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42화 (142/146)

8화

로아크 가문의 후계자가 제 약혼자에게 무심하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차라리 아란을 미워하기라도 했다면 그것 나름대로 특별한 감정이라 여길 수 있겠지만, 그는 6년 내내 생판 남을 대하듯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당장 자신이 황녀에게 입을 맞춰도 그는 남의 일처럼 무심할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에녹은 마치 그를 질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녹이 태연하게 아란의 어깨를 감싸고 슬쩍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뭔데?”

아란이 잔뜩 경계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공기가 냉랭하니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남 앞에서 할 말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다른 이가 아는 걸 원치 않으시겠죠."

아란은 잠시 망설이다 에녹을 따라 자리를 떴다.

한참 말없이 걷던 에녹은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말인데 그래?"

아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에녹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붉게 칠하지 않은 원래 빛깔의 입술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예뻐서, 그리고 다른 남자들에게 잘 보일 마음이 없다는 의도가 선명하게 읽혀서 자꾸만 웃음이 나려고 했다. 클레어드를 당장이라도 때려눕히고 싶은 감정은 여전했지만, 함께 시시덕거리던 아란에겐 손가락 하나 갖다 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아란이 고개를 숙였다.“저기, 파혼 건 때문에 그러지?"

“예・・・・・…? 예."·?

에녹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이 조금 전과 달리 풀죽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직 부모님께 말씀 못 드렸어. 그럼 곧바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고 하실 것 같아서. 아니, 오해는 마. 네게 매달리려 하는 게 아니고, 아직 내가 결혼까지는 마음의 준비가안 돼서."

“괜…찮습니다.”

“오래 끌지는 않을게. 너도 언제까지 나한테 매여 있을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넌 외동아들인데."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차마 에녹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조차 힘들어 아란은 하마터면 볼썽사납게 울 뻔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더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튼, 이해해줘서 고마워. 난 가볼게."

"그게 아닙니다!"

에녹이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파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절박하게 내뱉은 말에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날 동정해서 그런 거라면 괜찮아. 그런 감정으로 결혼해선 안 돼. 그건 기만이야."

동정.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그는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이었다.사실 그것은 얼마 전까지 스스로도 하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아란이 제 마음을 동정이라고 여긴다는걸 알자 놀랍도록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게 정말 동정일까?

그녀의 말대로, 단순히 동정만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제가 내린 답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이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하고, 다른 남자와 웃는 꼴만 봐도 피가 거꾸로 솟는 이 마음은.

말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아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 봐. 날 가엾게 여길 필요 없어, 에녹. 난 그냥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야."

“………그런 게 아닙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동정이 아닌 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란은 믿어주지 않았다. 불확실한 마음에 흔들릴 만큼 아란은 어리석지도, 어리지도 않았다. 멀어지는 아란의 뒷모습을 보며 에녹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

아란에게 거절당한 후에도 에녹은 괜히 미적대며 황궁에 머물렀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일정을 늦추게 해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황제에겐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에녹의 눈에 거슬린 건 클레어드 변경백의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란에게 수작을 부리는 자들을 일일이 면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전부 형편없는 놈들로, 차라리 클레어드가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뒤 열린 연회에서, 그는 클레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밉살스러운 사내를 보게 되었다. 눈부신 금발에 바다처럼 푸른 눈을 가진 미남, 바로 사일러스 공작이었다.

"헤시온!"

연회 내내 아무와도 춤추지 않고 에녹 옆에서만 어색하게 서 있던 아란이 그를 보곤 반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친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의외로 마음이 맞아 벌써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참이었다. 발을 헛디딘 그녀가 휘청이자 공작이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고마워요, 헤시온."

“괜찮으십니까? 반겨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보다 몸을 더 소중히 여기십시오, 전하."

아란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저번에 말했잖아요. 아니면 나만 혼자 친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말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무안하게 만들지 말아요.” 사람들을 의식한 사일러스 공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아란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아란흐로드 님."

그제야 그녀가 다시 웃었다.

“좋아요. 왜 요즘은 수도에 오지 않았어요?”

“그간 바빴습니다. 새 항로를 뚫어 무역이 활발해진 건 좋은데, 해적이 자꾸 출몰하는군요."

이번에 사일러스 공작이 수도에 온 것도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청렴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만, 이번엔 특별히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게요. 얼른 해적을 소탕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런 고마운 말씀을.”

“고맙긴요. 실은 내가 하루빨리 다나르에 가보고 싶어서 그래요. 헤시온 말만 들어도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기대돼요. 내가 그곳에서 즐겁게 지내려면 다나르 사람들이 빨리 안전해져야 하잖아요."

아란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에녹은 유달리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사일러스 공작의 이름을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그의 곁으로 엘케인 후작이 다가왔다.

“오늘따라 눈매가 유달리 매서워요, 공자, 다른 사람들이 공자에게 인사도 못 건네고 있군요.”

“그런가요.”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후작은 조금도 기분이 상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녀는 에녹이 시선이 닿은 곳을 유심히 지켜보다 살포시 웃었다.

