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외전2.
놀랍게도, 에녹이 브린과 함께 열심히 심었던 카펜시스는 식충식물이었다. 끈끈한 점액이 이슬처럼 촉수마다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날파리가 붙어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리시안셔스 같은 화초를 예상했던 에녹은 그만 황당해졌다.
브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카펜시스를 돌보았다.빨리 자라면 좋겠다면서 손수 벌레를 잡아 붙여주기까지했다. 에녹에게도 카펜시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요구하는 바람에, 덩달아 그는 바쁜 와중에도 황녀궁의 정원을자주 오가야 했다.
그가 평소처럼 황녀궁을 찾았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날과 달리 브린은 아란과 함께였다.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제법 진지한 주제인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구체적인 대화 내용이 들렸다.
“무슨 이야기길래 엄마한테도 말을 안 해?"
“안 돼요. 아버지와 약속했단 말이에요.”
브린이 힘껏 고개를 저었다. 조금 길어진 금발이 찰랑거렸다. 그간 브린의 머리는 턱까지 자랐고, 아란의 화도 그만큼 풀렸다.
거기까지 들은 에녹은 아마도 어젯밤 아란 몰래 브린이사탕 먹는 걸 허락해 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부러기척을 내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가 오는 것을 본 아란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때맞춰 아버지가 왔구나. 그럼 아버지한테 직접 물어보지, 뭐."
그러자 브린이 에녹을 향해 자랑스레 말했다.
“아버지! 전 약속을 지켰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말하지 않았어요.”
에녹은 브린을 번쩍 안아 들며 칭찬했다.
“그래. 잘했어.”
거야?"
“두 사람, 도대체 나 빼고 무슨 작당을 한
아란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그녀가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브린은 한껏 목소리를 낮춰 에녹의 귀에만 속삭였다.
“저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요. 그 애랑 결혼할래요."
사탕을 더 달라는 내용 따위를 기대했던 에녹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는 너무 놀라 그만 큰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뭐라고?”
“뭐야, 무슨 일인데?”
아란이 성급히 물었다.
"아니………….”
에녹은 너무 당황해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그 대신 브린이 아란에게 재차 선언했다. 몇 초 차이긴 하지만 에녹에게 가장 먼저 말했으니 분명 약속은 지킨 셈이다. “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어요.”
아란은 에녹처럼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꽤 당황했는지속눈썹을 빠르게 깜박였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에녹이 말했다.
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 “아버지하고는 결혼할 수 없잖아요. 아버지 같은 남자도 만나선 안 된다고 하시고."
“얼마 전까진 남자 중에 아빠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에녹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처음으로 딸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원래 자식을 키우면 이렇게 주책이 되는 걸까.
그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딸의 마음을 훔친그 소년에게 본능적으로 적대감이 생기는 동시에 그 정체가 궁금했다.
“그 아이가 누군데?”
“루카스 엘케인이요.”
“루카스 엘케인?"
그러고 보니 엘케인 후작의 손자가 브린과 비슷한 나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엘케인 후작은 아란에게 별장을 선물하라고 알려주었던 그 장본인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에녹이 말한 그 여자가 아란임을 알게 된 후작은 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며한참이나 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었다.
“언제 그 애와 친구가 되었니?"
큰 충격에 빠진 에녹과 달리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인 아란이 물었다.
“아직 친구는 아니에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그래? 그리 친하지도 않은데 어디가 마음에 들었을까?성격이 착하니?”
“다른 건 모르겠고요, 그 가문 형제 중에 그 애가 제일잘생겼어요.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요."
“흠.”
아란이 석연치 않은 태도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남자는 외모가 다가 아니라고 저번에 말했는데, 내면을봐야 해."
에녹이 브린을 타일렀다. 그러나 브린은 정말로 루카스에게 푹 빠졌는지, 조잘조잘 그 소년에 대해 늘어놓았다.에녹은 한 시간 가까이 루카스의 은발이 햇빛 아래서 얼마나 반짝이는지, 푸른 눈이 얼마나 멋진지 들어야 했다. 점점 굳어가는 에녹의 얼굴을 힐끔거리던 아란이 물었다.
“왜 그렇게 쓴 얼굴이야?"
“아닙니다.”
"설마 딸의 남자도 질투 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애는 고작 다섯 살인데?"
성격 나쁘다고 온 제국에 소문이 자자한 에녹이지만, 자신에겐 화를 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아란은 그를 놀렸다.
“브린, 어떡하지? 아버지는 루카스가 마음에 들지 않나봐. 내가 그간 지켜보니까, 네 아버지는 잘생긴 남자를 싫어하는 것 같거든.”
