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에녹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한 아란이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코가 닿을 정도였다. 상대의 숨결이 얼굴을 간질이는 느낌이 생생했다. 아란의 얼굴이 입술만큼이나 붉어졌고, 덩달아 긴장한 에녹 역시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마침 바닥에 떨어진 공책이 보였다. 에녹은 그것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활짝 펼쳐진 종이 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막대기 같은 게 보였다.
“어엇!”
아란이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지며 그림을 가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에녹이 공책을 주워든 뒤였다.
“그림에 취미를 붙이신 줄은….……”
그러고 보니 아까도 바닥에 강아지 같은 걸 그리고 있었었지. 그러다 에녹은 그 그림이 단순한 낙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이건………….
“부서진 등대?”
"어? 어떻게 알았어?"
그림 옆엔 작은 글씨로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엉성한 그림 솜씨와 달리 필체는 수려했다. 이제 보니 그 공책은 지금까지 지나온 장소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나름대로 견문록 비슷한 것이었다.
제법 그럴듯한 만듦새였으나, 그것을 읽는 에녹의 얼굴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에녹이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해서 조개껍데기는 확인 못 했음.]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아란을 보았을 때 느꼈던 불길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서둘러 종이를 넘겼다.
예상대로 오는 길에 본 양 떼 역시 그려져 있었다. 물론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뭉텅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6년간의 약혼 기간이 말짱 헛것은 아니었는지 그는이번에도 용케 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역시 그 아래에도 제법 긴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에녹이 창문 닫으라 해서 더 못 봄.]
다른 페이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보고 경험하고 머물렀던 모든 것과 함께 그가 부렸던 심술이 객관적이고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에녹은 그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그림을 좀 못 그려서 안 보여주고 싶었는데…생각보다 더 창피하다.”
아란이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에녹이 얼굴을구긴 이유가 순전히 형편없는 제 그림 실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됐습니다.”
갑자기 짜증이 치민 그가 차갑게 말했다.
"으응.”
갑자기 변한 그의 기분에 그녀는 어리둥절한 눈치였지만 에녹은 성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며칠 후, 두 사람은 또다시 함께 대공성을 나섰다.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아란을 데리고 바람이라도 쐬라는대공의 명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딱히 목적지가 없었다.
마차 안에서 아란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뭐에 기분이 상한 건지, 에녹은 지난번부터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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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쏟아지듯 밀려들어 아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저번에 나 감기 걸린다고 ・・・・・….”
“따뜻하니까 괜찮습니다."
“응………….”
짧은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에녹은 창밖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란도 그를 따라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마쯤 갔을까, 그녀는 굉장히 멋진 풍경을 보았다.
“저긴 어디야?”
그리 높지 않은 산속에 작은 샛길이 나 있었는데, 그 옆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 날이 더워 그런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장소였다. 에녹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폭포가 나옵니다.”
"정말? 나 폭포 한 번도 못 봤어. 잠깐 들르면 안 돼?"
에녹은 망설였다. 겉보기엔 평범한 산책로 같지만, 만만히 보고 오르기엔 힘든 길이었다. 뭐든 아는 것 같아도 외지인이다 보니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았다. 괘씸한 약혼자를 골탕 먹일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몸이 약한 것을 알기에 선뜻 가 보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길이 험할 텐데요. 복장도 불편하고.”
“아니야. 오늘 많이 돌아다닐 것 같아서 편하게 입었어.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면 여기서 잠시 멈춰서…….’
그는 아란이 다음에 할 행동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또 공책에 그리시려고요?”
그리고 그 아래 적힐 설명도.
“그다음엔 뭐, 에녹이 길이 험하다고 올라가지 말라고 함, 이런 식으로 적으시려고요?”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어떻게 알았어?"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녀가 불현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혹시 그게 기분 나빴던 거야? 그럼 그 부분은 뺄게."무구하게 묻는 목소리에 에녹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 ‘에녹이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해서 조개껍데기는 확인 못 했음, 에녹이 창문 닫으라 해서 더 못 봄.'
무시하려 했지만 그 두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마부에게 마차를 돌릴 것을 명령했다.
