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럴 리가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잠시 말을 잊은 것뿐이랍니다. 분명 로아크 공자께서도 전하를 보시면 눈을 떼지 못하실 거예요.”
“그러면 좋겠지만・・・・・・ 에녹은 내가 어떻게 꾸며도 관심없을걸. 드레스가 아니라 거적을 걸쳐도 모를 거야.”
아란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우울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떠올리면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워낙 무뚝뚝하신 분이니 내색하지 않으시는 것뿐이에요.”
“그럼요. 대공 전하만 보아도 그렇잖아요. 만사에 무심하신 것 같아도 대공비 전하께 작은 문제만 생기면 전혀다른 사람이 되시는걸요. 분명 공자께서도 대공 전하를 닮으셨을 거예요.”
시녀들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무딘 아란의 눈에도 그들의 노력이 훤히 보일 정도라, 아란은 애써우울함을 떨치고 짐짓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번에 에녹이 날 잘 봐준다면 다 너희 덕분이야.”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든 그녀가 거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강렬한 화장 덕분인지 평소보다 성숙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단장을 새로 하는 사이, 에녹이 황궁에 거의 도착했다.아란은 서둘러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천천히 걸으라는 시녀의 충고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허약한 체력 때문에 도중에 몇 번이나 멈춰서 숨을 골라야 했지만, 다행히때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횃불에 장신의 남자가 말에서 내리는 모습이 비쳤다. 밤인 데다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써 윤곽만 겨우 가늠할 정도였지만 아란은 한눈에 그가 에녹임을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체격이 더 커진 것 같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아직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조용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서로 입을 꾹 다물고 필담을 나누자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그러나 몇 년간의 버릇 때문인지 그에게 말을 거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어떤 인사말을 건넬지 고민하는 사이 에녹이 그녀를 발견했다.
“오랜만입니다. 황녀 전하.”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기계적인 몸짓으로 아란의 손등 위에 입 맞췄다. 단순한 인사일 뿐인데도 아란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어찌 나오………….”
고개를 들던 에녹이 말을 멈추고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그러곤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이내 뜻 모를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에녹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아란은 어쩔 줄 몰랐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에녹이 지금처럼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그의 시선은 분명 그녀의 입술과 뺨에 닿아있었다. 시녀가 말한 대로, 그는 아란의 얼굴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왜 그렇게 봐…………?"
아란이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그녀도 에녹의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짧은 순간 수천 개의 낭만적인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중 하나라도 이루어진다면 아란은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녹은 이내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하곤 자세를 바로 했다. 따갑게 느껴지던 시선도 거둬졌다.
“주무시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응, 늦게라도 오지 않을까 해서 안 자고 기다렸어."
아란이 배시시 웃었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애초에 좋은 결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므로 실망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사정이 생겨 늦었습니다."
“괜찮아. 무사히 왔으면 됐지. 큰일은 아니었어?”
"예."
대화가 끊겼다. 아란은 잠시 고민했다. 먼 길을 오느라피곤할 에녹을 이만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몇초라도 더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그럼 딱 한 마디만 더………….
아란이 조심스레, 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애쓰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했어? 안 했으면 나랑 같이 먹을래?”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습니다. 시간도 늦기도 했고요."
에녹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시녀가 무안해질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였다. 시녀는 아란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이 정도면 그가 자신을 꺼린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황녀는 속도 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예의상이라도 마주 웃어주는 일이 없었다. 무심한 정도를 넘어 최소한의 성의조차 없는 태도였다. 늦게 도착한 일도 그랬다. 정시 정각에 도착하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일이 생겼다면 미리 사람을 보내 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황제부터 말단 하녀까지 황궁의 모든 이가 황녀를 불면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애지중지하는 가운데 에녹 로아크만이 뻣뻣하게 굴었다. 제아무리 로아크 대공가가 대단하다 한들 황제의 권위를 넘어서지는 못했고, 에녹이 독보적으로 잘생긴 건 사실이지만 제국을 다 뒤지면 그만한 인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녀가 저렇게까지 쩔쩔맬 이유가 없었다.
사랑이 죄지.
시녀가 혀를 차는 줄도 모르고, 아란은 에녹을 힐끔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열여덟 번째 생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철부지인 그녀와 달리 그는 마냥 성숙하게만 보였다.
