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34화 (134/146)

134화 외전 2

“왜? 애칭 부르는 거 싫어?"

"........"

브린이 너무 뻔뻔해서인지, 아니면 당황해서인지 소년은 금방 침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브린이 쐐기를 박았다.

“억울하면 너도 내 이름을 부르면 되잖아.”

"예? 어떻게 제가 황녀 전하의 이름을………….”

“원래 황족은 함부로 이름을 허락하지 않지만, 넌 잘생겼으니 특별히 허락해 줄게. 브린이라고 불러도 좋아.”

대답 없는 소년을 브린이 채근했다.

“빨리.”

“브린 님……………”

“잘했어. 있지, 나랑 결혼할래? 아버지께서 그러시는데,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사랑해서 그런 거래. 난 너와 계속 같이 놀고 싶어. 널 사랑하나 봐.”

거기까지 듣던 아란이 속삭였다.

“저 대사들, 저번에도 듣지 않았어? 루카스에게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예. 아마도."

에녹이 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볼 땐 어때? 루카스야, 아니면 조쉬야? 어느 쪽이브린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난 개인적으로 다정한 루카스가 마음에 드네.”

에녹은 둘 다 싫었다.

“둘 다 말도 해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아닙니까.”

그는 순진한 브린이 소년들 때문에 상처를 받진 않을까염려되었다. 누가 보아도 상처받을 것 같은 쪽은 브린이 아니라 소년들이었지만, 그만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아란을 보며 그는 걱정을 삼켰다. 티하나 없이 웃는 얼굴을 사소한 말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에녹은 그냥 아란을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황녀가 너무 쉽게 이름을 허락해 주는데? 이러다 모든 사내아이가 브린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면 어떡하지?"

아란이 중얼거렸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고민은 기우였다. 브린은 본인 기준에 못 미치는 사내아이에겐 칼같이 냉정했다. 그렇다고 그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철저하게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에녹의 무릎을 베고 잠든 브린을 바라보며 아란이 실없이 웃었다. 그녀가 고운 손으로 금빛 고수머리를 쓸어넘기자 무슨 꿈을 꾸는지 브린이 잠결에 히죽 웃었다.

“칼릭스………….”

잠꼬대를 들은 아란이 눈을 깜박였다.

“칼릭스? 칼릭스는 누구지? 어디서 들어보았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브린이 다시 한번 웅얼거렸다.

“나랑 결혼할래………?”

그로써 명확해졌다. 어느 가문의 아이인지는 몰랐지만 칼릭스라는 이름의 소년 역시 브린의 마음을 사로잡았거나, 그럴 예정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란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

“우리 딸의 애정이 이렇게 변덕스러운 줄은 몰랐는데.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지?"

그러면서 미심쩍은 표정으로 에녹을 쳐다봤다.

“전 아닙니다.”

에녹이 얼른 대꾸했다.

“그걸 어떻게 믿어?”

아란이 일부러 더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녀도에녹이 그런 사람이 못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 브린에겐 지독하게 집착하면서도, 반대로 타인에겐 지독히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를 닮았나?”

아란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에녹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웃어넘길 수 없게 되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닌게 아니라, 브린은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점을 빼면 아란의 성격을 빼닮았다. 아란이 조금만 더 건강했다면, 더 자유롭고 쾌활했다면.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갑자기 낯빛이 안 좋아지자 또다시 병이 도졌다고 생각한 아란이 심각하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에녹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색했다간 또다시 저의 좁은 속이 들통날까 봐 이번에도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 * *

그 후에도 브린의 청혼은 계속되었다. 몇 달이 지나자 브린이 청혼한 소년이 한 손을 넘어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아란이 정확히 알아보니 총 여섯 명이라고 했다.

그때부터는 아란도 더는 방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린아이가 한 말이니 전부 웃어넘기고는 있어도 브린은 얼마 전부터 후계 교육을 시작한 황녀고, 상대 아이들 역시 내로라하는 가문의 아들, 손자였다. 아직 브린은 약혼계획이 없지만 그 아이들까지 그러란 법은 없는 것이다.

환경상 정략혼을 많이 하는 황족과 귀족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약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으니 자칫 소년들의 혼사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들의 부모 중 누군가가 욕심을 품고 자식을 이용하려 들지도 몰랐다. 브린에겐 안 된 일이지만, 이젠 절제를 가르쳐야 할 때였다.

