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43화 (143/146)

10화

“응.………….”

혀가 얽히는 순간, 아란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그러자 사납던 에녹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아란도 그를 밀어내던 손에서 힘을 뺐다. 힘의 차이가 현격해 저항이 소용없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에녹은 그녀가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속내는 어떻든, 겉보기에는 그와 연인다운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온갖 감정이사라지고 애틋함이 자리를 채웠다. 무엇보다 파혼한 뒤엔이런 기회조차도 없을 거라 생각하자 서글퍼졌다.

그래도 조금 더 다정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떨면서도 순응의 뜻으로 눈을 감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금이나마 화가 풀리길 바라면서.

그 반응이 외려 그를 당황스럽게 했는지, 갑자기 입술이떨어져 나갔다. 아란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에녹은 조금 전보다 훨씬 진정된 얼굴이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럴 땐 화를 내셔야죠. 뺨을 호되게 때리시거나."

예고도 없이 입 맞춘 건 본인이면서 에녹은 오히려 아란을 나무랐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머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어쩌면 아란은 사일러스 공작이 입을 맞췄어도 이렇게순순히 받아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겨우 눌러두었던 화가 다시 치밀었다.

어쩌면 이미 벌어진 일일지도…….…….

에녹이 어떤 감정에 휩싸였는지도 모르고, 당황스러운와중에도 아란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왜?”

“왜냐니, 그야 제가 전하를 희…………롱하지 않았습니까.” 대답하는 에녹의 얼굴이 뒤늦게 자기혐오로 일그러졌다. 그에 반해 아란은 조금씩 침착을 되찾았다.

생각해 보니 무서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이전부터 줄곧 바랐던 일이 조금 과격하고 예고 없이 찾아왔을 뿐이다. 아란은 방금 벌어진 일로 화를 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이와 별개로 그가 클레어드와 사일러스 공작에게 한 잘못은 화를 내야 할 것이 맞았지만.

“그렇구나.”

갑자기 그녀가 한껏 까치발을 하고는 양손으로 그의 두뺨을 감쌌다. 그리고 그에게 입 맞췄다. 이번엔 에녹이 얼어붙을 차례였다. 그와 달리 아란의 입맞춤은 아주 가볍고 조심스러웠다.

“이제 화낼 거야?"

잠시 후 입술을 뗀 그녀가 속삭였다.

“아니지, 이미 화는 내고 있으니까. 그럼 날 때릴 거야?"

“무슨 말을…………!”

“나도 널 희롱했잖아.”

단 한마디로 아란은 에녹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러고도모자랐는지 재차 공격해오기까지 했다.

“왜 말이 없어?”

".......”

“좋아, 그럼 다른 걸 말해줘.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넌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데?”

에녹은 이번에도 꿀 먹은 벙어리 신세였다.

“대답해, 빨리.”

“저는.....….”

“대답하지 못하겠으면 네가 맞춰봐. 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은지."

그는 그마저도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아란은 그의 예상을 빗나가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건 희롱이 맞았다. 함부로 여자의 입술을 훔친 파렴치한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 표현이 아니라면 도무지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희롱당하다 못해 송두리째 휘둘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너도 나만큼 바보구나.”

아란이 웃었다. 에녹은 홀린 듯이 그 입술에 눈을 고정했다. 조금 전까지 서로 맞대고 있던 그곳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 때, 멀리서 아란을 찾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에 찾아갈게. 그때까지 대답을 생각해 봐."

그 말을 남기고 아란은 서둘러 시녀들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에녹은 멍청하게 입술만 매만졌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홀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마음을 가득 채웠던 답답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드디어 그는 제 감정을 명징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에녹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워 아까 있던 일을 떠올렸다.

놀랐을까?

아란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밤에 찾아온다고 했었지. 에녹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야심한 밤에 황녀가 무슨 수로 침실을 빠져나온단 말인가.

그럼 내가 찾아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들켰다간 단단히 경을 칠 것이다. 그래도 가고 싶었다. 아직 그가 그녀의 약혼자일 때 말이다.

가서 낮의 무례를 사과하고 이번에야말로 파혼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해야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갈 만큼 뜨겁고 조바심 나는 이 감정은 분명 동정이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도 아란의 약혼자로 남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결혼하여 남편이 되어야 했다.

“하……………”

에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진 부부가 된 아란과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저는 천성이 괴팍하니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아란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는 꼴은 못 본다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 남자는 오로지 그 한 명뿐이어야 했다.