아란은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에녹이 같이 저녁을 먹어줄 때까지 졸랐겠지만, 이제는 성년이되었으니 어른스럽게 물러나기로 했다.
“응, 그래. 억지로 먹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난 그럴 때마다 꼭 체하거든.”
"…......”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
아란은 아쉬움을 꾹 눌러 참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에녹은 황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간 황제의 노여움을 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시녀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든 황제에게 지금 이 상황을 일러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었다.
에녹은 한순간 제 처지에 회의감을 느끼곤 표정을 굳혔다. 횃불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쌀쌀맞은 인상이 되었다. 놀란 아란이 멈칫거렸다. 우물쭈물 입술을 깨무는 꼴을 보니 꼭 못된 놈이 된 기분이었다.
“내일 점심엔 시간이 날 것 같습니다.”
“정말?"
“예. 그럼 점심때 찾아가겠습니다."
“좋아!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하라고 말해둘게.”
아란이 환히 웃었다.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웃는 건 황족답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럼 푹 자고 내일 봐!”
다행히 아란은 금방 그를 놓아주었다. 에녹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좀 더 시달릴 각오를 했던 탓이다. 그래도 성년이 지나더니 아주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모양이다.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로선 그녀의 권유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서 아쉬움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란뿐이었다.
그녀라고 해서 에녹의 이런 태도가 서운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기뻐 화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좋은 꿈 꿔."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아란이 돌아섰다. 짧은 대화만으로 만족하기엔 반년이란 시간이 너무 길었지만, 다행히 이번엔 꽤 오랫동안 그와 함께할 수 있었다. 아란은 그가 자신을 더 성가셔하기 전에 얼른 걸음을 옮겼다.
***
예비부부가 함께하는 식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고, 이따금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아란은 포크로 생선 살점을 깨작거렸다. 어제부터 쫄쫄굶다시피 했는데도 너무 긴장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아란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에녹 역시 어제저녁부터 식사를못 했다는 것을 알기에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곤 에녹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기 무섭게 말을 걸었다.
"많이 먹었어?"
“예.”
다음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아란은 필사적으로 머리를굴렸다.
“맞다, 대공과 대공비께선 뭘 좋아하셔? 선물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
“전하의 선물이라면 뭐든 좋아하실 겁니다."
이번에 에녹이 황궁에 방문한 이유는 아란을 데리고 대공령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명분은 로아크 대공의 생일을축하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실은 황녀의 혼기가 찼는데도 대공가가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자 그에 분노한 황제가본격적으로 대공을 압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 역시 외동딸을 누구와도 결혼시키지 않고 평생 끼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딸이 이런 식으로 홀대받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제아무리 약혼한 사이라도 정식 부부로 맺어지지 않은상태에서 황녀가 대공령에 머무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황제는 명목상으로나마 아란에게 사소한 임무 몇 가지를 맡겼다. 그리고 약혼자인 에녹에게 황녀의 호위 겸 안내를 요구했다.
그 명령을 처음 들었을 때, 에녹은 너무 기가 막혀 화도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더 짜증 나는 건 이 웃기지도 않은명령을 거절할 명분도 없다는 것이었다. 직계 황족이, 그것도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친히 대공령에 행차한다는데 사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에녹은 울며 겨자 먹기로 황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좋아 호위지, 가는 내내 황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시종이나 다름없었다.
에녹은 짜증을 숨기며 아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그와 함께 대공령에 간다는 사실에 마냥 들떠 있었다. 그녀는 살면서 수도 밖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린 나이는 아니시지만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나 먼 길을 가는 건 처음이시니 걱정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교묘한 조롱을 읽지 못한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걱정도 돼. 내가 맡은 일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지?”
에녹은 누구도 당신이 그걸 훌륭히 수행할 거라 기대하지 않으니 걱정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차피 그녀에겐 이 일이 소꿉장난, 그 이상은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하는 일부터 결혼까지 모든 것이 다.
