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결혼식은 정확히 반년 후, 브리이트 여신의 신전에서 열렸다. 원래라면 1년 정도 준비해야 했으나, 무엇이 그리 급한지 황제는 거쳐야 할 절차를 과감히 생략하며 국혼을 서둘렀다.
두 사람은 여신상 앞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란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건 오늘이 두 번째였다. 처음 드레스를 입었던 날을 떠올린 아란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결연하게 속삭였다. 대공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때와는 달랐다. 지금 그녀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
사랑했던 사람들, 미워했던 사람들은 전부 떠나고 아란 곁에 남은 건 그뿐이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혈육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으니, 이젠 그녀가 채워줄 차례였다.
브린을 낳은 것을 후회한 적 없듯이, 그와 만들 미래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결같이 아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그 눈동자에 눈물이 비친 것도 같았다. 자 세히 보려는 순간, 대사제의 선언이 시작되며 나란히 서게 되어 더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란은 여신상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여신상 앞에서 거짓을 고하면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저주가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저주는 한낱 미신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녀가 여신상과 눈을 맞추는 동안, 대사제가 대공의 머리 위에 관을 씌워주려 했다. 그러나 대공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의 돌발 행동에 아란을 포함한 참석자 전부가 당황한 가운데, 대공만 홀로 의연했다. 그는 몸을 돌려 아란을 바라보았다.
“내가 씌우라고?”
아란이 작게 속삭였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대사제에게 말했다.
“이리 건네게.”
대사제가 얼떨떨한 낯으로 아란에게 관을 건넸다. 그제야 대공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란은 성격 한번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관을 올렸다. 참석한 사람들이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두 사람이 정말 부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몸을 일으킨 그가 고개를 숙여 아란에게 짧게 키스했다. 그의 성향을 고려하면 놀랄 만큼 깔끔한 입맞춤이었다. 아란은 그가 얼마나 긴장한 상태인지 여실히 느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란이 격려하듯 속삭였다.
“잘했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아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마 그가 준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끔찍한 상처 위에 켜켜이 새로운 행복을 덧씌운다면, 아무리 깊이 파도 흔적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두껍게 쌓아 올린다면, 언젠가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란은 그를 보며 환히 웃었다. 진실보다 더 애틋한 거짓말이었다.
* * *
아란은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은 후 신방에 들어섰다. 텅 비어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대공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했다. 피로연에서 귀족들에게 붙잡혀있던 모습을 보았기에 밤늦게까지 거하게 마시고 올 줄 알았는데, 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어?”
“몸에 안 좋으니까요.”
“맞아. 이제 건강을 해칠 일을 하면 안 되지.”
아란은 실소를 지으며 침대로 향했다. 대공이 앉아 있는 테이블엔 간단한 음료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손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곤해서 빨리 잠들고 싶었다. 초야, 신방이라는 말에 들뜨기엔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눕기 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머리를 장식한 보석을 떼어내려 했으나 신방에 거울이 없는 터라 영 쉽지 않았다. 특별한 날이라고 시녀들이 잔뜩 힘을 준 게 분명했다. 곤란해하는 그녀를 본 대공이 다가왔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놔둬. 시녀를 부르면 되니까.”
“신방에 부부 말고 또 누굴 들인단 말씀입니까.”
그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어느 정도 들떠있는 것 같았다.
“어려울 텐데. 우선은 해 봐.”
아란이 대공을 향해 등을 돌렸다. 대공이 그녀의 뒤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머리칼에 손을 댄 그가 잠깐 멈칫거렸다. 장식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아란의 시중을 드는 데 익숙했지만, 커다란 손으로는 한껏 멋을 부려 꽂은 섬세한 장식을 풀기 쉽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손을 놀렸으나 어째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기만 했다.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란이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짜증을 낼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란과 달리 이 시간을 기대하고 있던 그는 애가 달았지만, 아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길까 봐 성급하게 굴지도 못했다. 아란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보지 않아도 그의 표정이 훤히 그려졌다.
장신구 끝에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심히 세공을 쓸어 만지던 그는 문득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파이어…….”
“아……. 네가 준 거야.”
대공이 열심히 뽑아내려 애쓰는 그 장식은 언젠가 그가 주었던 목걸이를 해체하여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목걸이는 내 취향이 아니었어.”
“그러셨습니까.”
“그래도 보석함에만 처박아두기엔 아깝잖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덜미가 은은하게 발개져 있었다. 그는 그곳에 입 맞추고 싶었다. 지금과 같은 색으로 깊게 흔적이 남을 때까지 여러 번.
제 선물을 아란이 마음대로 변형한 것에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목걸이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는 정말 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착용해주어 고마웠다.
머리를 만지는 손놀림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아란은 그의 손길을 느끼며 평온히 말을 이었다.
“아직 충분하진 않지만, 네가 많이 노력하는 거 알아. 성격도 그렇고.”
