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뭘 하느냐, 에녹, 황녀께 인사드리지 않고."
보다 못한 대공비가 작게 주의를 주었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전하께서도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아란이 먼저 그의 손을 놓았다. 온기가 사라진 손이 허전했다. 기이한 상실감에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마차 문이 닫혔다.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에녹은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
아란이 황궁으로 돌아가고 한 달 가까이 흘렀다. 그간 아란이 파혼을 통보해 사교계가 발칵 뒤집히거나 황제가 노발대발해 로아크 대공을 소환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했다. 에녹은 아란이 침묵하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그는 황녀가 제 삶에서 얼마나 비중이 없었는지 새삼 확인했다. 모든 것이 그가 의도했던 일이었다. 귀찮고 신경만 쓰이던 약혼자가 사라졌으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해야 했다. 그러나 어찌 된 건지 하나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따금 아란을 떠올렸다. 그녀는 주로 예기치 못한 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낡은 목검, 구깃구깃하게 접힌 종잇조각, 여자들의 입술에 칠해진 붉은 연지, 심지어는 식사에 올라온 어패류와 양털로 만든 실만 봐도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꼭 기습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밤, 에녹은 아란을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손바닥에 닿았던 입술과 말갛게 올려다보던 눈동자, 그리고 억지로 눈물을 삼키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 견문록은 어떻게 끝났을까? 돌아가는 길에는 원하던대로 조개껍데기를, 양 떼를 보았을까? 단정한 필체로 쓰인 그녀의 여정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아마도 그 마지막은 자신의 욕으로 점철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불현듯, 제게 또 다른 그녀의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재로 뛰어든 에녹은 닥치는 대로 서랍을 열어젖혔다. 분명 서재에 보관해 두었을 텐데.
“황녀께서 보내셨던 편지는 어디에다 두었지?”
아무리 뒤져도 아란이 보낸 편지들을 찾지 못한 그가 시종을 불러 닦달했다.
“그것이, 없습니다.”
“황녀의 편지를 마음대로 버렸다고?”
차갑게 묻자 시종이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특별한 내용이 없으면 버리라고 하셔서……….”
"누가?"
“도련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에녹은 아연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그런 명령을 내렸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허탈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사실 에녹은 아란의 편지를 읽은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엔 그래도 약혼자 된 도리로 직접 읽고 답장을 하기도 했지만 나중엔 봉투도 뜯지 않고 시종에게 넘겼다.
어차피 대단한 내용이 없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황궁에 들릴 때마다 아란이 시시콜콜 떠들던 사소한 일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라도 떠올리려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어떤 얼굴이었지? 그때 난 뭘 하고 있었지?
그러나 그마저도 생각나지 않았다.
“도련님?"
에녹은 자신을 부르는 시종의 의아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망연해졌다. 정말로 궁금했던 건 글씨 따위가 아니었다. 그를 응시하던 눈빛, 속으로 삼킨 목소리, 종이 위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마음이었다.
그는 비로소 내내 자신을 뒤흔들던 감정의 이름을 알았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무치는 외로움이 뼛속을 파고들었다.
***
에녹은 황제의 알현실을 나섰다. 그는 차기 대공으로서 정기 보고를 올리러 수도에 온 참이었다.
대공가의 그간 로아크 대공은 에녹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넘겨 이제 그가 실질적인 대공령의 영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 전 황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란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원래는 빨리 용건을 마치고 개인적인 일을 해결할 생각이었으나 쓸데없이 황제가 심술을 부리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계획이 어그러졌다. 잠시 휴식을 가질 겸 물러났지만, 상황을 보니 오늘 안에 풀려나는 것은 무리일 듯싶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화려한 황궁의 정경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온 황궁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사람은 황제가 아닌 다른 이였다.
황제의 고명딸이자 아직까진 그의 약혼자인 소녀.
아란이야말로 그가 수도로 올라온 진짜 목적이었다. 에녹은 한참 남은 보고 기한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영영 아란을 피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녀를 만나 뭐든 결판을 내고 싶기도 했다. 이대로 그녀를 찾아가 뭐든 결판을 내고 싶기도 했고, 영영 피하고 싶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아란이 시녀들과 함께 반대편에서 걸어오다 그를 보고 멈춰 섰다. 어색한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안녕."