“대신 힘들어도 무조건 끝까지 가셔야 합니다.”
홧김에 한 제안이었는데 아란의 얼굴이 환해졌다.
“응. 꼭 그럴게.”
될 대로 되라지. 그는 체념했다.
“고마워, 정말.”
“공책은 두고 가세요. 혹 빠뜨려 젖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응.”
그녀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그를 뒤따랐다.
길은 폭이 아주 좁아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사실 에녹은 거기서부터 아란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를 바라기도 했다. 얄밉긴 했지만 그녀가 지쳐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아란은 시중을 들어줄 시녀를 다 물렸다. 인적이 없는 좁은 샛길을 에녹과 둘이서만 오붓하게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금방 돌아갈 거라 생각한 에녹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아란은 열심히 걸었다. 에녹의 말대로, 길은 금방 험해졌다. 금세 숨이 거칠어지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러나 끝까지 가기로 했으니 묵묵히 걸었다. 도중에 포기하면 그가 나약하다고 비웃을 것 같았다.
저놈의 고집.
에녹이 힐끗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벌써 지친 티가 역력했다.
더 힘들면 돌아가자고 말하겠지. 그는 못 본 척 묵묵히 발을 옮겼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란의 걸음이 현저히 느려지는 바람에 그도 평소와 같이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힘들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에녹이 그녀를 말릴 정도였다.
“한참 남았는데 그냥 돌아갈까요?"
"싫어.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면 너무 아깝잖아. 혹시 힘들어서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에녹은 기가 차 콧방귀 뀌었다. 물어본 자신이 바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폭포가 가까워졌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나 봐!”
아란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지쳐서 그런지 목소리가 노파보다도 힘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온 고생이 헛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이윽고 눈앞에 나타난 폭포는 아름다웠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폭포 옆으로 작게 갈라져 나온 물줄기를 찾아냈다.
“목마르다.”
에녹은 조금 난처해졌다. 마땅한 물잔이 없었다. 아무 계획 없이 오느라 둘 다 빈손이었다.
남자라면, 하다못해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물줄기에 입을 대고 마실 수 있었지만 아란은 황녀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떨어지는 물로 손을 깨끗하게 씻고는 두 손을 모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커다란 손에 물이 고였다.
“드세요.”
“응?”
아란도 머뭇거렸다. 그러나 거절하기엔 너무 목이 말랐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물은 차고 맑았다. 그 아래 살갗은 뜨거웠다. 기묘한 온도차를 느끼며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탕물을 마신 것처럼 달았다. 갈증이 더 심해졌다. 그녀는 체면도 잊고 정신없이 물을 마셨다.
"다 마셨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목을 축인 아란이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에녹을 보고 흠칫했다. 그는 묘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녹?”
대답이 없었다. 또 화가 난 건가? 뒤늦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도 갈증이 난 건 마찬가지일 텐데, 배려도 없이 혼자 오래 마신 것 같았다.
“미안. 너도 얼른 마셔.”
“…………아닙니다. 힘드셨나 봅니다.”
"하나도."
아란은 거짓말을 했다. 에녹은 더 묻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여 물줄기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아란은 그 옆에서 그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모습을 힐끔거렸다.
물을 다 마신 에녹이 얼굴을 닦으려다 아란을 돌아보았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같았다. “이리 오세요.”
“나 다 마셨는데?”
그러면서도 아란은 그가 시키는 대로 다가갔다. 그가 젖은 손으로 땀이 흥건한 그녀의 이마를 훔쳤다. 아란은 너무놀라서 입을 벌렸다.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손이 턱을 지나 목덜미까지 내려갔다. 거친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억센 손에 목을 내주고도 아란은 두려운 줄 몰랐다. 그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않을까, 그런 걱정만 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목과 어깨를 타고 하강하던 손이 빗장뼈 위에서 갑작스레 멈췄다. 아란은 그것이 곧 떨어져 나갈것을 예감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붙잡아 다시제 뺨에 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시원해."
