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의 밤 if 외전1화
“너는 어떤 여자가 좋아?”
아란이 물었다. 특유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쾌활한 목소리였다.
"그런가요."
다른 생각에 잠긴 채 건성으로 그녀를 상대하던 에녹은 뒤늦게 제 대답이 적절치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에 놓인서류만을 바라보던 그와 달리 아란의 시선은 아까부터 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여자가 좋냐고?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금방 나왔다. 지금 그의 앞에서 긴장한 얼굴로 두 손을 꼭 모은 소녀와 정확히 반대인 여자가 그의 이상형이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는없었다. 그녀는 그의 약혼자이기 전에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자 백 년 만에 태어난 세기의 공주님이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에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란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그와 눈을 마주할 때면 긴장해 손바닥이 축축해지곤 했다.
“조용한 여자가 좋습니다. 벙어리라고 의심받을 만큼 말없는 여자 말입니다.”
에녹이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거기에 눈치까지 빠르다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안타깝게도 지독하게 눈치가 없는 아란은 비꼬는 의도를 읽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지막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진 모르겠지만에녹을 위해서라면 뭐든 배울 수 있었다. 아란은 그가 말한 조건들을 새기듯 중얼거렸다.
“얌전하고 조용한…………”
그러다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에녹 앞에서 얼마나 수다스러웠는지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딱 그만큼 수선스러웠다는 것도. 어쩔 줄 모르던 그녀는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푹 떨궜다. 에녹은 그런 아란을 보며 심술궂게 웃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란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좋았다. 조용한 여자가 좋다고 말했던 날 이후, 그녀는 에녹에게 다가오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대신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기둥 뒤에서, 창문 틈으로, 혹은 덤불 속에서.
나름대로 숨어보려 한 것 같은데 시선이 너무나 집요하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녹은 그녀를 철저히 무시했다. 따갑게 따라붙는 눈길이 짜증 나긴 했지만 앞에서 알짱대는 것보단 훨씬 덜 성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를 만끽 중인 그에게 아란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에녹은 제 손바닥에 놓인 종이 쪼가리를 떫게 바라보았다. 종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란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에녹은 별수 없이 그 종이를 유심히 살폈다. 한참 후에 그는 확신 없이 물었다.
"새?"
아란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지금까지 그녀가 접은 게 새라는 걸 알아본 사람은 에녹이유일했다. 그녀는 신이 난 표정으로 뭐라 손짓하기 시작했다.
“펴보라는 말씀입니까?"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설마.
에녹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종이를 폈다. 또박또박 정성껏 쓴 글씨가 드러나고, 동시에 그의 얼굴이 괴상하게 구겨졌다.
[오늘 뭐 했어? 괜찮으면 같이 차 마실래?]
이쯤 되면 골탕 먹이는 쪽은 그가 아니라 황녀라고 봐도무방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복수하는 건가?
그러나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에서는 불순한 의도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녹은 기가 막힌 기분을 넘어 무력감마저 느꼈다.
졌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도무지 이길 자신이 없다.
“예. 차……… 좋습니다.”
환히 웃는 황녀의 얼굴은 진저리나도록 사랑스러웠다.그래도 말은 하지 않으니 차 마시는 동안은 조용하겠지.에녹에겐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란이 비단 주머니를 꺼내더니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슬쩍 안을 보니 쪽지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접힌 모양도 전부 달랐다.
저건 설마 강아지? 그 옆은 꽃인가?
심지어 강아지 모양 쪽지엔 눈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는 이대로 그녀와 티타임을 가졌을 경우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깨달았다. 에녹은 아란이 그 끔찍한 것들을 더 건네기 전에 얼른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그냥 말로 하세요."
“그래도 돼…………?”
아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 그러니 그 쓰레…. 아니, 쪽지들은 넣어두세요.” “응, 그럴게!”
아란은 그간 하고 싶었던 말 중 어떤 말을 먼저 할지 고르느라 잔뜩 힘이 들어간 에녹의 턱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에녹은 아란이 눈치채지 못하게 쥐고 있던 쪽지를 구겨버렸다.
***
황녀 아란흐로드가 약혼자인 에녹 로아크를 짝사랑한다는 건 제국 내에서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새끼 오리가어미를 따라다니듯, 에녹이 가는 곳엔 늘 아란이 뒤따랐다.
반면 에녹 로아크는 황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긴 했으나 때때로 귀찮은 표정이 드러났다.
그런 그들을 보고 다들 철없는 황녀의 변덕이라고, 냉담한 반응에 금방 질릴 거라고 여겼으나,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황녀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녹 로아크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포함한 대다수 사람은 황녀의 편이었다. 특히 황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동딸이 남자 때문에 쩔쩔매는 상황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어쨌든 아란이 좋아했고, 로아크 가문은 황녀의 상대로 나무랄 데 없었으므로 다들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
또한 황제처럼 아란을 아끼는 사람들만 그녀를 응원하는 건 아니었다. 에녹은 성격이 나빴고, 그에게 앙심을 품은 자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았다. 그런 자들에겐 눈치 없는황녀가 의도치 않게 에녹을 골탕 먹이는 것만큼 고소한 일도 없었다. 정작 아란은 매사 답답하게 구는 본인을 자책하지만 말이다.
