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외전2.
그렇다면 이제 그녀가 나설 차례다. 아란은 패잔병처럼돌아온 에녹을 위로해주었다.
“고생 많았어. 브린이 저렇게 논리적일 줄 몰랐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여섯 살도 되지 않은 딸에게 패배한 에녹은 온몸으로 민망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란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덕분에 생각보다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걸 알게되었으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야. 내가 하는 걸 잘 지켜보라고 멋지게 성공할 테니까."
그러면서 아란이 으스댔다. 에녹의 실패를 발판삼아 얻어낼 제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면 브린을 회유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그녀는 에녹이 제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그는 마음껏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고민에 몰두하는 아란이 사랑스러웠다. 그대로 끌어안고 싶었으나 어쩐지 선뜻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도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함부로 건드리면 꿈이 깨질 것 같아 손대기 겁났다.
“왜 그래?”
에녹이 한동안 입을 다물자 그제야 아란이 돌아보았다.그녀는 에녹의 어두운 낯빛을 보곤 웃으며 위로해주었다.
“실패한 것 때문에 그래? 괜찮아. 아직 기회가 남았으니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는 그냥 아란을 따라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꿈이라면 깨어나지 않으면 되었다.
며칠 후,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브린과 브린이 선택한 소년들을 전부 황궁으로 초대했다.
저번의 실패를 통해 감정적인 접근은 통하지 않고, 어설픈 논리는 꺼내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냉정하긴 해도 현실적인 문제를 일깨워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전부 모였다는 보고를 들은 아란은 황녀궁의 응접실로 향했다. 어쩌면 질투로 분위기가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예상과 달리, 소년들은 서로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은 내심 신경전을 걱정했던 아란을 자책하게 했다.
내가 아이들을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이게 다 질투의 화신 같은 에녹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한심한 기분을 억누르며 아란은 아이들의 대화를 경청하는 척했다. 그러다 기회를 틈타 슬쩍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너희를 부른 건 할 말이 있기 때문이란다."
“뭔데요?"
***
자연스럽게 브린이 대표처럼 물었다.
“너희가 모두 황녀와 혼인하는 데 동의했다는 말을 들었단다. 그게 사실이니?"
“네.”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대답했다. 루카스였다. 그래 봤자 여섯 살이나 겨우 되었을 성싶었다. 루카스는 한번 심호흡을 하더니, 미리 준비해온 듯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저희도 브린 님을 사랑해요. 브린 님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좋지만, 브린 님께서는 워낙 아름다우시고 인기가 많으시니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브린님.
아무리 본인에게 허락을 받았다지만, 아란은 황제 앞에서 황녀를 그렇게 칭하는 소년의 패기에 내심 감탄했다. 저번에 브린과 둘이 있는 모습을 엿보았을 땐 마냥 소극적인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패기는 패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브린은 짐의 뒤를 이을 후계이고, 너희들 중 대다수가 앞으로 가문을 이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중혼을 하면 어떡한단 말이니."
“중혼?”
처음 듣는 단어인지 루카스가 한순간 당황했다.
“이미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또다시 결혼하는 것을 뜻한다.”
아란이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아하, 그런 뜻이군요. 괜찮습니다. 저희는 한결같이 브
린 님을 위하고, 머리칼이 전부 셀 때까지 사랑할 겁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지 루카스는 제법 그럴싸한 말로 맞서며 굴하지 않았다.
“너희, 결혼이 뭔지는 아니?"
“그럼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집에서 사는 거예요!” “시간이 더 흐르면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 준다고 했어요!"
가장 어린 소년 두 명이 질세라 외쳤다.
“음, 그렇지………”
아란은 체통도 잊고 말끝을 흐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저희는 전하의 뜻을 받들어따라 다복한 가정을 꾸릴 겁니다.”
중혼이라는 단어를 모른다는 사실을 들킨 게 속상했던루카스는 제법 어려운 단어를 써 조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들었다.
“맞아요!"
브린이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아이들의 마음이 굳건하다는 걸 깨달은 아란은 어쩔 수 없이 최후의 패를 꺼내 들었다.
이 나이대의 아이들은 규칙 같은 걸 몹시 중요하게 여긴다는 특징이 있었다. 아란은 그걸 잘 알았다.
“안타깝지만 국법상 배우자는 한 명만 둘 수 있단다. 황제인 짐도 배우자는 오직 한 명뿐이지."
