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39화 (139/146)

4화

기사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그는 어쩐지 불쾌한 기분으로 아란에게 향했다. 그녀는 시녀들이 깔아준 비단 천 위에 엎드려 공책에 열심히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황궁을 떠난 이후 종종 보았던 모습이었다.

꽤 집중했는지 그녀는 에녹이 온 줄도 몰랐다. 가냘픈 어깨와 등 위로 기사들이 극찬하던 백금발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불현듯 만지면 어떤 감촉일지 궁금해졌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본 아란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언제 왔어? 점심 먹었어?”

연달아 질문한 그녀가 자연스레 공책을 덮었다. 그 바람에 에녹은 안에 뭐가 적혔는지 보지 못했다. 몰래 볼 생각은 없었지만 묘하게 찜찜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늘 같은 공책이던데,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조금 전에 식사를 마쳤습니다. 전하께서는 드셨습니까?"

“응. 언제 출발할 수 있을까?"

“글쎄요.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나 저 탑에 가봐도 돼?”

아란이 무너진 탑을 가리켰다. 오랜 세월 마모되어 바닥만 남아 있는 탑은 척 보기에도 위험한 데다 을씨년스러워 가까이서 구경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위험합니다. 지금도 잔해가 떨어져서 길을 치우는 것도 힘들고요."

“알겠어.”

아란은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다 무너진 탑이 뭐가 그리 궁금하십니까."

“응, 아주 아주 오래전에, 제국이 생기기도 전에 이 마을은 해안이었대. 저 탑도 원래는 등대였고. 저 등대는 바다신의 사랑을 받아서 바다가 물이 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거래.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무너진 걸 보니까 조만간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서.”

그는 새삼 탑을 돌아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등대'처럼 생긴 것도 같았다. 수도를 오가며 매번 보던 건축물임에도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책에서 봤어. 그거 알아? 이 마을엔 아직 바다의 흔적이 남아서 땅을 깊이 파면 조개껍데기가 나온대. 신기하지?"

“그런가요.”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 에녹은 신의 사랑을 받았다던 등대나 몇천 년 전 살았던 조개의 흔적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 근처의 땅이 갈라진 곳에 가면 볼 수 있다는데, 출발하기 전에 시녀들하고 잠깐 다녀와도 돼?”

“저 없이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 마십시오."

"어, 그러면 혹시 같이………….”

“전 시간이 없습니다. 출발하게 되면 말씀드릴 테니 쉬고 계세요."

말을 마친 에녹은 금방 자리를 떴다. 시무룩한 황녀의 모습이 눈에 걸렸지만 바쁘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황녀를 무탈하게 호위하는 것이지, 사소한 것으로 토라진 마음을 달래주는 게 아니었다.

자꾸만 체통 없이 구니까 주제 모르고 떠드는 놈이 생기지.

그러니까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

며칠 후, 에녹은 무사히 대공령에 도착했다. 대공과 대공비가 몸소 황녀를 맞이하러 성 밖까지 마중 나왔다. 거기에 그 유명한 황녀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사람이 엄청 많아.”

아란이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환영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조금 얼떨떨했다.

"황녀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대공령의 모든 사람이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이건 비밀인데,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을 때도 이렇게 환영인파가 많지는 않았답니다.”

대공비가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의 의도를 아는 대공과 대공비는 아란의 방문이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능숙하게 속내를 감췄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아란은 그저 고맙기만 했다.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성도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는 긴장한 와중에도 구김 없이 웃었다. 에녹을 낳아준 사람들인 만큼 잘 보이고 싶었다.

“그리 봐주시니 영광입니다.”

로아크 대공이 말했다. 사실 아란을 가장 놀라게 한 건 그의 외모였다. 그는 그냥 나이 든 에녹이었다. 아란도 황제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로아크 부자처럼 빼닮지는 않았다. 다만 세월 탓인지 대공 쪽이 훨씬 온유한 인상이었는데, 대공비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열렬하여 갓 사랑에 빠진 청년 같았다. 그리고 대공비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에녹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대공 부부를 부러운 눈으로 응시하던 아란이 곁에 선 에녹을 일별했다. 그는 노인처럼 심드렁한 낯으로 앞만 보고걸었다. 아란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부모에게도 도통관심이 없어 보였다.

부모님이 반갑지 않나?

그녀가 부황이나 모후에게 이리 데면데면하게 굴었다간두고두고 서운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대공부부는 에녹의 무심한 태도를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세상에 오직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부부와 남처럼 서먹한 아들. 그 모습에서 아란은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가장 이상한 건 세 명 모두 이 상황이 무척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다.

망설이던 아란이 슬쩍 에녹의 팔에 손을 얹었다. 당사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외톨이 같은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제야 에녹이 아란을 돌아보았다. 뿌리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멈칫거리면서도 팔을 내려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안심한 아란이 수줍게 웃었다.

에녹은 힐끗 주변을 살폈다. 황녀에게 쌀쌀맞게 굴기엔보는 눈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맺어진 사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약혼녀와 가까운 모습을 보여 나쁠 건 없었다.긴장했는지 조그만 손은 조금 축축했다. 그렇지만 예상외로 참을 만했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도 아란은 사람들을 향해반대쪽 손을 힘껏 흔들었다. 친근하고 허물없는 태도에 사람들도 환호로 화답했다.

“이곳 사람들 정말 다정하다.”