에녹은 에녹대로 당황스러웠다. 조금 전 손바닥에 입술이 닿았을 때부터 어지러웠던 머리가 지금은 그야말로 아찔했다. 손바닥과 그 위에 기댄 뺨의 체온이 같아질 때까지 그는 고민했다. 여기서 그녀를 밀어낼지, 아니면 계속 이대로 있을지.
고민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아란이 먼저 얼굴을 떼고물러섰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아닙니다.”
에녹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충 제 얼굴을 닦아냈다.“이제 돌아갈까요.”
“응.”
올 때처럼 내려갈 때도 앞장서 걸으려던 에녹이 문득 몸을 숙이고 등을 내주었다.
“업히세요."
“그래도 돼? 너도 힘들잖아."
*
"기사 서임을 받기 전엔 무게가 전하의 두 배는 나가는 돌 주머니를 차고 다녔습니다. 여기서 미적거리다 시간을 끄는 게 더 귀찮습니다."
에녹이 딱 잘라 말했다. 하기야, 그는 힘이 아주 셌다. 그가 두 손가락만으로 호두를 깨는 장면을 아란은 종종 보았다. 안 그래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내려갈 일이 걱정이었던 차라 냉큼 업혔다.
“오늘 왜 이렇게 잘해줘?”
너 아닌 것 같아.
다시 등에서 내리라고 할까 봐 아란은 뒷말을 삼켰다. “약혼자니까 당연하지요. 아무튼, 이제 공책에 제 욕은 그만 쓰십시오.”
“욕을 쓴 적은 없는데 ・・・・・・ 그래도 네가 싫다면 이젠 안쓸게. 먼저 썼던 부분도 지울까?”
“………됐습니다.”
“저기, 삐친 건 아니지?"
“아닙니다.”
물어보기 무섭게 대답이 돌아왔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은근히 아이 같은 면도 있네.
따지고 보면 에녹도 이제 갓 스물이 된 어린 청년이었지만, 그보다 더 어린 아란에겐 늘 어른처럼만 느껴졌었다.
아주 조금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에녹은 싫어하겠지만.
아란은 소리 죽여 웃으며 넓은 등에 얼굴을 기댔다. 그는 모르고, 그녀는 아는 비밀이 하나 생겼다.
너무 들뜬 탓일까, 그날 저녁부터 열이 오르더니 결국 아란은 앓아눕고 말았다. 그것에 책임감을 느낀 에녹은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가 상태를 살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응, 괜찮아. 금방 나을 것 같아. 그리고,”
아란이 앓는 바람에 에녹은 대공에게 무척 혼이 났다. 그녀는 그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커다란 눈을 굴려 그의 눈치를 살피곤 작게 사과했다.
“화 많이 났지...………? 다음부턴 안 조를게."
그녀의 생각대로 에녹은 내내 화가 난 상태였다.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에게 순순히 대답하는 황녀를 보니 화가 더 치솟았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행동은 더없이 누그러졌다.
“전하의 탓이 아닙니다.”
어찌 된 일인지, 이전처럼 그녀에게 냉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무척 낯선 경험이었다. 원래도 변덕스럽고 예민한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마음이 변한 적은 없었다.
"왜 그렇게 봐?"
아란이 물었다. 에녹은 까칠하게 부르튼 입술이 안쓰러워서 그렇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식은땀 맺힌 얼굴을 닦아주고 싶기까지 했다. 이렇게 온화하고 다정한 충동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참지 않고 동그란 이마를 조심스럽게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낯부끄러운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싫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는지 아란이 흐리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손바닥 안쪽이 저렸다. 아직도 그곳에 그녀의 입술이닿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괜히 헛기침하다 입을 열었다.
"황궁으로 돌아가실 땐 조개껍데기를 보러 갈까요? 양떼도 더 자세히 구경하고・・・・・….”
“좋아. 꼭 그러자."
듣기만 해도 좋은지, 약 기운에 꾸벅꾸벅 졸면서도 아란은 연신 헤실거렸다. 웃기고도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녹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깜짝놀라 얼른 낯을 굳혔다.
에녹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동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다정함이었다. 그러나 동정만으로는 자꾸만 가슴이 뛰고 입 안이 마르는 이유를 설명할수 없었다.