그 말에 브린과 아이들이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결혼은 한 명하고만 할 수 있는 건가요? 사랑하는 사이면 할 수 있는 게 아니고요?”
“뭐야, 말이 다르잖아, 조슈아, 거짓말한 거야?"
소년 중 한 명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니야. 우리나라에선 동시에 여러 명과 결혼할 수 있어…….”
리트리아 왕자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리트리아는 독특하게도 중혼이 허용된 몇 안 되는 나라다 보니 제국도 그럴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화내지 마, 칼릭스. 너희가 싸우면 내가 곤란해지잖아.”
브린이 중재에 나섰다.
저 애가 칼릭스구나. 꿈에서도 브린과 함께였던 바로 그소년 말이다. 그 와중에도 아란은 그런 걸 떠올렸다.
“자, 얼른 화해해.”
브린은 차분하게 조슈아와 칼릭스를 마주 보게 하더니서로 끌어안으라고 명령했다.
“화해할 때는 안아주는 거야. 서로 눈을 마주 보면서."
“하지만…….”
자존심이 센지, 칼릭스가 망설였다.
“빨리.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나랑 같이 살 수 없어."
그 말에 칼릭스와 조슈아가 어색하게 서로 끌어안았다.
“잘했어.”
반강제로 두 소년을 화해시킨 브린이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 부러지는 말투로 말했다.
“그럼 제국은 법적으로 배우자가 한 명밖에 인정되지 않는 건가요?”
"그렇단다."
“어머니께서 황제인데도요?”
“그래.”
“법을 바꾸면 안 되나요?”
“브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뜻이네요? 맞지요?"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만 찬성할 자가 있을까?”
“네! 엘케인 후작가의 후계인 제가 찬성합니다!"
루카스가 외치자 다른 소년들도 전부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브린이 눈을 빛냈다.
“얘들아, 몇 년만 기다려. 내가 정식 후계자가 되면 입법권이 생겨. 그때 법 개정을 제안하겠어. 너희가 날 지지해야 해.”
후계 수업에서 주워들은 게 분명한 말을 브린이 자랑스레 꺼내놓았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일단 어려운 단어가 연달아 나오자 소년들이 경탄의 눈빛을 보냈다.
“네. 그때까지 전하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소년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란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아이들이라고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아무리 네가 짐의 후계라도 그 문제를 독단으로 정할수는 없는 거란다. 큰 혼란이 올지도 몰라.”
“그럼 예외를 만들면 되죠. 그리고 황제는 원래 모든 법위에 있는 절대자잖아요.”
브린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재차 입을 열었다.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지 말라고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셨으면서.”
그랬다. 하지만 이럴 때 쓰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위업에 흠을 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법 의젓하게 그녀를 달래기까지 했다.
그 뒤는 정신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이들은 전부 응접실을 떠났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결론적으로 아란도 실패했다. 아란은 지난번 에녹처럼축 처진 걸음으로 돌아왔다.
"비웃어도 좋아."
황녀궁 정원에 쪼그리고 앉은 아란이 우울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단 몇 시간 만에 며칠 밤을 지새운 것처럼 피곤해졌다.
“아닙니다."
에녹이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전 브린 한 명만 상대했고, 폐하께선 그 많은 아이를…………”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에녹이 치를 떨었다.
“그 애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법을 바꾸는 게 낫겠어."
아란이 카펜시스와 그 위에 앉은 날파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브린은 놀랄 만큼 두 사람을 쏙 빼닮았지만, 모든 면이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식충식물만 해도 그랬다. 아란도, 에녹도 이 괴상한 식물에겐 도통 정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한시름 놓았어. 저건 그냥, 사랑이나 결혼이란 개념을 몰라서 생긴 소동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 애들은 자신들을 황새가 물어다 준 줄 알고 있더라.”
"하긴, 겨우 네다섯 살 난 아이들이니 잘 몰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브린이 제게 결혼과 사랑에 관해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이런 결과를 예상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을 거야. 5년만 지나면 브린도 이해해 줄걸."
“그럴까요.”
“아무튼 내가 아이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부모들이 듣게 되면 내가 이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겠지. 각 가문에서도 아이들에게 주의를 줄 거야."
“후, 뭐든 쉽지 않군요.”
“그러게 말이야. 아직 어린데도 이런데 사춘기라도 오면 그땐 또 어떡한담."
아란이 걱정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법을 바꿔버릴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