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30화 (외전) (130/146)

130화. 외전1.

에녹이 돌아왔다.

대공령에 문제가 생겨 수도를 비운 지 세 달 만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란에게 저녁 인사라도 건네고 싶어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부지런히 말을 달렸는데, 황궁에 도착하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오늘은 그냥 수도의 저택에서 잠을 청하고 아침에 다시 찾아올지 고민했지만, 결국 발길을 돌리지는 못했다. 먼저 오랜 여정에 더러워진 몸을 씻은 그는 조용히 아란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가 내내 그리워했던 포근하고 달콤한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그 냄새를 맡자마자 거짓말처럼 그간의 긴장이 전부 풀렸다. 반면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고작 몇 걸음 남았을 뿐인데도 침대에 누운 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성큼성큼 침대 가까이 다가가니 미동도 없이 잠든 아란이 보였다. 에녹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침대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공기 중에 섞여 있던 달콤한 냄새가 더 짙어졌다. 밤공기를 쐰 데다 찬물에 몸을 씻어 차가운 그와 달리, 내내 침대안에 누워있던 그녀의 몸은 따뜻했다. 찬기를 느낀 아란이 본능적으로 버둥거리며 가물가물 눈을 떴다.

“음, 뭐야………? 에녹……?”

"예. 접니다."

그가 대답하며 살짝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그제야 안심했는지 아란이 뒤척임을 멈추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눈도 뜨고 말도 했지만 아직 그녀는 혼몽을헤매고 있었다.

잠에 취한 얼굴이 귀여워서, 에녹은 한순간 괴롭혀주고싶다는 충동에 빠졌다. 그러면 분명 정신을 차린 아란에게혼나고 말겠지만 말이다.

남편의 괘씸한 속내를 모르는 아란은 돌아온 그를 위해 감기려는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들어 올렸다.

“안녕…………”

그리곤 뭐라 더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도로 잠들어1버렸다.

깨울까 말까.

에녹은 고민에 빠졌다. 한참 후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지만, 하룻밤에 두 번이나 잠을 깨우는 못된 남편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아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곧잠이 몰려오며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서서히 늘어졌다. 아란과 떨어져 있는 동안엔 절대 느낄 수 없는 평온함이었다. 분명 대공령에 있는 성도 그의 집인데, 이제야 진짜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는 집이 많았다. 대공령의 성, 수도의 저택, 황궁, 그리고 곳곳에 지어진 별장까지 헤아리면 셀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곳은 오직 아란의 곁뿐이었다.

“이제 돌아왔습니다.”

그가 잠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늦은 귀가였다.

***

“언제 왔어?"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아란이 에녹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젯밤에 왔습니다.”

“그렇구나. 잠들어서 몰랐어. 깨우지 그랬어?”

간밤의 인사는 정말로 잠결이었는지, 아란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곤히 주무시기에.”

에녹이 가만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어제의 일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어제처럼 완전히 경계를 허물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괜히 잠꼬대하는 모습이 귀여웠다거나, 놀려주고 싶었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말을 하면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몰랐다.

에녹은 아란이 자신 앞에서 빈틈을 보이길 꺼린다는 걸 알았다. 그의 모든 악의가 그녀를 향했던 시절, 무능한 황제라고 수도 없이 꼬투리를 잡고 조롱했던 결과였다.

그녀가 제게 내려주는 안식을 자신은 그녀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가라앉은 얼굴이 티가 났는지, 아란이 물었다.

“표정이 안 좋아. 설마 인사 안 해줘서 삐쳤어?"

"아닙니다."

“그럼 아픈 거야? 설마 너무 무리해서 병이 심해진 건 아니겠지?"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황궁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아란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에녹은 아무 변명이나 늘어놓았다. 다행히 그 말을 믿었는지 아란이 실소했다.

“여기가 네 집인데 고작 몇 달 만에 낯설어지면 어떻게 해.”

에녹은 억지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곧 아란이 일어나기 위해 몸을 뒤척이자 에녹이 그녀를더 꽉 껴안았다. 죄를 그렇게 지어놓고도, 뻔뻔한 자신은그녀를 놔줄 수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이릅니다.”

“날이 밝았는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날 질식시킬 속셈이아니라면 이만 놓아주는 게 어때?"

아란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대로 좀 더 오래 누워있으면 좋을 텐데, 아란은 매정하게도 에녹을 밀어냈다.

그는 별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대충 옷을 걸치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엔 세숫물이 들려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잠든 다음 날 아침엔 그가 아란의 시중을 드는 게불문율처럼 되어있었다.

