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유두를 건드려보았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그대로 에녹이 달려들었다.
“꺅⋯!”
이불과 함께 아슬아슬 걸쳐져 있던 옷이 한 번에 벗겨지고 그의 손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곳은 이미 아까부터 흐른 액체로 젖어 있었다.
"그러게."
에녹이 성마르게 웃었다.
"하마터면 무심한 남편이 될 뻔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원하시는 줄도 모르고 잠잘 생각이나 했다니.”
미끌거리는 감촉을 만족스럽게 확인한 그가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아란이 놀라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도리어 더 활짝 벌어졌다.
정염에 물든 시선이 닿은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왈칵 흘러나왔다. 그 음탕한 모습이 에녹의 충동을 부채질했다. 고상함 따위는 모르는, 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내들이나 할 법한 저속한 말을 쏟아내고 아란이 눈물을 터뜨릴 때까지 몰아붙이고 싶었다.
“에녹・・・・・・.”
아란이 붉어진 눈시울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보자 머리에 한층 더 열이 올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처음이었다. 함부로 날뛰었다가는 아란이 다칠지도 몰랐다. 그는 어설프게 주워들은 음담패설을 떠올리며 살갗 아래 숨겨진 돌기를 찾았다.
“아윽……………”
슬쩍 누르자 아란이 파르르 전율하며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작지만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가 그를 더 부추겼다. 그는 이번엔 손가락에 질척한 액체를 묻혀 조금 더 세게 문질렀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자극에 아란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으응, 자, 잠깐……………”
그러나 에녹이 체중을 실어 누르는 바람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집요하게 돌기를 자극하자 어느 순간 그녀가 허벅지를 꼬며 안절부절못했다. 절정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잠, 아으, 아!"
얼마 가지 않아 아란이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르며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았다. 저절로 허리가 휘며 몸이 세차게 떨렸다. 애액이 에녹의 손을 다 적실만큼 흥건하게 터졌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일그러지는 얼굴을 숨기고 싶어 고개를 돌리자 에녹이 턱을 잡아 고정했다. 붉은 눈이 그녀가 절정에 오르는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귀여워."
“거, 거짓말.”
그는 앙탈을 부리는 아란을 달래주며 젖은 제 손을 충동적으로 핥아보았다. 별다른 맛은 없었다.
“무, 무슨………….”
당황한 아란이 파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처음겪은 절정의 여파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당황한 모습이 귀여워서 그는 일부러 보란 듯이 그녀의 체액을 다 핥았다. 그러다가 아예 키스하듯 애액이 흘러나오는 입구에입술을 대고 핥기 시작했다.
"악!"
이번에야말로 아란은 진심으로 저항했다. 취기가 단숨에 가셨다. 그녀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 모든것이 단순히 자식을 만들기 위한 행위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미친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녹이 이를 세워 클리토리스를 살짝깨물자 자지러지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마, 말도, 아흑, 안 돼. 아, 제발 그, 그만둬…………!"
애원하는데도 에녹은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좁은 틈에 손가락까지 밀어 넣었다. 흠뻑 젖어 미끄러운 점막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무는 것을 그녀도 고스란히 느꼈다.
아픔보다도 조금씩 아래를 늘리는 생경한 감각에 아란은 혼이 빠질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 에녹의 머리채가 잡혔지만 두 사람 다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그의 입술로 한 번 더 절정에 이르고 말았다. 애액으로 흥건한 에녹의 입가를 보며 아란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에녹이 뻔뻔스럽게 웃었다.
왜 웃지? 뭐가 저렇게 좋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와중에도 아란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파요.”
그는 아란을 달래는 척하며 속옷을 내렸다.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가 튀어 오르듯 꺼떡이며 뱃가죽에 바짝 붙었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아래에 와닿자 아란이 무심코 내려다보려 했다. 그는 얼른 조그만 턱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그녀는 너무 작아 그의 것을 전부 담기엔 벅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와 그만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그녀가 겁을 먹고 도망가면 곤란했다.
“너무 예뻐서 미칠 것 같아.”
그는 연신 밀어를 속삭이며 아란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 수작에 홀딱 넘어갔다. 그사이 그는 움찔거리는 입구에 뭉툭한 선단을 갖다 대고는 몇 번 문질렀다. 이미 예민해져 있던 몸은 그것만으로도 움찔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젠 아프다고 울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란은 무작정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제 아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픔을 참는 건 그녀의 몇 안 되는 특기이자 장점 중 하나였다. 그냥 빨리 이 미친 행위를 끝내고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기특하셔라.”
땀이 맺힌 아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그대로 진입을 시도했다.
"악!"
아래가 억지로 벌어지는 고통에 아란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단 몇 초 만에 그녀는 제가 얼마나 자만했는지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두꺼운 성기 끝이 좁은 틈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은 너무도 뚜렷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 아파…….!"
아픔을 호소하자 성기가 진입을 멈췄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호흡이 조금 편해졌다.
에녹 역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처음 파고든 여자의 몸은 좁고 뜨거웠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잡으며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와 콧잔등에 연달아 입을 맞췄다. 그러나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벌린 손아귀는 그대로였다.
아란의 숨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에녹이 다시 진입했다. 아란이 다시 울먹였지만 이번엔 멈춰주지 않았다. 애원하고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우는 것도 예뻐.”
그래서 더 울리고 싶어.