지루한 줄도 모르고 잠이 든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에녹은 곧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대공을보았다. 구름처럼 부풀었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황녀께서는?”
“잠드셨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와야겠구나.”
“예.”
에녹은 무심히 대공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가 에녹을 붙잡았다.
“에녹, 할 이야기가 있다.”
부드러운 어조와 달리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에녹은 부친이 나누자는 이야기가 사소한 대화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소소한 담소 따위를 나누는사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리 멀지 않은 빈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만간 네게 작위를 물려주고, 나는 네 어머니와 함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다."
대공이 말했다. 진작 예상한 일이었지만 에녹은 자식 된 도리로 그의 제안을 사양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넌 아직 부족해.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난다고 그 부족함이 채워지겠느냐?"
대공이 한 말의 의미를 가늠하지 못한 에녹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널 탓하려는 건 아니다. 홀로 완벽한 사람은 애초에 없으니. 언젠가 네 부족함을 메워줄 배우자가 나타나겠지."
에녹이 낯을 굳혔다. 그는 대번에 대공이 말하는 배우자가 아란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이 이번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황녀를 어떻게 생각하지?”
“아름답고 배려 깊은 분이십니다.”
“하지만 네게 필요한 건 배려와 아름다움이 아니다.”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결정을 내려라. 그런 식으로 괴롭힐 만큼 탐탁지 않다면 이대로 혼인해봤자 황녀께도 좋은 일이 아니지 않으냐."
“괴롭히다니요?”
“네가 아무 생각 없이 황녀를 데리고 무리하게 쏘다니진 않았겠지. 설마 그 정도로 분별이 없단 말이냐?"
"""그건 ・・・・・・.
"황제 폐하께서 황녀를 여기까지 보낸 의도는 너도 알겠지. 그럼에도 황녀와 시간을 보내도록 한 건, 네가 그 아이를 잘 타일러 마음을 돌리게 하라는 뜻이었다.”
에녹은 한순간 울컥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왜 이제 와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네게 해준 것도 없는데 원치 않는 혼인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다. 너라면 더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을 거다.”
늘 엄격하기만 했던 대공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에 에녹은 몹시 놀랐다. 당연히 수락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파혼에 대해선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그래. 네 일이니 신중히 생각해 보아라.”
말을 마친 대공은 에녹을 남겨둔 채 먼저 자리를 떠났다. 에녹은 조금 더 그곳에 머물렀다가, 이윽고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도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복잡한 눈빛으로 복도를 장식한 조각상만 바라보던 그가 돌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뒤편으로 조금 삐져나온 치맛자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쳤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냐."
빠르게 다가가자 조각상 뒤에 웅크리고 앉은 아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전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난…………. 눈을 뜨니까 네가 없길래 그냥……………”
아란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뒤를 쫓았다. 다섯 걸음도 채 가지 못해 아란을 따라잡은 그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황족의 앞을 가로막는 건 대단한 무례였지만 두 사람 다 인지하지 못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 네 아버지가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부터.”
처음부터 다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뭐라 변명이라도 할 것처럼 에녹이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몇 번 벙긋거리던 입술은 이내 다시 다물어졌다.
"설명하겠습니다.”
“설명은 필요 없어. 그냥 한마디만 해줘. 내가 들은 게 사실인지 아닌지."
".....… 사실입니다."
그제야 아란은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랑한다면서 정작 그의 마음도 읽지 못했다. 아니, 실은 알고 있었다. 약혼한 지 벌써 6년째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할 날은 앞으로도 영영 오지 않는다.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는 이미 몇 번이나 그녀를 거절했다. 어릴 적, 어떤 여자가 좋은지 물었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그를 갖고 싶은 욕심에 그간 덮어두었을 뿐.
참을 새도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얼굴이 못나게 일그러지는 걸 알았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발가벗은 채로 거리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자신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약혼을 6년이나 지속한 그 앞에서 소설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구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릴게."
에녹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걱정하지 마. 내 마음이 바뀐 거라고 말씀드리면 부모님께서도 널 탓하지 않을 거야. 대공령에 실제로 가 보니 못 살겠다고, 그래서 덩달아 너도 싫어졌다고 말할게."
