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36화 (136/146)

136화. 외전2.

"아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든 생각인데, 배우자가 여럿이고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중혼도 나쁘지는않은 것 같더라. 어차피 군주가 배우자를 한 명밖에 둘 수없는 건 종교 관습 때문이었잖아. 이젠 국교도 유명무실해졌으니 신전에서도 강제할 수는 없을걸.”

“그렇게 된다 한들,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귀족들이 동의할까요?"

“당장은 힘들더라도 은근히 반기는 귀족들은 분명 있을거야. 그리고 그들이 힘을 얻는 걸 보면 아무리 콧대 높은대귀족들이라도 동요하지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브린이 황위에 오를 땐 남편을 여럿 두게 될지 모를 일이지.”

“지금부터?"

그 순간 에녹의 머릿속엔 자동으로 사일러스 공작이 떠올랐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아란이 움찔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내가 생각했어.”

그녀는 시치미를 뗐다. 그의 예상대로 그 의견을 낸 건사일러스 공작이 맞았지만, 그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아란을 그런 식으로 꾀어냈는지모를 에녹이 아니었다.

“사일러스 공이군요.”

확신어린 말에 아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넌 왜 그렇게 사일러스 공을 싫어해? 내가 너랑 결혼했는데도 말이야.”

“그자는………….”

에녹이 잠시 주저하다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자는 너무 잘생겼습니다."

그런 말을 제 입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음습한 열등감을 들키는 것보단 나았다.

사일러스 공작이라면 자신처럼 아란을 상처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안온한 애정으로 그녀를 감싸주었을 것이다. 다정하지 못한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그는 공작에게 늘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에녹도 그의 외모엔 딱히 트집을 잡지 못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 매끄러운 화술까지, 사일러스 공작은 여자들이 좋아할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그의 외모가 조금만 더 부족했어도, 하다못해 키가 조금 더 작았어도 이렇게 질투하진 않을 텐데. 아란도 사일러스공작이 잘난 걸 알 거라고 생각하니 더 싫었다.

“그렇긴 해.”

무심히 대답하던 아란이 에녹의 얼굴을 보고 난처하게웃었다.

"아니, 얼굴이 빨개졌잖아. 네가 말해놓고 화를 내면 어떡해."

“제발 마음을 편안히 먹어. 몸도 좋지 않으면서 또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아란은 에녹의 건강을 위해 브린이 사일러스 공작에게도 청혼했었다는 사실은 평생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에녹은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좋은 기억을 떠올렸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란과 브린을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고, 행복은 그들과 함께 하는 매 순간마다 쌓여갔다. 얼마 전엔 브린이 그에게 잊을수 없는 말을 전해주기도 했었다.

“그래도 나중에 오늘 일을 떠올리면 재미는 있겠다. 브린이 정말로 저 아이 중 한 명과 결혼하면 더 그렇고.”

아란의 말에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들 전부 신분이 높고, 나이도 브린과 비슷하니 가능성이 큰 이야기였다.

“다시 봐도 난 루카스 쪽이야. 브린이 가장 먼저 청혼한 아이도 루카스였잖아. 원래 첫사랑이 강렬한 법이거든.”

에녹도 그녀의 마지막 말엔 동의했다. 강렬하다 못해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았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 아란에게 물었다.

“폐하. 브린에게 저를 사랑해서 결혼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응.”

아직 그에게 표현한 적은 없지만 아란은 천천히 깨닫는 중이었다. 결국 증오는 애정과 한 몸이라는 걸.

“거짓말 아니야.”

그것만으로도 에녹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처음에,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엔 왜 절 선택하셨습니까?"

아란은 대답 없이 한동안 카펜시스만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처음엔 그럴싸한 겉모습에 홀린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제국을 다 뒤진다면 그보다 잘생긴 남자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왜였을까.

브린처럼 인내심이라곤 없는 에녹이 대답을 재촉하기 위해 다시 입을 벌렸다. 그 전에 아란이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다려봐. 적절한 대답을 생각해낼 테니. 네가 내 말뜻을 오해하고 브린처럼 엉뚱한 짓을 벌이면 안 되니까.”

그 말에 에녹은 조급함을 참고 꽤 오래 기다렸다.

한참 후에 아란은 뜬금없는 말을 내놓았다.

“친구가 없어 보였어.”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에녹을 보며 아란이 웃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너 친구 없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었는 줄 아니?”

그는 아란이 입을 막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대답을 피할 핑곗거리는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도 없었어.”