“브린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라세르 왕세손도 살려둔 거야?”
아란이 물었을 때, 그가 마침내 머리 장식을 풀어냈다. 기다란 백금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는 대답도 잊고 곧장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결혼식을 위해 향수를 얼마나 뿌렸는지 몸을 씻은 지금도 체향이 잘 맡아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코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귀, 목덜미를 헤집어 익숙한 체취를 찾아내려 했다. 간지러웠는지 아란이 급작스럽게 웃었다. 그 소리를 듣자 순식간에 욕정이 들끓었다.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감각을 느낀 그녀가 웃음기를 싹 지웠다.
“뭐,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닐 리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점점 부피를 늘리고 있었다.
“몸도 허약하면서.”
“허약하다니요.”
대공이 잠시 그녀를 놓고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깨어난 직후 앙상해졌던 몸은 병을 잊을 만큼 다시 탄탄하게 차올랐다. 아란이 그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나보다 네가 더 문제야. 보기엔 건강해도 까보면 알맹이 없는 쭉정이…… 악!”
갑자기 침대로 쓰러지게 된 아란이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대공이 민첩하게 그녀 위로 올라왔다.
“쭉정이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세요.”
금세 침착을 되찾은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주치의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돌팔이가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가 뻔뻔하게 몸을 맞댔다. 아란은 기가 막힌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식도 있으면서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대공이 몸을 숙여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저는 브린이 자라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폐하와 함께 늙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자신이 기약 없는 생을 끝낼 때까지 그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허튼 생각 하…….”
그의 생각을 대충 눈치챈 아란이 그녀가 타박하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그가 고개를 내려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동시에 뜨거운 손이 옷과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내리고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음.”
저도 모르게 흘린 비음에 아란이 낯을 붉혔지만 그는 그녀를 비웃지 않았다. 되레 그 소리에 더 달아올랐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순식간에 둘은 나체가 되었다. 초봄의 밤은 서늘했지만 서로 맨살을 맞대고 있으니 외려 열이 올랐다.
“아으…….”
대공이 아란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의 가슴과 배는 임신하기 전처럼 부풀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살이 늘어났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특히 배가 그랬다. 가냘프고 연약한 몸으로, 그것도 반년이나 홀로 아이를 품었던 걸 생각하니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피부에 새겨진 흔적을 매만지던 그는 곧 탐욕스레 아란의 양 가슴을 쥐곤 그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과 코가 부드러운 둔덕과 돌기를 연신 문질렀다. 그가 단단해진 유두를 입에 넣고 굴렸다.
아란은 조금씩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끼는 와중에도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이렇게 상대를 물고 빠는 게 그렇게 좋은 것인지. 그녀는 가슴을 애무하느라 여념이 없는 그의 머리를 조금 냉정하게 밀어냈다.
“잠시만 가만히 있어 봐.”
그리곤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다 돌기를 슬쩍 건드렸다. 그 돌발 행동에 처음엔 당황스러워하던 대공은 곧 뜨거운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후우…….”
아란은 반대쪽 손도 뻗어 그의 귀도 만졌다. 둥근 귓바퀴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란은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못 만져 안달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때마다, 야릇한 호기심과 함께 묘한 정복욕이 느껴졌다. 더 참지 못하겠는지, 그가 완전히 욕망에 젖은 눈으로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아란이 단호히 명령했다.
“안 돼.”
“아, 제발…….”
아란은 그의 간청을 무시한 채 하던 일에 열중했다. 상체를 일으켜 그를 마주하고선 유두를 살짝 물어보기도 했다. 조그만 손이 갈라진 복근을 지나 단단한 허벅지에 닿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란은 잠시 그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가 그녀와 브린 앞에서 곧잘 보여주는 무른 얼굴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낯선 남자처럼 생소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몸속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닦아주며,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그의 성기로 손을 뻗었다. 그것은 이미 아까부터 배에 붙을 것처럼 바짝 서 있었다. 대공과 눈을 맞추며 선단을 쥐고 문지르자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거칠게 뱉어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말임이 틀림없었다.
“착하게 말해야지.”
아란이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대공은 그녀의 수작에 맞장구를 쳐야 하는지 고민하다 대꾸할 말을 떠올릴 여유가 없어 포기했다.
그녀의 희롱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서툰 소년처럼 왈칵 아란의 손에 정을 토해낸 것이다. 손을 적신 희멀건 액체에 당황한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가 제 옷자락으로 대충 닦아주었다.
“저를 가지고 장난치시니 즐거우십니까?”
그가 사납게 물었다. 화가 났다기보단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아직도 반쯤 일어선 성기가 크게 꺼떡였다.
“조금?”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그녀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약이 오른 대공이 그녀를 바짝 끌어당겼다.
버둥거리는 아란을 간단히 제압한 그는 그녀를 껴안은 채로 다시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눈 깜짝할 새에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쪽 다리는 제 어깨에 걸쳐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