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외전1
"아버지도 어머니를 사랑하세요?"
“그럼.”
에녹은 온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저도 아버지랑 결혼할래요. 저도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브린의 말에 그는 드물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될 것 같구나."
“왜요?”
요.”
“나는 이미 폐하와 혼인했으니까. 그분 외에 다른 배우자는 생각해본 적 없어.”
“쳇…..….”
브린이 실망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그러다 곧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그럼 아버지 같은 남자하고 결혼할래요."
“나 같은 남자?”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말이 칼날처럼 에녹의 심장을푹 찔렀다.
어린 딸을 둔 사내 중엔 딸에게 청혼받았다며 은근한 자랑이 섞인 우스갯소리를 떠들어대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에녹은 그 남자들처럼 마냥 즐거워할 수 없었다. 지난과오는 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되새겨지며 그를 괴롭게 했다.
"왜 그러세요?"
“훨씬 더 좋은 남자가 있을 거란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 치미는 분노와 자괴감을 억누르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좋은 남자가 아니에요?”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가 슬펐다. 브린도 그것을 눈치챘다.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브린은 나름대로 그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잘생겼는데, 아버지만큼 잘생긴 남자는 없어요.”
에녹이 허탈하게 웃었다.
"외모보다는 성품을 봐야지."
“성품?"
"잘생긴 것보다는 착한 게 먼저라는 뜻이야.”
“아하, 그럼 잘생기고 착한 남자로 찾아볼게요!”
브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 똑똑한 대답이구나. 그런 남자를 찾으면 내게도 보여주렴.”
“알겠어요. 오늘 카펜시스 심는 걸 도와주셨으니 아버지께 제일 먼저 말씀드릴게요. 어머니께도 말 안 하고요.”
"그래, 약속 꼭 지켜야 한다."
괜히 씨앗을 덮은 흙을 꾹꾹 누르던 에녹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을 입에 올렸다.
"카펜시스 말고 갖고 싶은 건 없니? 뭐든 주마."
비록 늦긴 했지만, 그도 좋은 걸 주고 싶었다. 이런 잡초 따위완 비교도 되지 않을 귀한 것으로, 브린이 고개를 저었다.
“네. 전 아버지랑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래도 생각해봐. 그렇지, 더 예쁜 리본은 어떠니?"
“정말 괜찮아요.”
무심히 대답한 브린이 다시 씨앗을 심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느슨해진 리본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나와 흘러내렸다.
에녹은 그 머리칼을 한 손으로 쥐었다. 얼마나 부지런히 심었는지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움직임 많고 활달한 브린에겐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울터였다.
“시녀에게 말해서 조금 잘라 달라고 할까?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도록.”
실은 사일러스 공작이 준 리본을 쓸모없는 선물로 만들고 싶기도 했다.
“전 좋은데 예법 선생님이 싫어하실걸요.”
브린이 망설였다.
“내가 말해 두마."
"정말요?"
좋아하는 걸 보니 긴 머리가 많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브린이 원하는 것을 찾아낸 에녹은 이거다 싶어 다시 물었다.
“말 나온 김에 내가 잘라줄까? 선물, 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요?"
“일단 자르면 예법 교사도 어쩌지 못하겠지.”
"좋아요!"
에녹은 망설임 없이 원예용 가위를 잡았다. 브린이 냉큼 등을 보이며 돌아앉았다.
“머리카락을 잘 자르세요?”
"그럼."
그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한 번도 남의 머리카락을 잘라본 적은 없지만, 날붙이 다루는 일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거슬렸던 리본을 풀어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대담하게 가위질을 했다. 허리까지 올 정도로 길었던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서 싹둑 잘렸다.
“음.”
에녹은 진지한 얼굴로 결과물을 살폈다. 길이는 퍽 괜찮았지만 조금 비뚤어진 것 같았다. 그는 길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조금 잘랐다. 그러고 나자 이번엔 반대쪽이 더 길어보였다. 그는 다시 그쪽을 잘라냈다.
그 일을 몇 번 반복하고 나자 브린의 머리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짧아져 있었다.
“다 끝났어요?”
“음………….”
아무리 뻔뻔한 에녹이라지만,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 못: 하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난처한 눈으로 껑충 짧아진 브린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가위가 아닌 단도로 잘랐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두 사람이 무엇을 하며 놀고 있는지 궁금해진 아란이 잠시 시간을 내어 황녀궁을 찾은 것이다.
정원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둘의 뒷모습을 발견한 아란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바쁜 와중에 굳이 두 사람을 찾아온 건 아침에 에녹을 밀친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그런 식으로 거절당했으니 내색은 안 해도 속이 상했을 것이다. 에녹이 브린과 잘 놀고 있다면 그걸 구실로 넌지시 사과할 생각이었다.
아란은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뭐 하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넓은 등이 눈에 띄게 동요하더니 주춤주춤 일어나 브린을 슬쩍 가리고 섰다.
“……벌써 오셨습니까, 폐하.”
엉거주춤 인사하는 에녹을 본 아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보아도 켕기는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얌전히 놀라고 했더니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사고라도 친……………”
"오셨어요?"