황녀가 대공령까지 따라와 성가시게 굴어댈 생각을 하면 벌써 피곤했다. 날 때부터 후계자로 키워진 에녹은 황녀처럼 속 편하게만 사는 인간을 가장 경멸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앓아누우면 그 핑계를 대고 황궁에 놓아둔 채 속 편히 혼자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못된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과하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무구하기만 한 두 눈을 마주하면 안쓰럽다는 마음도 사라졌다. 저렇게 쩔쩔매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결국 모든 것은 그녀의 뜻대로 되고 마니까.
에녹은 그의 부모처럼 운명 같은 짝이 나타나길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딴 걸 원한 적도 없었다. 다만 아내로는 지나치게 똑똑한 여자보다는 유순하고 잘 휘둘리는 여자가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렇다고 황녀 같은 멍청이를 바란 건 절대 아니었지만.
차라리 그녀가 주변에 흔히 널린 멍청이 중 한 명이라면 나았으련만, 고귀한 신분 탓에 마음 놓고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게 제일 속 터졌다.
혈통으로 그의 목을 조르는 예쁜 멍청이. 에녹이 정의한 아란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잘 해내실 겁니다.”
에녹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대답을 중얼거렸다.
애석하게도, 아란이 그사이 앓아눕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황궁을 떠나는 날이 다가올수록 활기가 넘치기까지 했다. 되레 황제와 황후가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아란이 의젓하게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전보다 훨씬 튼튼해졌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연락해라. 아니, 그냥 돌아와도 좋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건강하게 올 생각만 하여라.”
딸을 사지에라도 떠나보내는 양, 황제가 우는 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 저럴 거면 처음부터 보내지나 말지. 에녹은황제 일가를 보면서 생각했다.
한참이나 실랑이가 이어지고, 뒤늦게 황후가 에녹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나마 황제보다는 조금 더 이성적인 그녀가 황제의 말을 끊어냈다.
“잔소리 때문에 먼 길 가야 하는 사람을 붙잡아서는 안되겠지요. 얼른 출발하거라. 잘 다녀오고."
그제야 에녹은 아란을 마차에 태울 수 있게 되었다.마차에 오르기 전, 아란이 민망한 얼굴로 속삭였다.
“조금 답답했지? 아버지께서 내 걱정을 많이 하셔.”
“전하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는 심정과 비슷한 거겠지요.”
시간이 늦어져 짜증이 나긴 했지만 에녹은 황제가 저리 전전긍긍하는 걸 이해 못 하지는 않았다. 병약하고 성격은 딱 그만큼 물러터진 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딸을 세상에 내보내려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에녹은 아란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걱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란은 그 말에 더없이 감동했다. 에녹의 입에서 저렇게 따스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시녀들의 말이 맞았다. 에녹에겐 분명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
구김 없이 웃는 얼굴에 오히려 에녹만 약이 올랐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란은 콧노래까지 불렀다. 그녀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날씨는 더없이 맑고, 에녹은 다정하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예감이 좋았다.
***
황녀가 멀미라도 할까, 최대한 평탄한 길로 느릿느릿 움직였음에도 일행은 어느새 대공령 가까운 곳까지 왔다. 아란은 오는 내내 바깥 풍경을 두리번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금 그들은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양 목장을 지나는 중이었다.
“와, 저기 봐.”
양 떼를 본 아란이 마차 밖으로 고개를 아주 조금 내밀었다. 양의 생김새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게다가 떼 지어 모인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구름 같아.”
양을 구경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재빨리 눈을 굴려 에녹의 위치를 살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마차를 호위 중이었다. 실은 양보다도 그의 늠름한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너무 빤히 쳐다보면 싫어할까 봐잠깐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길게 땋아 늘어뜨린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순식간에 산발이 된 아란은 몹시 당황하며 다시 마차 안으로 얼굴을 넣었다.
설마 에녹이 이 꼴을 본 건 아니겠지?
두리번거리던 그녀와 에녹의 눈이 마주쳤다. 아란의 얼굴이 절망으로 굳었다.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에녹이 마차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 내밀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그가 건조하게 경고했다.
"으응.”
“창문도 닫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날은 맑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감기에 걸리실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찬바람도 아닌데?"
“날씨 따져가며 앓는 분이 아니시니 드리는 말입니다."
에녹은 진심으로 아란이 건강하게 대공령에 도착하길 바랐다. 아플 거면 황궁에 있을 때 아팠어야지, 길을 떠난 지금 몸져눕는다면 전부 그의 책임이었다.