“정말요?"
브린이 울상이 되었다.
“아버지, 정말 루카스가 싫으세요?”
“그럴 리가. 폐하, 브린에게 괜한 말씀 하지 마십시오."“괜한 말이라니. 네가 그간 했던 짓을 생각해보라고, 특히 사일러스 공에게 말이야.”
에녹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브린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부모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튼 루카스를 만나지 말라는 말은 두 사람 다 하지 않았으니 브린은 그저 안도했다.
***
에녹은 생각보다 금방 루카스를 만나볼 수 있었다. 어느날 아란과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을 때였다. 아란은 기둥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놓은 채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폐……………”
그녀를 부르기 위해 입을 뗐을 때, 그의 기척을 느낀 아란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다른 손으로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에녹은 영문도 모르고 발소리를 죽인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길 봐.”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브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얼핏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아주 예쁘장한 소년이 있었다.
"저 소년은・・・・….”
“엘케인 후작의 손자야. 네가 싫어하는 그 루카스 엘케인.”
“그렇……. 아니, 저는 정말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에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루카스를 살폈다. 생각보다 온순해 보여 경계심이 풀어졌다.
귀를 기울이자 브린과 소년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루카스는 저보다 어린 소녀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중이었다. 반면 브린은 아주 당당했다. 브린이 루카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되게 예쁘다. 몇 번을 봐도 그래."
“화, 황송합니다. 전하.”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 브린이 까르륵 웃었다. 분명 루카스 쪽이 나이가 더 많다고 들었는데, 대화를 주도하는 건 브린이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넌 날 어떻게 생각해?"
“전하께선 아주 아름다우세요."
아름답다는 칭찬이 싫지 않은지, 브린이 히히, 웃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한 번 더 떠보았다.
“아름다운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어?”
“네. 전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너, 뭘 좀 아는구나. 그리고 저번에 브린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했잖아. 넌 특별하니까 그래도 돼.”
브린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당당히 루카스의 말을 인정하고는 덧붙였다. 거기까지 들은 아란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떨었다. 에녹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웃음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럼 나랑 결혼할래? 아버지께서 그러시는데,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사랑해서 그런 거래. 난 너와 계속 같이 놀고 싶어. 널 사랑하나 봐."
그 순간 아란과 에녹은 경악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브린이 워낙 낯가림 없고 사교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진도가 너무 빨랐다.
뒤이어 두 사람의 시선은 루카스를 향했다. 본인들이 청혼한 것도 아닌데, 대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괜히 긴장되었다. 루카스는 수락도 거절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실까요……?”
“음, 아마 반대하지는 않으실 테지만. 혹시 그렇다 해도 괜찮아. 어떤 시련이 닥쳐도 우린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브린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호한 대답이 마음을 흔들기라도 한 건지,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요."
에녹은 이쯤에서 모습을 드러내 딸이 제멋대로 진행 중인 약혼을 훼방 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가 헛기침으로 존재를 드러내려 했을 때, 아란이 덥석 그의 팔을 잡았다. 웃음을 참는 게 고역인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폐하.”
“방해하지 말자. 귀엽잖아."
별수 없이 에녹은 계속 기둥 뒤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둘은 제법 잘 어울려 놀았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조숙하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란이 중얼거렸다. 에녹은 맞장구치지 않았다. 제가 사랑이란 개념을 잘못 가르쳐주어 이런상황이 생긴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심각해? 그러다 나중에 브린이 진짜 결혼하는 날이 오면 식장에서 울 건 아니지?"
“아닙니다."
에녹은 완강히 부인했지만, 아란은 조금도 믿는 기색이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본 장면이 아주 사소한 일회성 사건으로 끝난 일일 줄로만 여겼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브린이 다른 소년에게도 청혼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번엔 타국의 왕자였다.
리트리아가 모국인 소년은 얼마 전 사절들을 따라 황궁에 왔다. 어린 나이에도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사람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브린의 눈에도왕자의 외모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소녀처럼 예뻤던루카스와 달리, 왕자는 짙은 눈썹에 오똑한 코가 인상적이었다.
“너 잘생겼다.”
브린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왕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바르게 했다. 그러고는 다른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루카스보다 무뚝뚝한 성격인 듯했다. 조금은 냉정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브린은 굴하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조슈아 리트리아입니다."
“좋아, 조쉬.”
마음대로 애칭을 부르며 브린은 왕자에게 퍽 친근하게굴었다.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은 적 없는 왕자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