그렇다고 무작정 브린을 다그치고 혼낼 마음은 없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결혼을 약속했을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은 우선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먼저 나선 건 에녹이었다. 그는 브린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부녀의 만찬은 브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준비되었다. 에녹은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브린이 음식을 잔뜩 먹고 기분이 좋아졌을 때를 노렸다.

“배불러요.”

"잘 먹었어?"

“네!”

브린이 부른 배를 두드렸다.

"브린, 하나 물어도 될까?"

“네.”

“네가 약혼하기로 한 아이들이 여섯 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데.”

“그게 많은 건가요? 일주일은 7일이니까 한 명당 하루씩 시간을 보내기로 했어요.”

브린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하루가 남게 되는데?"

이 와중에도 에녹은 그런 것이 궁금했다. 숫자를 헷갈린건 아닐 것이다. 브린은 벌써 곱셈도 할 줄 알았다.

“네. 남은 하루는 부모님과 보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젠 더 청혼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에녹은 벌써 부모를 챙기는 브린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벌써 결혼하고 싶은지 궁금하구나. 넌 아직 어린데."

그의 질문에 브린이 어렵지 않게 답을 내놓았다.

“어리다고 하기엔 역사적으로 제 나이에 결혼한 황족이 아주 많은걸요. 그리고 전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면 행복해 보여서요.”

“행복해 보여?”

막을 새도 없이 에녹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와 아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제가 여기 온 이유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행복해.”

말하고 나니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힘주어 덧붙였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브린 모르게 숨어 부녀의 대화를 엿듣던 아란이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머리 위로 크게 팔을 교차했다. 대화 내용이 영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제야 에녹은 제가 딸을 만난 이유를 되새겼다. 이래서는 결혼하라고 부추기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아란이 숨은 기둥 뒤를 너무 대놓고 보지 않으려 애쓰며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넌 황족이니 따질 게 많아.”

“그 아이들은 전부 잘생겼고 지위도 높아요. 제 말도 잘 듣고요. 여기서 더 따질 게 있나요?”

이럴 수가. 에녹은 조금 충격받았다. 브린은 그 와중에도 모든 것을 계산한 것이다.

...."그렇지 ・・・・・・ . 하지만 인생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결혼은 더 신중히 생각하면 좋겠다. 배우자는 서로를 속박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거든. 행복만큼이나 자유도 중요한 거야.”

에녹은 자유 따위엔 관심도 없었지만, 일단은 딸을 설득하는 게 먼저였다.

작년이었다면 이 정도 설득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문제는 후계 교육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브린의 어휘력과 사고력이 놀랄 만큼 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브린은 어설픈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세상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요. 제국의 주인인 어머니야말로 막중한 의무에 얽매여 계신걸요. 그리고 자유와 행복은 충분히 맞바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음………….”

에녹은 결혼을 반대할만한 더 논리적인 구실을 떠올려야 했다.

뭐라고 설득하지? 실은 결혼 생활이 매일 행복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말은 절대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아란이 보고 있어서가 아니라, 부인하는 순간 지금 그가 누리는 이 행복이 정말로 가짜가 될까 봐 두려웠다.

브린은 그 행복이 가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에녹은 브린이 제 곁을 떠나는 일을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에녹은 딸의 조그만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지 말고 이대로 우리 세 가족이 오래오래 함께 지내면 안 되겠느냐? 이 아비가 부족함 없이 널 아끼고 사랑하마."

그 말만큼은 진심이 묻어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말을 들은 아란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가족에 헌신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브린이 태어나기 전만 해도 아란은 에녹이 브린을 이렇게 귀애할지 몰랐다. 원하지 않은 아이였으니 가문과 재산은 물려주어도 사랑까지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브린'이라 이름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황가 여자들의 이름이란 대체로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모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당장 아란흐로드라는 이름도 그녀의 증조모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에녹에겐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원수의 이름으로 딸을 부르면서 그가 대체 무슨 마음일지 아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히 묻지도 못했다.

아무튼 아란은 브린이 설득당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론 어떤 논리보다도 서툰 진심이 더 통하는 법이니까. 그녀의 생각대로 브린의 눈가는 촉촉했다.

“음. 결혼도 하고 어머니, 아버지와도 오래오래 살면 안되나요? 어차피 전 황녀니까 제 남편들도 황궁에서 살게 될 거잖아요?"

날카로운 지적에 에녹은 대꾸할 말을 잊었다. 아란의 촉촉한 감상 역시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아란이 숨어있는 문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란이 소리 없이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에녹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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