“그림이 나쁘지 않죠? 개인적으로 전 공자보다 사일러스 공을 밀었답니다."

“밀다니요?"

"어머나, 모르셨나요? 황제 폐하께서 황녀 전하의 남편감으로 사일러스 공작도 염두에 두셨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녹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와 아란이 파혼하면 사일러스 공작이 아란의 남편이 될 확률이 높았다. 심지어 누가 보아도 공작이 황녀에게 호감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능숙하게 감추고 있었지만 에녹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게다가 그는 클레어드 같은 애송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상대였다.

질투에 사로잡힌 그의 눈에 두 사람이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보였다.

아란은 연회장 밖의 정원 구석에 있는 벤치에 사일러스 공작과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그에게 고민을 상담하길 원했고, 공작은 선뜻 청을 수락해주었다. 자리를 잡은 후에도 아란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워낙 다정하고 편해서 그라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한참 후에야 어렵사리 물었다.

“헤시온은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있어요?”

“예.”

“잘 됐어요?”

“글쎄요. 지금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눈이 높은 여잔가 봐요. 헤시온 같은 남자를 몰라보다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사일러스 공작이 하하,

웃었다.

“그럼 이별해본 적은요? 아주 아주,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게.”

“아직은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영영 없길 바랄게요.”

“그런데, 왜 그런 게 궁금해지셨습니까?"

“요즘 든 생각인데,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이별도 중요한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맞다며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멋있게 이별할 수 있을까요? 훗날 생각해도 상대가 밉지 않은 그런 이별 말이에요.”

“그런 이별은 없습니다. 특히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게 헤어졌다면 더더욱.”

"왜 단정 지어요? 헤시온도 슬프게 이별해본 적 없다면서요.”

"그래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한날 시작해 한날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한쪽에게 마음이 남아 있다면 멋진 이별은 힘들겠지요. 게다가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애틋하게 사랑했다면 실연 후에 원망도 크게 남을 겁니다."

“그런가요………….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아요.”

아란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공작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로아크 공자와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제 반응이 지나치게 격했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일러스 공작 역시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과 함께 진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예,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헤시온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새삼 말씀드리는 거지만 로아크 공자를 정말 사랑하시나 봅니다."

“네. 맞아요. 나는 그를 사랑해요."

“그를 왜 좋아하십니까?"

그 질문에 아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실은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으니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얼마 전에 알게 되었어요.”

“뭡니까?"

"헤시온. 만약 내가 울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란이 뜬금없이 물었다.

“글쎄요. 아마 울지 말라고 달래지 않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난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정말 싫어요. 그 말을 들으면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에요.”"왜죠?"

“사람들은 예전부터 내가 조금이라도 울거나 화를 내면다들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쩔 줄 몰랐어요. 이해는 해요. 내가 울면 부황께서 크게 화를 내시니까. 그러니 전부 내가 슬픔도 분노도 모르길 바라고, 나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고………….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영원히 행복할 수만 있겠어요? 살면서 고통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건데. 상처가 나고 아무는 과정에서 성숙해지는 건데, 아무도 그걸 원치 않아요. 평생 어린아이로만 남기를 바라요. 물론 날 사랑해서 그런 건 다 알지만………. 가끔은 숨이 막혀요.”

“딱 한 번 에녹 앞에서 운 적 있어요. 그런데 에녹은 울지 말라는 말을 안 하더라고요. 심지어 달래주지도 않았어요. 난 너무 속상해서 우는데, 그 사람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어요.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걸 알면서도. 날 아끼는 사람은 많아도 내 앞에서 솔직한 사람은 에녹밖에 없었거든요."

“그랬군요.”

사일러스 공작은 어딘지 복잡미묘해 보였다. 그것을 본 아란은 우울한 표정을 싹 지우곤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혼자 떠드니까 민망하네요. 아무튼, 오늘 말한 건 비밀이에요. 대신 나중에 헤시온도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해요. 나도 꼭 비밀을 지킬게요. 못 미덥게 들리겠지만, 그래도입은 무거운 편이거든요.”

“시원한 해답을 내려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사일러스 공작이 먼저 일어나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아란은 가볍게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여전히 슬프고,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털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일러스 공께서 남의 약혼자나 넘보는 난봉꾼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둠 속에 에녹이 서있었다. 공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란 역시 얼굴을 굳혔다.

“말이 심하시군요.”

공작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몸을 세운 에녹이 천천히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부디 그 관계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유명무실하다 해도 간통은 엄연한 죄니까.”

“전 간통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는 로아크 공자께서야말로 남의 말이나 엿듣는 쥐새끼 같은 짓을 하시는군요."

공작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아무리 에녹이 대공가의 후계자라도 아직은 변변한 작위조차 받지 못한 애송이였다.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것도 엿듣지 않았습니다.”

“에녹, 왜 그래? 이게 무슨 실례야?"

심상치 않은 기색에 아란이 본능적으로 사일러스 공작 앞을 막아섰다.

“거기 멈춰. 그리고 당장 사과해.”