아란 역시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란흐로드는 에녹 로아크를……………

거기까지 생각한 그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번 건 조금전보다 무겁고 깊었다. 지금껏 제가 해온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양심이 따끔거렸다.

왜 그렇게 무시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쉽게 손에 넣었으니 하찮은 줄로만 알았다.

용서받을 수 있을까?

병신 새끼.………."

에녹은 애꿎은 침대 기둥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이마가 빨갛게 부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 있지?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면 정말 잘할 수 있을 텐데.

아니,적당히 다정한 척만 했어도 지금 이렇게까지는.......

뒤늦게 후회하던 그는 문득 제 입술을 만져보았다. 그런 짓을 했는데도 아란은 다시 키스해주었다. 그건 아직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뜻일 것이다. 설령 마음이 식었더라도 아란은 다정하니 매달리면 마음을 바꿀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치졸한 자신을 비웃었다. 그러나 자꾸만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 때, 아래쪽 화단에서 누군가 숨는 듯한 기척이 났다. 분명 사람이었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로 기척이 느껴진 곳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던 차에 누군진 몰라도 붙잡아서 화풀이를 잔뜩 해줄 생각이었다. 에녹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어떤 놈・・・・・・.”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입이 험하구나. 새로 안 사실이네.”

아란이 꽃 사이로 얼굴을 내밀곤 손을 흔들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에녹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하? 이게 무슨…………”

“아까 오겠다고 했잖아."

“거기서 기다리세요.”

에녹은 서둘러 창문 옆으로 자라난 나무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나무 잘 탄다.”

아란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감사합니다.”

엉겁결에 감사 인사를 한 에녹이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이 시간에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습니까? 시녀들은 어쩌시고요?"

"보고 싶어서 왔어."

바쁘게 움직이던 그의 눈동자가 아란을 향했다. 그새 빨갛게 칠한 입술로, 그녀가 소리 죽여 말했다.

“들킬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 아무도 모르게 왔으니까. 정말이야. 황궁 샛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고 보니 맨 처음 만났을 때도 혼자였던 게 생각났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던 건가.

“아무리 황궁이라도 이 밤중에 혼자 돌아……………”

에녹의 잔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란이 그의두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생각해 봤어?”

반짝이는 눈동자 앞에서 에녹은 죄인처럼 주눅이 들었다. 아까까지 생각하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이 또다시 그를뒤덮었다. 그는 일단 사과의 말을 꺼냈다. 부탁하고 매달리는 건 그 나중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에녹은 아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그의 사과가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덜컥불안해졌다.

"그게 다야?"

저 질문은 무슨 뜻일까? 더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하는 건가? 하기야, 그가 저지른 잘못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모자랐다.

“먼저 제멋대로 굴었던 일을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그간전하를・・・・….”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자꾸만 갈라졌다. 에녹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더 적당한 말, 더 진실하게 들릴, 그런 말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러나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의 머리는 점점 뒤죽박죽되었다.

“아니, 아니, 나는 그런 말 들으러 온 게 아닌데.”

아란이 손을 내저었다.

“그럼 무슨 말을…………

에녹은 그녀의 의도를 도통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새땀으로 축축해진 그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리 춤이나 출래? 오랫동안 못 췄잖아. 아까 연회에서도 그렇고."

“춤이라니요.”

"응? 어서. 정말 추고 싶었단 말이야."

아란이 그의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에녹은 얼떨결에 그녀의 동작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예상보다 훨씬 희망적인 상황이었다.

휘황한 샹들리에 불빛이 아닌 달빛이 두 사람 위로 내려앉고, 음악 대신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는 무도회장에서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아란이 움직일 때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향기가 났다. 그럴 때면 에녹의 마음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넋이 나간 것처럼 눈으로 그 움직임을 쫓던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전하.”

“응?”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간・・・・・・ . 전부."

아란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늘 보아온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그러나 다시 보니 새침한 것 같기도 했다. 달빛에 시야가 아른거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가슴 위로 뺨을 기댔다.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쳤다. 에녹은 제 마음을 전부 들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없이 부끄러워졌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비겁한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아란이 깍지 낀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손짓 한 번이면 뿌리칠 연약한 힘이었으나 그를 옭아매기엔 충분했다.

그날, 그의 손에 고인 물을 마셨을 때와 똑같은 눈빛으로 아란이 에녹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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