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31화 (131/146)

131화. 외전1.

다행히 두 사람의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식사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요."

처음엔 제법 예절을 잘 지키던 브린이 감질났는지 투정을 부렸다.

"조금만 참아보자. 열심히 연습했잖니."

“네.”

브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손톱만 하게 썬 생선 살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에녹은 마음이 약해졌다.

“예법을 전부 익힌 걸 확인했으니 오늘은 편히 먹어도 좋아."

“아니, 겨우 익힌 건데.”

아란은 서둘러 브린을 말리려 했으나, 이미 브린은 입안에 음식을 한가득 쑤셔 넣은 뒤였다.

“에녹. 식사 끝나고 잠시 이야기 좀 할래? 양육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아란이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웃는 건 아니었다. 에녹은 아란이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너무 너그러운 제 양육 방식이 아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걸 안 에녹이 뒤늦게 브린을 향해 덧붙였다.

“그래도 너무 급히 먹으면 안 돼. 체하면 큰일이니까."물론 아란의 화를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에녹은 아란이 저의 무른 태도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브린은 고집이 세고 자아가 뚜렷한 아이였고, 마냥 끼고도는 방식은 아이를 방종하게만드는 지름길이었다.

철부지로 자랐던 아란은 그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딸이자신처럼 부족한 황제가 되지는 않을까, 그녀는 늘 노심초사했다.

반면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에녹은 딸에게 냉정하게 굴기가 힘들었다. 특히 브린이조금만 더 크면 온갖 법도에 얽매일 것을 알아 더 그랬다.

서로 다른 육아 가치관도 싸움을 극도로 기피하는 두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다행히 브린은 어느 정도 배가 차자 다시 바른 자세로돌아갔다. 그제야 아란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안타깝게도, 딸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에 두 사람은 지나치게 바빴다. 식사를 마치자 에녹은 아쉬움을 뒤로 한채 일어났다.

그를 눈치챈 브린이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본 아버지와 떨어지는 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은데, 그나마 곧 터질 것 같았다.에녹은 나름대로 브린을 달래보려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일을 끝내고 놀아주마."

"괜찮아요. 저도 이젠 아기가 아니니까요."

브린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에녹은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라리 울면서 떼를 썼다면 이렇게안쓰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엄격한 태도를 고수하던 아란도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그녀가 에녹에게 말했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는 게 어때?”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널 데려가면 아침부터 브린이 울 것 같단 말이야. 날 여기서 더 매정한 엄마로 만들지 말아줘.”

아란이 그렇게 말하자 에녹은 더 사양할 수 없었다. 아란이 브린을 향해 몸을 숙였다.

“오늘은 특별히 아버지와 놀아도 좋아. 대신 얌전히 굴어야 해, 알았지?”

늘 에녹에게 무르게 군다며 타박을 주지만, 실은 아란이야말로 누구보다 브린에게 관대했다. 아란만 모르는 그녀의 비밀이었다.

“네!”

조금 전까지 울먹인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브린이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은 브린과 에녹의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는 자리를 떴다. 에녹을 쉬게 했으니 대신 그녀가 더욱 열심히 일해야 했다.

에녹은 그녀의 모습이 더 보이지 않게 되자 브린을 안아들었다. 고작 몇 달 만에 브린은 한층 더 묵직해져 있었다.

“그럼 뭘 하고 놀까. 보물찾기?”

보물찾기는 석 달 전까지 브린이 가장 좋아하던 놀이였다. 에녹은 질문하면서 이번엔 어디에 장난감을 숨겨야 할지 궁리했다.

그러나 브린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그건 너무 많이 했어요. 오늘은 제 궁에 있는 정원에 씨앗을 심을 거예요."

요즘 브린의 흥미는 원예로 옮겨간 모양이다. 에녹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며 다시 물었다.

“무슨 씨앗을 심으려고?”

“카펜시스라는 희귀 식물이에요.”

처음 듣는 식물이었다. 그러나 낯선 식물에 대한 호기심은 이어진 말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제 대부님께 선물 받았어요. 실은 저번부터 졸랐는데, 제국에선 안 나는 식물이라 구하는데 오래 걸렸대요.”

에녹은 찰나였지만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브린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이를 갈면서도 그는 침착하게 익숙한 단어들을 속으로되뇌었다.

점잖은 남편, 점잖은 아버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없는 동안 사일러스 공작이 다녀갔나 보구나.”

“네. 씨앗이랑, 오랜만에 만난 선물로 머리끈도 주셨어요.”

브린이 제 머리를 묶은 비단 리본을 가리켰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리본은 제법 값이 나가 보였다.

아차,

에녹은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바쁜 와중에 급히돌아오는 것만 생각하느라 미처 가족에게 줄 선물을 챙기지 못한 것이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을 보니 마치 사일러스 공작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여전히 에녹은 공작을 싫어했다. 치졸해 보일까 봐 내색은 못 했지만 그가 브린에게 잘해주는 것마저 고깝게 보일지경이었다.