“지금…………”

에녹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만 짓씹었다. 건방지고제멋대로인 그라도 차마 아란에겐 간통 운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일러스 공작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한편 아란은 에녹이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꾸만 그를 피해서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회피한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는 걸 느낀 아란이 사일러스 공작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요. 나는 에녹과 이야기 좀 하다 갈게요. 미안해요, 헤시온."

“하.”

아란이 또다시 공작의 이름을 부르자 에녹은 앞머리만 거칠게 쓸어내렸다. 사일러스 공작이 경계하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냥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공작은 망설였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

“주변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소리를 지르십시오."

신신당부한 공작이 자리를 뜨자 에녹이 날카롭게 웃었다.

“저자는 제가 전하를 해치기라도 할 거라 생각한 걸까요.”

아란은 그가 사일러스 공작에게 적대적으로 구는 이유를 떠올려 보았지만, 답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곧 포기하고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무엇이 말입니까?"

“조만간 파혼해준다고 했잖아.”

“예. 그전까지 전 전하의 약혼자죠. 그런데 약혼자를 두고 다른 사내와 퍽 다정하시더군요. 모든 남자를 그리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십니까?”

에녹의 빈정거림에 아란은 어이가 없다가 이윽고 분노로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래. 6년이나 참아줬는데 더 기다려 달라고 하는 게 염치없다는 건 알아. 당연히 화가 나겠지. 나한텐 어떻게 굴어도 좋아. 그렇지만 내 친구들에겐 무례하게 굴지는 말아줘.”

"친구?"

“그래. 오늘뿐만이 아니잖아. 저번에도 클레어드를 무시하고. 나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이 그런 대접받을 이유는 없어."

가까운 사이.

에녹은 그 말이 꼭 자신은 아란과 가깝지 않다는 말처럼들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는 배신감을 느꼈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약혼자보다 더 가까울 수 있을까.

“왜 제가 그자들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됩니까? 그놈들이 전하께 수작 거는 게 빤히 보이는데, 약혼자로서 그 정도 권리도 없는 겁니까?”

한 걸음 다가선 그는 손을 뻗어 아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눈으로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직접 만지니 가느다란골격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아란이 숨을 삼켰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그러다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내가 파혼해주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내 지인들에게 화풀이하는 건가?

아무리 궁리해도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에녹이 화가 난 이유는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클레어드와 사일러스 공작에게 그가 저지른 무례가 정당하다는 건아니었다. 에녹의 잘못을 덮어주는 건 그들에게, 특히 늘자신을 챙겨주는 사일러스 공작에게 도리가 아니었다.

“좋아, 네 말뜻은 알겠어. 나도 화를 낸 건 미안해. 하지만 너는 분명 무례했어. 거슬리는 게 있다면 내게 직접 말하면 돼. 그런 식으로 굴지 말고, 헤시온에겐 꼭 사과해."

에녹이 대답하지 않자 아란은 힐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화가 많이 났나? 말도 하기 싫을 만큼?

뒤늦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실은 아직도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진작 미움을 샀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막막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행히 에녹은 곧 입을 열었다. 그러나 흘러나온 대답은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그 새끼들이 어떤 눈으로 보는지도 모르면서.”

“뭐?

에녹이 내뱉은 저속한 단어에 놀란 아란은 대답도 못 하고 입술만 벌렸다. 그러다가 이내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러나 정말 충격을 받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에녹 자신이었다.

이렇게 병신 같은 말이 정말 제 입에서 나왔다고?

그 와중에도 그의 입은 헛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 새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새살댈 수 있는 거지.”

“새, 새살대다니? 그리고 헤시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네가 어떻게 알아? 제대로 대화도 나눈 적 없으면서.”

에녹이 피식 웃었다.

“왜 몰라. 남자들이 여자를 두고 하는 생각이야 뻔하지.알려드릴까요."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이 입술 위를 쓸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무엄하게 침범하여 혀끝을 눌렀다. 아란은 정말로 대경실색해서, 튀어 오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왜, 왜 그래.”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아란은 잔뜩 긴장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는 아주 낯설어 난생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

"왜 모르십니까? 6년이나 된 약혼자인데."

그 사이 코끝이 닿을 듯 에녹의 얼굴이 가까이 내려앉았다.

불현듯 그는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간지러움은 순식간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격정으로 변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아란은 아직도 입술을 누르고 있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깨물지도, 뿌리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에녹은 엄지손가락을 조금 더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

아란이 앓는 소리를 냈다. 뭐라 말한 것도 같은데, 혀를 누른 손가락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했다. 에녹은 타액이 묻은 손가락을 빼냈다.

“에노……………”

당황한 와중에도 아란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뜨거운 입술이 그 위를 덮었다.

아란은 놀라 그의 어깨를 밀치고 팔뚝을 할퀴었다. 그러나 에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더 세게 끌어안겼다. 무례하다 못해 무도한 접촉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저 얼이 빠졌다. 사일러스 공작과 클레어드의 이름은 한순간에 저만치 사라졌다. 그냥 이게 무슨 일인지, 왜 이렇게 난폭하게 구는지 그 이유만 알고 싶었다.

뜨거운 혀가 입술과 치아 틈을 가르고 거칠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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