얼굴과 손을 씻은 후엔 옷을 고를 차례였다. 에녹의 칙칙한 취향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제 그는 아란이 원하는 옷과 장신구만큼은 눈을 감고도 척척 골라낼 수 있게 되었다.

옷을 입히고 목걸이를 거는 손길 또한 웬만한 시녀들보다 섬세했다. 기껏 입힌 옷을 다시 벗기고, 공들여 꽂은 머리 장식을 도로 풀어내는 경우가 '곧잘 일어난다는 게 흠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 에녹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더더욱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입을다물고 리본을 묶는 데 열중했다.

심장이 떨렸지만 어쨌거나 그는 성공했다. 완벽하게 매듭을 짓고 고개를 드니 아란이 거울을 통해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제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게 몹시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돌아서서 그와 마주 본 아란은 상을 주듯 그를 껴안고등을 토닥였다.

“오랜만이야.”

아래에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아침 정사가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인내를 배려한 처사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무심코 고개를 들어 에녹과 마주했을 때, 아란은 정말로 그를 배려했다면 어떤 접촉도 해서는 안 되었음을 깨달았다.

욕망으로 달아오른 붉은 눈을 보며 아란은 잠시 고민했다. 힘들어서 외면하긴 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그럼 키스만…….…”

눈을 감기 무섭게, 입술이 질척하게 얽혀들었다. 세 달간 억눌렀던 정념을 증명하듯 입맞춤은 격렬하고 조급했다.

입술뿐만 아니라 턱, 뺨, 눈꺼풀, 이마에 키스 세례가 쏟아졌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입술과 혀를 이기지 못한 아란이 한껏 목을 젖히자 곧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받쳐주었다. 동시에 나머지 한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 “아란・・・・・….”

단순히 키스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느낀 아란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싫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은 쪽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이 이상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오늘 하루가 힘들어질 것 같았다. 어쩌면 정무 중에 졸게 될지도 몰랐다.

아란은 부부 사이가 좋다는 걸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간신히 입술을 뗀 그녀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자, 잠깐.”

거부 의사를 읽은 에녹이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그는 아쉬움을 삼키며 마지막으로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 때, 문밖에서 로지나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대공 전하. 황녀 전하께서 조찬을 함께해도 되는지 여쭈셨습니다.”

나른하게 남아있던 여운이 순식간에 깨졌다. 로지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란이 반사적으로 에녹을 밀친 것이다. 있는 힘껏 떠미는 손길에 놀란 에녹이 입술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아란 역시 제풀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였던 그에게 조금 전 행동은 과했다. 그래도 에녹은 화를 내지 못했다. 그것 역시 오래전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느라 생긴 버릇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폐하?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로지나가 한 번 더 물었다.

“알겠다고 전해주렴.”

아란이 바깥을 향해 대답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결혼한 이후 종종 찾아오는 침묵이었다.

평소 두 사람의 모습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지만, 분명 그 사이엔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엇물림이 있었다. 아란은 때때로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굴었고, 그 기색을 눈치챌 때면 에녹은 자기혐오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힘들게 얻은 평화가 깨질까 두려워 각자속내를 꽁꽁 감추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에녹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힘이 세지셨군요."

“으응, 운동 열심히 했거든."

아란도 장난처럼 응수했지만 어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다시 침묵이 깔리기 전, 그녀는 조금 허둥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럼 난 먼저 나가볼게. 너도 빨리 준비하고 나와.”

혼자 남겨진 에녹은 한동안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드니, 거울 속에 참담한 표정을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잠시 일그러진 제 얼굴을 노려보다가 억지로나마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시종을 불러 준비를 서둘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도, 굳은 얼굴로 분위기를 망치기도 싫었다. 그는 짐짓 가벼운 걸음으로 침실을 나섰다.

“아버지!”

에녹을 본 브린이 활짝 웃었다. 오늘따라 단정하게 차려 입은 옷과 머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돌아오셨다는 말을 아침에 전해 들었어요.”

브린이 또박또박 말했다. 고작 다섯 살인데도, 이제 제법 황녀다운 기품이 묻어났다. 그러더니 아란 못지않게 우아한 태도로 의자에 앉았다.

부쩍 성숙해진 모습에 에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지만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브린은 식사 예절조차 완전히 익히지 못했었다. 게다가 성격도 지나치게 활발해서, 시녀와 시종은 물론 나이 지긋한 귀족들까지 난처하게 만들던 딸이었다.

“네게 보여주려고 전부터 연습했대. 기특하지?”

아란이 말했다. 그 얼굴에서 아침과 같은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감춰두었을 뿐,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에녹은 그 사실을 모르는 척했다. 아란도, 에녹도, 브린 앞에선 다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필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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