그리고 에녹 뒤편에서 브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란은 그대로 말을 잊었다. 브린 역시 에녹처럼 흙투성이였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브린, 네 머리카락이…………?"
몇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두 눈으로 보면서도 아란은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차례로 에녹의 손에 들린 원예용 가위와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녀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잘라주셨어요!"
브린은 마냥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아마 거울을 보지 못해제 머리에 일어난 참사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이제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니 자르는 것도 좋겠지.”
쥐가 파먹은 것처럼 삐뚤빼뚤한 머리 끝부분을 보며 아란은 간신히 긍정적인 반응을 쥐어짜냈다.
브린이 아무리 어려도 예쁘고 못난 걸 구분 못 할 나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덮어놓고 예쁜 걸 좋아했다. 브린이 거울을 보기 전에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녀는 에녹처럼 브린의 머리에 직접 손을 대는 우를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황녀의 치장을 담당하던 시녀를 불러왔다.
“부르셨…………”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미용 가위를 챙겨 정원에 도착한 시녀는 황녀의 머리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지만 아란도, 에녹도 그녀를 나무랄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브린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날씨가 더워 대공이 황녀의 머리카락을 손수 잘라주었더구나. 지금도 나쁘…………지는 않은데 원예용 가위로는 마무리가 힘들 것 같아 너를 불렀다.”
그사이 표정을 갈무리한 시녀가 재빨리 장단을 맞췄다.
“대공 전하께서 워낙 예쁘게 잘라주셔서 끝부분만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습니다."
시녀가 브린의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아란은 말없이 에녹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사과하려던 마음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에녹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묘하게 화가 나는 동시에 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브린에겐 좋은 반응이 아니었으므로 둘 다 내색하지 않았다.
아란은 시녀가 딸의 머리를 어떻게든 해결해주길 바랐지만, 애초에 너무 짧아진 탓에 시녀로서도 둥근 모양으로 다듬는 게 고작이었다.
마침내 브린이 거울 앞에서 모습을 확인했을 때, 아란은 조금 긴장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상심할 딸을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계속 생각했다.
다행히 브린이 거울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해요.”
대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칭찬을 해줬다.
“갑자기 짧아지니까 어색해서 그렇지, 아주 귀여워."
"맞습니다. 전하. 이렇게 귀여운 머리를 한 여자아이는 제국 어디에도 없을 걸요? 아마 금방 유행이 될 거예요.”
시녀들도 옆에서 거들었다.
실제로 이런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없긴 했다. 제국은 건국 이래로 꾸준히 장발이 유행해서, 남자 중에서도 머리를 길러 늘어뜨린 이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여자아이 같은 경우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평범한 귀족 아이였다면 놀림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브린은 황녀였으므로 칭찬만이 쏟아졌다.
"정말요?"
전부 귀엽다며 극찬하자 브린은 금방 우쭐해졌다. 기분이 좋았는지, 한동안 머리에 장신구를 달지 못하게 될 거라는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가볍고 시원하다며 전보다 더 좋아했다.
브린이 만족해하니 아란도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정말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브린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닌게 아니라 그새 눈에 익었는지 이쪽이 훨씬 아이답고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떠올린 생각이긴 하지만, 머리칼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기르고, 거기에 또 무거운 장신구를 달았던 게 성장 중인 아이에겐 썩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머리가 길어지면 또 자를래요.”
“다행이네. 바뀐 머리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네. 다음에도 아버지가 잘라주시면 안 돼요? 아까 잘라 주실 때 기분이 좋았어요.”
에녹이 그러마,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아란이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기습을 당한 에녹이 숨을 삼키는 사이 아란이 대신 대답했다.
"으응, 그랬구나. 그렇지만 아버지는 바쁘니까, 일단 머리가 자라면 그때 가서 여쭤보도록 하자.”
남편의 피부를 비트는 와중에도 딸에게 건네는 말은 아주 다정했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에녹은 아란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되어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베개가 날아들었다. 뛰어난 반사신경을 가진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했다.
벽에 부딪힌 베개가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녹은 그것을 피해선 안 됐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역시나 아란은 분통을 터뜨렸다. 굳이 맞추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저렇게 피하는 꼴을 보니 더 약이 올랐다.
“너는 정말…………. 어떻게 원예용 가위로 머리카락 자를 생각을 해? 그것도 황녀의 머리카락을?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머리를 자를 거면 나한텐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브린이 만족해하는 것과, 말도 없이 갑작스레 아이의 머리를 자른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거기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모양이 되었다면 더더욱 그랬다.
"죄송합니다."
“내 침실엔 발 들일 생각도 마!”
에녹은 돌아온 지 하루 만에 쫓겨났다.
그가 다시 아란의 침실에 출입을 허락받은 건 그로부터 딱 일주일 뒤였다. 그동안 그는 그날 아란을 도와 일하지 않은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브린을 울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랬어야 했다.
두 사람의 속사정은 어찌 되었든, 브린의 파격적인 머리 모양은 귀족 아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한동안 수도의 어린 귀족들 사이에선 짧은 머리가 대인기였고, 브린의 으쓱해진 어깨는 한동안 내려올 줄을 몰랐다.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즐거우니 나름대로 행복한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