그가 조그만 귓바퀴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달래는 척하면서 끝까지 밀어 넣는 게 더 얄미웠다.
마침내 완전히 삽입되었을 때, 아란은 기진맥진해 늘어졌다. 그의 성기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이젠 울 힘도 없어서 눈물만 줄줄 흘렸다.
“다 삼켰어. 잘하셨어요.”
에녹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욕망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아래가 저절로 조여들었다.
잘라먹을 듯 조이는 감각에 에녹이 신음을 흘렸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의 것을 품느라 한계까지 벌어진 접합부도, 발갛게 달아올라 흐느끼는 아란의 얼굴도.
본능을 좇아 그가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자 아란이 다시 끊어질 듯 가느다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에녹은 이제 아프냐고 묻지도 않았다. 대신 다리 깊은 곳에 숨은 돌기를 애무했다.
“으응..….…….”
울음소리가 점차 달뜬 신음으로 변했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분명 아프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가 깊은 곳을 때릴 때마다 몸이 울리며 배 속이 간지러웠다. 손마디가 하얗게 드러나고, 발가락이 저절로 곱아들었다.
"아으으응!"
아란이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크게 벌렸다. 놀랄 만큼 커다란 신음이 터졌다. 손가락으로, 입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질구가 세차게 경련하며 그의 것을 탐욕스럽게 쥐어짰다.
“후으……………”
에녹 역시 낮은 신음을 흘리며 파정했다. 쾌락에 취한 그가 목덜미를 무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아란은 몸을 덜덜 떨며 절정을 견뎠다.
“오늘 아이가 생기면 어떨까요. 백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딸이라면 분명 사랑스럽겠죠."
탈력감에 늘어져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그녀에게 에녹은 환심을 사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냈다. 실은 애 같은 건 낳을 생각도 없었다. 차기 대공위야 방계에게 물려주면 그만이니까. 그에겐 아란이 더 중요했다. 피임약까지 챙겨 먹고선 위선 떠는 제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었지만, 그녀의 기분만 맞춰줄 수 있다면 이런 거짓말따윈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의도와는 달리 아란이 울상을 했다. 이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출산은 어떨지 상상도 안 됐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런데 어, 언제 뺄 거야?"
사정이 끝난 뒤에도 에녹은 여전히 그녀 안에 머물고 있었다. 크기가 줄었는데도 품고 있기 버거웠다.
에녹이 그 질문을 못 들은 척했다. 그 태도에서 그녀는 불길함을 느꼈다.
“다 끝났잖아. 맞지?"
여전히 그가 반응이 없자, 아란은 스스로 성기를 빼기 위해 엉덩이를 움직였다. 박혀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에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성기가 반쯤 빠져나갔을 때, 갑자기 아래가 다시 빠듯하게 벌어졌다.
"으응?"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거세게 박혔다. 질퍽한 소리와함께 물이 세차게 튀었다.
"아윽…………!"
에녹이 흐물흐물하게 풀린 안쪽에 제 것을 연달아 쑤셔넣었다. 꼼지락거리는 몸짓에 다시 발기한 것이다.
“무슨, 아앙, 아, 아…………!”
정신없이 흔들리며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뒤늦게 제 안을 파고든 물건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저런 걸……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흐느끼며 뭐라중얼거리자 에녹이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바람에 각도가 달라지며 더 깊은 곳을 쑤셨다. 아란이 몸을떨었다.
“야, 양심이, 흐윽, 있는 거야…………?"
그도 아예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 양심을 챙길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양심이란 그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게다가 꽉 죄어오는 내벽을뿌리칠 인내 역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회피하며 경악하는 그녀의 얼굴에 연거푸입을 맞췄다. 입술의 역할은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듯이.
이번에도 아란은 그의 수작에 속아 넘어갔다. 어물어물입맞춤을 받던 그녀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기까지는 그리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한 몸처럼 맞물렸다. 아무리 박아도 그녀의 안은 처음과 다를 바없이 뜨겁고, 좁고, 황홀했다.
그는 아란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란이 신음을 흘리며그를 마주 안았다. 칭얼거리고는 있어도 그녀도 자신과 같은 기분이라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온전히 서로의 것이 되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 부부는 작위를 에녹에게 물려주고 예전부터 알아보았던 휴양지로 떠났다. 에녹은 기다렸다는 듯 대공성의 가장 호화로운 방을 차지해 침실로 꾸몄다. 명실상부한 대공령의 주인이 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드러나는 에녹의 뻔뻔함에 아란은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어쩔 수 없었다. 물리지 못한다고 못 박은 쪽은 누가 뭐래도 아란이 먼저였다.
“아, 아・・・・・・!"
화려한 침실의 넓은 침대 위에서 그녀는 제 발목을 잡은 채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완전히 드러난 음부엔 에녹의 손가락이 박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충분히 수치스러웠지만 더 큰 문제는 지금이 대낮이라는 사실이었다.
“놓치지 마세요. 어젯밤에도 절 두고 먼저 잠드셨으니 오늘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겁니다.”
맨날 자기 좋을 대로 하면서.
아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건신음뿐이었다.
최근 아란은 종일 자다가, 해가 질 무렵 일어나 에녹과 함께 식사하고, 침대에 누워 몸을 겹치고, 다시 잠드는 나날을 반복하고 있었다. 간혹 낮에 깨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밤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늘 자신이 먼저 곯아떨어지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녀는 심지어 미안한 마음도 약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