에녹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황녀였을 적, 아란의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른말을 해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어. 그건 진짜 친구가 아니잖아. 뭐, 친구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지. 심지어 부모님까지 그러셨으니까. 그런데 너는 솔직하게 말해줄 것 같았어. 내가 모르는 진짜 나를 알려줄 수 있을 거라고. 네 독설이 결핍을 감추는 방법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

아란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생각해보니 연인이 아니라 친구가 필요했나 봐. 어쨌든, 난 결국 네가 날 사랑할 거라는 것도 믿었어.” 그가 눈을 깜박였다.

“네 외로움을 이해할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했거든. 지금 생각하면 딱 그 나이다운 착각이었지. 그래서 그리 힘들지 않았어. 물론 다시 만난 후엔 많이 힘들었지만. 별거 없지?”

에녹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란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묻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브린이 우리처럼 짝을 맞이할 만큼 크는 날이 오긴 하겠지?"

그날은 아직 그녀에겐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까마득한미래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영영 미래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브린이 늘어리고 사랑스러운 딸이기를 바라다가, 또 다른 날은 눈부시게 성장한 모습이 기대되기도 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 애가 상처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아란의 말에 에녹도 고개를 끄덕였다.

브린은 적당한 사랑만 알았으면 했다. 적당한 질투, 적당한 포근함, 적당한 설렘 같은 것들. 서로를 망치고 자기 자신을 파먹는 격정 같은 건 몰랐으면 했다.

“그때가 되면 우리도 주름이 생길까?"

아란이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고 에녹의 얼굴을 자세히관찰했다. 아직 젊은 그의 얼굴에서 나이 든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때도 전 폐하 곁에 있을 겁니다."

에녹이 불쑥 말했다.

“당연한 소리를.”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란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브린이 그러는데, 용서할 땐 이렇게 안아주는 거래.”

저보다 훨씬 작은 여자 품에 안긴 채로 에녹은 숨을 죽였다.

“뭐해? 넌 날 용서 안 해줄 거야?"

“뭘 용서해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란이 답답하다는 듯 설명했다.

“조금 전에 사일러스 공작 보고 잘생겼다고 했잖아. 그리고 매번 그의 편만 들고, 또 저번엔 브린 머리를 망쳤다고 침실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는데?"

에녹이 엉거주춤 아란을 끌어안았다. 억지로 조각을 맞춰놓은 깨진 유리잔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지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애틋하게다루어야 했다.

"다 용서해줘."

내 가족의 죄를.

아란이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안고 있는 동안만큼은 서로 용서한 거야. 그러니까 먼저 놓지 마.”

에녹이 얌전히 대답했다. 아란은 해묵은 앙금이 에녹의체온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있지."

아란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쩌면 전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 같아. 언젠가부터 널 용서하는 상상을 해도 괴롭지 않게 됐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에녹과 눈을 맞췄다.

“내가 널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걸까?"

어떤 예고도 없는 급작스러운 고백이었다.

감히 바라지도 못했던 순간이 닥치자 그는 어찌할 바를몰랐다. 기쁘면서도 두렵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고 막막하기도 했다. 브린이 태어난 후엔 매일이 꿈 같았지만, 지금처럼 현실성이 없던 적은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를 아란이 재촉했다.

“뭐야. 왜 말이 없어. 아무 대답이나 해 봐. 난 이제 옛날처럼 뻔뻔하지 못하단 말이야.”

아란의 재촉에 에녹은 신중히 그녀가 좋아할 만한 대답을 골랐다. 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란이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대답하지 마.”

그리곤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대낮이고, 밖이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인데도 거침없었다. 분명 모든 것이 꿈에서만 일어날 법한 상황인데, 맞닿은 입술의 온기가 너무 생생했다.

에녹은 어느샌가 그녀를 단단히 부여잡으며 숨결을 들이켜는 자신을 깨달았다. 마치 그녀의 호흡이 제 자신을 살게 한다는 양, 절실하게.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브린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은 아직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대신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았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아란은 깨달았다. 용서와 화해에 거창한 말은 필요 없었다. 브린의 말대로 포옹 한 번, 눈 맞춤한 번이면 족했다.

얼마나 이 순간을 바랐는지 그녀는 뒤늦게 인정했다. 그와 사소한 일로 옥신각신하고 체온을 맞대는 이 평범한 일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그럼 이제 우리 딸이 사랑하는 약혼자들과 보내는 오붓한 시간을 훼방 놓으러 가볼까. 너무 늦게까지 놀면 안 되니까."

에녹의 손을 잡고 일어선 아란이 피곤함도 잊은 듯 말했다. 에녹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따라나섰다. 해가 지기전에 브린을 찾아낼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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