낯가림 따윈 모르는 브린은 평소 공작에게 재롱을 잘 부렸는데,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어찌나 다정한지, 모르는사람이 보면 공작과 브린이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공작 역시 금발이었다. 브린 쪽이 훨씬 색이 옅었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질투 났다. 그런 상황이니 공작이준 씨앗을 심자는 브린의 말이 달가울 리 없었다.

"씨앗을 심으면 손에 흙이 묻을 텐데? 폐하께서 싫어하실 거다."

에녹은 괜히 아란 핑계를 댔다. 그러나 브린은 완강했다.“아니에요. 어머니께서 허락해 주셨단 말이에요. 식물을돌보면서 책임감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씨앗은 지금 심지 않으면 자라기 힘들단 말이에요.”

딸을 설득할 핑곗거리를 더 찾지 못한 에녹은 브린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황녀궁으로 향하는 걸음이 몹시 느렸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브린은 마냥 좋아하며 조그만 씨앗이 잔뜩 든 주머니를 꺼내왔다.

감히 황녀에게 이런 씨앗 따위를 주다니.

얼마나 귀한 식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 사일러스가 준 건 전부 잡스럽게만 보였다.

"이걸로 흙을 파세요."

브린이 에녹에게 조그만 모종삽을 건네주었다. 그러자로지나가 난처한 얼굴로 나섰다. 이제 그녀는 아란이 아닌브린의 시녀였다.

“황녀 전하. 그 일은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황녀야 직접 정원을 가꿔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대공까지 쪼그려 앉아 땅을 파게할 수는 없었다.

“일손은 나와 황녀로도 충분하니, 너희는 이만 물러가라.”

에녹이 로지나에게 명령했다. 오랜만에 딸과 보내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냉정한 말투에서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챈 로지나가 익숙하게 시종과 시녀들을 이끌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방해꾼들이 사라지고, 모종삽을 받아든 에녹은 열의 없는 태도로 푹푹 흙을 팠다.

“너무 깊게 파면 싹이 나올 때 힘들대요. 씨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 정도로만 심을 거예요.”

그 모습을 본 브린이 주의를 주었다. 에녹과 달리 브린은의욕이 넘쳤다. 서툴지만 씨앗을 다루는 손길이 제법 정성스러웠다.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요."

브린이 말했다.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며 파헤쳐진 흙을 내려다보던 에녹은무언가를 깨달았다.

“인공 호수가 가까워서 많이 습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공작이 준 식물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지만 브린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건 또 싫었다.

“원래 습한 걸 좋아한대요."

"그런 건 다 어떻게 알았어? 이름도 생소한 식물인데.""책에서 봤어요."

세상에.

에녹은 언짢던 것도 잊고 웃었다. 지금처럼 딸이 영특한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사실방금 나눈 대화가 천재 운운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그는 딸의 문제에 대해선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하긴, 똑똑하고 사랑스러우니 재수 없는 사일러스 놈의마음까지 사로잡은 거겠지.

엉뚱한 결론을 도출한 그의 웃음이 한층 밝아졌다. 놈이 아무리 선물 공세를 하며 환심을 사려고 해봤자 브린은 결국 제 딸이었다. 내내 짜증스럽던 마음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풀렸다.

스스로도 지나치게 변덕스럽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아란과 브린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브린을 위해서 이런 잡초 따윈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열심히 심었으니 앞으로도 사랑을 담아 돌봐주렴.” “네.”

무엇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브린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버지.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사랑이 정확히 뭐예요? 물어보는 사람마다 대답이 다달라요."

별생각 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던 에녹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조금 당황했다.

딸에게서 벌써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이야.

넘치는 기운만큼 브린은 호기심도 많았다. 조금이라도 궁금한 건 참지 못하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브린이 제법 말을 잘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에녹은 점점 브린을 상대하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멋진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이렇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평생에 걸쳐 깨달아 온 그 강렬한 감정을 짧은 문장으로 축약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그건 누군가와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야.”

오래 고심한 것에 비해 대답은 짧았다. 다행히 아직 어린 브린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에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브린을 만족시키지 못할 날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렬히 들었다.

"그럼 전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네요! 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요.”

"나도 그래."

에녹도 브린을 사랑했다. 한 명밖에 없을 자식이라 더 그랬다.

이전엔 제 몸을 상하게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딸과 오래 있고 싶었다. 물론 아란도. 두 여자는 그의 마음을 무르게 했다가, 또 강하게 만들었다.

"대부님이 그랬는데,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결혼하는 거래요. 그래서 대부님은 결혼을 안 했대요."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에녹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나저나 겨우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언짢아지려고 했다.

“사일러스 공이 네게 쓸모없는 소리를…………”

“어머니께도 여쭤봤는데, 어머니도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하셨어요.”

흙을 파던 에녹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분께서 그리 말씀하셨니?"

물론 아란은 어린 딸 앞에서 결혼으로 얻을 정치적, 경제적 이점을 줄줄이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부모로서 브린의 동심을 지켜줄 대답을 택한 것뿐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란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게 그에겐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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