아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많이 건강해졌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이 창피함을 모면하고픈 마음에시키는 대로 창문을 닫았다.
그 일 이후로 며칠 동안 아란의 마차 창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그건 에녹을 흡족하게 했다.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던 중, 선두에서 달리던 기사들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에녹이 기사에게 물었다.
“강풍 때문에 부서진 탑의 잔해가 길 위로 떨어져 치우는 중이라고 합니다.”
기사가 길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낡은 탑을 가리켰다. “다른 길은?”
“가장 가까운 길도 세 시간은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기다리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그러지. 우리도 갈 길이 바쁘니 남는 인력을 보내 돕도록 해.”
“예.”
길을 치우는 동안 그들은 잠시 쉬며 간단히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에녹은 빵과 스튜로 대충 요기를 한 후, 황녀도 식사를 마쳤는지 살피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면 호위가 아니라 보모가 된 기분이었다.
그 때, 한구석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하던 에녹 휘하의 젊은 기사 무리였다. 그들은 여자의 가장 예쁜 머리카락 색깔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주장의 근거로 아란의 시녀들이 연달아 언급되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와 시녀들 사이에 은밀한 눈빛이 오가는 것을 종종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이쪽도, 그쪽도 한창때의 젊은이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난 갈색 머리가 예쁘던데. 평범하지만 질리지 않고, 황녀 전하의 시녀 중에서도 갈색 머리 아가씨가 제일 예쁘다고.”
“난 빨간 머리가 좋아. 눈에도 잘 띄잖아. 아무리 갈색 머리가 예뻐도 멀리서 보면 빨간색밖에 안 보인다니까?"
“흑발이 최고야. 장담하는데 우리 공자께서 여자였다면 분명 황녀 전하 못지않은 미인이셨을걸.”
"그건 좀....….”
에녹의 지나치게 다부진 몸과 훤칠한 키를 떠올린 기사들이 있는 대로 인상을 써가며 질색했다. 그 당사자가 한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이없다는 듯 지나쳐 가려던 그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그 뒤에 이어진 발언이었다.
“그래도 가장 예쁘기로는 황녀 전하의 백금발이 제일이지. 일단 반짝반짝하잖아.”
"그건 그렇지."
지금까지 제 취향만 주장하던 기사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이번만큼은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황녀의 머리칼이 예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신분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냥 외모가 아름다우시니 머리카락도 더 예뻐 보이는 게 아닐까?"
하기야, 그 얼굴이면 뭘 해도 예쁘겠지. 아, 그 시뻘건 화장은 좀 안 어울리긴 하지만."
“난 그것도 귀엽더라. 좀 어설픈 거.”
투박한 얼굴의 기사가 헤벌쭉 웃었다.
“병신. 그건 네가 덜떨어져서 그런 거야.”
"뭐?"
그가 발끈하자 다른 기사들이 낄낄거렸다. 그는 비웃음을 무시하고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아, 나도 황녀 전하를 닮은 애인이 있었으면 바랄 게 없겠네. 어떻게 안 될까?"
“꿈도 크다. 황녀 전하가 널 만나주시겠냐, 모지리 새끼야? 황족이 아니라 평민이셨어도 너하곤 안 만날걸? 거울 좀 봐라.”
“그래도 꿈은 꿀 수 있잖아."
에녹은 그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로 그 휘하의 기사들은 아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외모도 예쁘장하고 성격도 상냥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 거기까진 에녹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기사들이 나누는 대화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신분이 신분인 데다 주군의 약혼자인 만큼 음담패설이나 저질스러운 표현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아래 은근히 깔린 이성적 호감이 선명히 읽혔다.
기사들이 황녀의 외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약혼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떠들어 대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질투가 아니라 그의 체면과 위엄이 걸린 문제였다.
“떠드는 걸 보니 힘이 남아도나?"
에녹이 등장하자 기사들이 대경실색하며 허둥거렸다. “잘 되었구나. 그러면 성에 도착할 때까지 네놈들이 야간 보초를 서라.”
그는 한심한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본 후 짧게 명령했다.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전부 징계를 내릴 참이었다. 특히 저못생긴 놈.
"썩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