아란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드러운 숨결이 귓불에 닿자 소름이 돋았지만, 그것 역시 기분 나쁜 정도는 아니었다. 에녹은 형식적이나마 아란에게 웃어주었다. 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여자의 체온과 숨결이 견딜만하다는 건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막 대공령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란은 열의가 넘쳤다. 대공과 대공비,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에녹과 함께 대공령을 잘 다스릴 의지가 있다는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이틀을 넘기기도 전에 무너졌다. 대공은 중요한 말이 나올 때마다 은근히 아란을 배제했고, 아란 역시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아버지인 황제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도 아란에겐 자리를 빛내는 역할 외엔 주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되니 맥이 탁 풀렸다.

익숙한 상황이지만 의욕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더는 설레지 않았다. 대공령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부 상냥하고 예의가 발랐지만 아란이 들러리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이제 대공성에서 아란의 낙이란 오로지 에녹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그는 너무 바빠 얼굴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들뜬 내가 바보였어.

시녀들과 노는 것도 흥이 나지 않아 아란은 정원 한구석에서 혼자 낙서를 했다. 정원을 뛰어다니는 얼룩무늬 강아지를 그리는 중인데 생각만큼 잘 안 되었다. 하기야, 애당초 자신이 잘하는 게 있긴 한지 의문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그리고 계신 건 암소입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는데 불쑥 다가온 대공이 말을 걸었다. 아란은 황급히 낙서를 몸으로 가리며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예. 암소예요. 언젠가 암소를 키워보고 싶었거든요…………. 어?"

강아지라고 솔직하게 말하기 부끄러웠던 그녀가 아무말이나 주워섬겼다. 그러다 대공 뒤에 있는 에녹을 보고는 허둥거렸다. 대공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제 아들과는 다른 소녀였다.

“암소라, 동물 취향이 독특하시군요. 그렇지만 정원에서 암소만 그리기엔 날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에녹, 황녀를 모시고 교외라도 돌아보는 건 어떠냐?”

“알겠습니다.”

에녹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할 일이 산더미라 놀아줄 시간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다며 대공은 자리를 떴고, 아란은 에녹과 단둘이 남았다.

“어디로 갈까요. 생각해둔 곳이 있습니까?"

“아니야. 바쁠 텐데, 난 여기 있어도 돼.”

“두 번 안 묻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란이 명소를 두어 개 말했다. 전부 대공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인파로 붐비는 곳이었다.

에녹에겐 그리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이왕 사이좋은 예비부부를 가장하기로 했으니,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더 연극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대공의 아들인 에녹을 모르는 귀족은 대공령에 없었고, 백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란은 누가 봐도 황족이었다.

에녹은 따끔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한 채 열의 없이 아란을 안내했다.

예상외로, 그가 뭔가를 설명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란은 이미 그곳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 얽힌 설화까지 알고 있었다. 이따금 그때 그 공책을 꺼내 뭔가를 끄적이기도 했다. 아란이 알아서 구경하는 동안 에녹이 한 일이라고는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다.

“고마워.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귀찮았을 텐데.”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아란이 말했다. 에녹은 그 말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씁쓸하게 웃은 그녀가 덧붙였다. “난 정말 여기가 마음에 들어.”

“다행입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너와 결혼하고 싶어. 좋은…………대공비가 되고 싶어.”

마지막엔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아란은 에녹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연인은 애당초 글렀고, 몸이 약해 자식을 안겨준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남은 역할은 그것뿐이었다.

에녹은 몰랐지만, 그녀는 대공령에 관한 일에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자신이 살게 될 지방이니 당연했다. 틈만 나면 관련 서적을 접해서 주 수입원은 무엇인지, 기후나 생활 방식은 어떤지 등등을 전부 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글자로만 읽고 상상하던 곳을 에녹과 함께 거닐며 직접 눈으로 보게 되자 그 소망은 더욱 커졌다. ""

"많이 노력할게. 힘들겠지만 건강해져서 아이도 낳게 되면…………, 아주 많이 사랑해주자.”

에녹은 기가 막힌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를 어떻게 만드는 줄은 알고 하는 말인가.

어쩌면 황제가 시켰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란은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잘 못 하기도 하거니와, 눈치가 없을지언정 말과 행동에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노력이 의미가 있을지엔 회의적이었다. 미련한 자의 노력이란 본인의 미련함만 더 부각하는 법이니까.

"귀찮겠지만 네가 도와준다면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평소처럼 비아냥거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함께 대공령으로 오는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그는 자신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시골 마을의 낡은 등대를 설명하던 그녀를 기억했다. 아무리 냉소적인 성격이라도 그는 차기 영주였다. 그녀가 제 땅에 가진 애정마저 비웃고 싶지는 않았다.

“……예.”

“고마워."

한 번 웃어 보인 아란이 커튼도 걷지 않은 마차 창문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퍽 낯설었다. 함께 있을 때면 그녀의 두 눈은 언제나 그를 향했기에 이렇게 가까이서 옆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황금빛 속눈썹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만큼 길었고, 그 아래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대가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며 자리했다. 갸름한 턱과 희고 긴 목은 은근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에녹은 일전에 엿들었던 기사들의 잡담을 떠올렸다. 예쁜 얼굴이라는 건 에녹도 인정했다. 새빨갛게 칠한 뺨과 입술만 빼면 말이다. 처음 황궁에서 그 모습을 보았을 땐 피라도 토한 줄 알고 놀랐지만, 단순히 화장이란 걸 알게 되자 그저 황당했다.

이쯤 되면 시녀들도 문제였다. 아무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으니 웃긴 줄도 모르고 계속 저런 화장을 고집하는 것이다. 에녹은 자신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하."

"응? 악!"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마차가 크게 흔들렸고, 에녹과 달리 가벼운 아란의 몸이 공중으로 튕겨 올랐다. 다행히 에녹이 민첩하게 붙잡아 다치는 일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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