먼저 인사를 건넨 쪽은 아란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야?”
“예.”
“응. 그럼, 일이 잘 풀리길 바랄게."
아란이 막 에녹의 곁을 지나치려 했을 때, 불쑥 그가 그녀를 붙잡았다. 저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쁜 일이 없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무슨 이야기인데?”
"......."
에녹은 입술만 달싹였다. 막상 붙잡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란 뒤에 선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사정을 알고 있을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란이 주춤주춤 그와 거리를 벌렸다.
“어,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
“아………”
에녹은 못내 당황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는 아란에게 거절당하는 일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것이다.
“그러셨군요.”
“그럼, 먼저 가 볼게.”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아란이 후다닥 사라졌다. 만나면 뭐든 해결이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막막해졌다.
그날 저녁, 에녹은 아란과 다시 마주쳤다. 선약이 있다는게 단순히 핑계는 아니었던지 그녀의 옆엔 웬 젊은 남자 귀족이 있었다. 에녹은 그 젊은 남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클레어드 변경백의 아들이었다.
오만하고 예민한 성격 탓에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은 또래가 거의 없는 그와 달리 아란은 친구가 꽤 많았다. 그녀 옆에 있는 남자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에녹은 두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씩 말소리가 또렷해졌다.
“클레어드, 하늘에 별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글쎄요. 하지만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전하의 눈동자 안에서 그 별들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대화 내용을 들은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잘대나 했더니, 하잘것없는 농담이었다. 그렇지만 미소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란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뭐야, 그 느끼한 표현은? 설마 다른 여자들 앞에서도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클레어드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아란은 제가 그간 내내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쾌활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앞에서 곧잘 그랬듯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일도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에녹의 시선이 클레어드의 준수한 낯에 닿았다. 젊은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으레 그렇듯, 클레어드의 태도는 사뭇 과장스러웠다. 엉큼한마음을 품고 있는 걸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절 그렇게 헤프게 보셨다니 몹시 마음이 아픈데요.”
그러자 아란이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저기, 클레어드. 저번에 다쳤다던 곳이 혹시 머리였어?"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나.
화가 난 와중에도 에녹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부반응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 간에는 허물없는 사이에서만 공유할 수 있는 편안함이 묻어났다.
“뭐야, 왜 말이 없어. 혹시 삐쳤어? 응?"
아란이 클레어드의 어깨를 툭 때렸다. 어릴 때와 달리 성년이 된 그의 어깨는 단단하게 벌어져 있었다. 어설프게 쥔주먹이 닿는 순간 클레어드의 몸이 경직되었으나 그녀는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클레어드가 아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예고 없는반격에 아란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클레어드의 손을 뿌리치고는 그의 회색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어쭈, 몇 년 전까지는 나보다 키도 작았으면서? 이제 조금 컸다고 까부는…………….”
거기까지 지켜보던 에녹은 내부에서 뭔가가 폭발하는것을 느꼈다. 그의 걸음이 뛸 듯이 빨라졌다.
"로아크 공자?"
클레어드가 먼저 에녹을 발견했다. 그를 따라 뒤를 돌아본 아란이 기겁했다.
"어..….……? 에녹?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조금 전부터."
에녹은 간신히 평정을 가장했다.
“으응, 그랬구나. 인사해. 둘은 원래 아는…………”
그러다 아란은 제 손 때문에 클레어드의 머리가 새 둥지처럼 엉망이 된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그녀가 그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게 얼마나 다정해 보이는지는 자각도 없었다. 아란은 그저 클레어드와 애들처럼 유치하게 장난치던 모습을 에녹에게 전부 들켰다는 게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솜씨 없는 손길에 클레어드의 모습은 점점 더 우스워지고, 에녹의 얼굴 역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색한 공기를 참다못한 클레어드가 일단 나섰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로아크 공자. 몇 년 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인사는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클레어드는 조금 당황했으나, 그의 시선이 아직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아란의 손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어드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제 머리 위에 놓인 새하얀 손을 잡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에녹이 아란의 손을 낚아챘다.
클레어드는 황당한 눈으로 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 역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