"....."
에녹을 곤란하게 했던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고 아란은 혼자 창피함에 몸부림쳤다.
"전하?"
그녀가 느닷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시녀들이 놀라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달이 참 밝지?”
뒤늦게 시녀들을 의식한 아란은 괜히 창틀에 턱을 괴고동그랗게 떠오른 보름달을 구경하는 척했다.
“예. 정말 아름다워요."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맞장구를 치며 아란을 곁눈질했다.아닌 척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황녀는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종일 식사도 하는 둥 마는둥 했으면서 배가 고프다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 에녹이 많이 늦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결국 아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애타게 기다리는 이는 약혼자인 에녹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 오전 중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조금 늦어지나 봐요. 문제가 생겼다면 분명 전갈을 보내셨을 테니 별일은 아닐 거예요. 오늘은 이만 저녁을 드시고 쉬시는 게 어떠세요?"
시녀가 부드럽게 권유했다. 아란과 달리 그녀에겐 크게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수도와 대공령이 워낙 먼데다 오는 길도 복잡해 예정일보다 며칠 늦어지는 건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아란도 그 사실을 알지만 마음이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에녹을 본 지 벌써 반년도 넘었다. 아란은 이제 그리움으로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약혼한 지 6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는 해가 갈수록 에녹을 자주 만날 수가 없어졌다. 사람들과 어울리는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 때문인지, 혹은 수도에 올 때마다 성가시게 구는 약혼자 때문인지, 그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거의 대공령에만 머물렀다.
그럴 만도 하지.
아란은 시녀가 듣지 못할 만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철없던 지난날, 자신이 얼마나 성가시게 굴었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땐 하루에도 몇 번씩 에녹에게 수도에 놀러 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그것도 몇 장씩이나 되도록 길게.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어도 나름대로 에녹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필담으로 대화하자고 한 건 거절했지만, 말 많은 여자를 싫어한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아 어쩌다 만나게 되더라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아껴두었다가 편지에 전부 옮겨적은 것이다.
물론, 그건 에녹이 원하는 방식의 조용함이 아니었다.
실제로 편지를 서른 통 정도 보내면 한 번꼴로 간신히 답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지금은 바쁘므로 나중을 기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아란은 굴하지 않고 계속 편지를 썼다. 쉰 통쯤 보내면 그가 마지못해 황궁으로 왔다. 그때가 에녹의 짧은 인생 중 가장 많이 황궁을 오갔던 시절이었다.
그에겐 다행스럽게도, 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열여섯이 되었을 무렵부터 아란은 편지 보내는 횟수를 확연히 줄였다.
애정이 식은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좋아하는 마음은 더 깊어졌다. 다만 나이를 먹으며 그녀에게도조금은 눈치가 생긴 탓이었다. 그래 봤자 에녹이 바라는 정도엔 한참 못 미쳤지만.
그리고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에녹은 아란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란이 그를 사랑하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그에게 성가신 존재밖에 될 수 없다는 것도. 아란의 서글픔 따위를 모르는 에녹은 편지가 뜸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도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에 이번 입궁은 정말 오랜만에 온 연락이라, 아란은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아란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줄곧 밖을 향해 있었다.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달랬다.
“그럼 저녁 식사라도 드세요. 종일 거의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괜찮아. 지금은 배가 별로 안 고파.”
“그러다 몸져눕기라도 하시면 공자께서 오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공자께 화를 내실지도 몰라요. 어서요."
“뭐? 그럼 안 돼. 절대 아버지께 말하지 마.”
시녀의 회유에 넘어간 아란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그 때, 다른 시녀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와 외쳤다.
“황녀 전하. 방금 로아크 공자께서 막 수도에 들어섰다고 전해오셨습니다.”
"정말?"
언제 울적했었냐는 듯 아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그러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서둘러제 모습을 살폈다.
“나 괜찮아? 드레스 구겨지지 않았어? 머리는?"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시녀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란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 만큼, 시녀들 역시 아란의 치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시녀의 칭찬에도 아란의 걱정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서서 괜히 머리와 얼굴을 매만졌다.
“화장이 지워진 것 같아.”
“제가 도와드, 허어………….”
아란이 서툰 솜씨로 손수 화장을 덧바르자 시녀가 기겁했다. 그러나 이미 입술과 뺨 위엔 피처럼 새빨간 색깔의연지가 칠해진 뒤였다.
얼마 전부터 수도 귀족 여자들 사이에선 뺨과 입술을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게 유행이었다. 비록 약한 몸 때문에 연회나 사교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지만, 아란 역시여느 또래처럼 유행에 관심이 많았다.
“왜? 안 어울려?”
시녀들이 재빨리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 중 누구도선뜻 진실을 말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온유한 주인이라지만 하나뿐인 황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곧 시녀 한 명이 아첨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