아란이 애써 웃으며 덧붙였지만,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도통 분간이 안 됐다. 에녹은 달래줄 생각도 못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그 새 속눈썹과 뺨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낯설었다. 에녹은 그녀가 단 한 번도 자신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란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닦자마자 다시 눈물이 흘러 부질없는 짓이 되긴 했지만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흐린 시야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무뚝뚝한 얼굴이 보였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 순간에도 변함없는데, 더는 이전처럼 지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엿듣지 말걸 그냥 계속 모르는 척하면서 지낼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란은 울음을 삼키며 한 걸음물러났다. 의연하게 웃고 싶은데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주저앉아 통곡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전하.”
“괜찮아. 변명하지 않아도 돼.”
실은 더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아란은 그대로 그를 내버려둔 채 도망쳤다. 그러고 보니 먼저 등을 돌린 것도 처음이었다. 정말 끝이라는 게 실감 나서, 그녀는 엉엉 울었다.
다음 날, 아란은 퉁퉁 부은 얼굴로 조찬에 나타났다. 간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평소의 반만큼도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언뜻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처럼 보였다. 동그란 머랭 사이에 크림을 넣은 그 과자 말이다.
대공과 대공비조차 아란을 보고 한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였다. 아란이 민망한 듯이 웃었다.
“혹 근심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대공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실은 어제 울었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전원래 잘 울거든요.”
아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요? 누가 서운하게 굴기라도 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부모님과 떨어져 있었더니 부모님이 보고 싶어졌어요. 어젯밤에 편지를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볼일도 끝났으니 며칠 내로 돌아가려고 해요.”
“그래도 먼 길을 오셨는데 이리 일찍 떠나시다니요. 이러다 제가 대접을 소홀히 했다고 황제 폐하께서 오해하실지도 모릅니다."
대공이 농담을 건네며 아란에게 더 머물 것을 권했다.아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더 오래 머물렀다간 황궁보다대공성이 더 좋아진 거냐며 부황께서 서운해하실 거예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대공은 더 말리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그는 그저 철부지 공주님이 변덕을 부린 거라 여겼다. 아니면 에녹이 그녀를 설득하는 일에 성공했거나.
에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의 부모를 향해 방긋방긋 웃는 아란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에 어색한화장까지 더해져 시중을 들던 이들까지 힘껏 입술을 깨물게 할 만큼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녹은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되레 화가 치밀었다. 이 자리에 있는모든 사람이 그녀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지?
에녹은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상을 뒤엎고 자리를 뛰쳐나가도 모자랐다. 모든 것이 답답해 미칠 것같았다. 능구렁이처럼 속내를 숨긴 제 부모도, 다 알면서웃고만 있는 아란도, 그리고 방관만 하는 자신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는 식기를 내던지다시피 하곤 거칠게 그곳을 떠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엉망이었다.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아란은 짐을 꾸려 대공성을 떠났다. 부은 얼굴은 여전했지만 전날보다는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는 돌아갈 때도 에녹이 그녀를 호위하기로 했으나 그녀가 한사코 거절했다.
“금방 떠나게 되셔서 아쉽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 땐가족이 되어 있겠지요."
로아크 대공이 말했다. 사정을 다 아는 아란에겐 기만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말이었다. 에녹은 이번만큼은 아란도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녀가 시원하게 그와 대공의 얼굴을 후려친다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로아크 대공의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네. 제가 얼마나 그날을 간절히 꿈꾸는지 모르실 거예요.”
모든 것이 서툰 황녀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한 거짓말이었다. 로아크 대공조차 속아 넘어갔다.
“모두 안녕히 계세요.”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아란이 마차에 올랐다.에녹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가 마차에 타는 것을 도왔다.6년간 몸에 익은 버릇이었다.
“고마워."
아란이 빙그레 웃었다. 오늘도 빨갛게 칠한 입술과 뺨이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잘 지내, 에녹."
지극히 평범한 작별 인사였다. 에녹은 그녀를 바라보다인사할 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