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꿈에서 깨어난 그는 이제 현실에서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러나 무거운 추라도 단 것처럼 정신이 한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안 되는데.
부유하던 대공은 멀리서 누군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몹시 초조해졌다. 겨우 용서받을 기회를 얻었는데, 이대로 영원히 잠들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했다.
무의식 아래로 가라앉으려 할 때마다, 그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으면 언젠가 이 어둠 속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짝이던 목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그에게로 내려왔다. 어느 날은 부드럽게 달래다가, 또 때로는 원망에 차서 외치기도 했다. 이대로 가면 그를 잊을 거라고, 다른 사람을 찾을 거라며.
안 될 일이지.
죽어도 그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 * *
대공이 한 달 가까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외부에는 과로로 인한 요양이라고 했지만, 기간이 길어지자 위독한 병이 아니냐는 의문이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란은 모든 의문을 일축한 채 태연히 행동하고 있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브린마저 없었다면 진작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잠든 그를 볼 때마다 아란은 생각했다.
이건 사랑일까, 증오일까.
무엇이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가 없으면 안 됐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것이니 각별한 게 당연했다. 아란은 버릇처럼 그의 귀에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네가 일어나면 미뤘던 브린의 세례식을 하자. 그리고 국혼 준비도 하고…….”
그 이야기를 듣자 그는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도 웃었다. 아란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전까진 희망에 부풀어 호들갑을 떤 적도 있었지만, 이윽고 그녀의 말을 알아들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시들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다시 물었다.
“왜 웃어? 나랑 결혼할 생각만 해도 좋아?”
그가 웃는 낯 그대로 미약하게 숨결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아란은 지금 상황도 잊고 그를 따라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이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아란이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눈을 비볐다. 그리고 짐짓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깨어나면 그땐 정말 용서해줄게.”
한 번 해본 거짓말이라 그런 걸까, 두 번 하는 건 쉬웠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미약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그 맥동이 끊길까 봐 무서웠다. 브린을 낳을 때보다도, 그와 다시 재회했던 날보다도 더 큰 두려움이었다.
“나 다른 남자와 혼인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어서 일어나서 청혼해. 사랑한다고 말해.”
내가 또다시 널 지키지 못하게 만들지 마.
저도 모르게 진심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내내 저 고백이 듣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마음 약한 자신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피했던 것뿐이다.
“그러면 그땐 정말 환하게 웃어줄게, 에녹.”
그녀가 흐느끼듯 이름을 불렀을 때,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와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말보다도 먼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란은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시야가 흐려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서둘러 눈물을 떨구었지만 자꾸만 다시 솟아났다.
“그 말.”
고목 껍질처럼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가 몹시 낯설어 이 상황을 더 믿을 수 없었다.
“그 말, 꼭…….”
말을 하던 도중 그가 숨을 헐떡였다. 말을 잇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전부 알아들은 아란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더 나아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맥이라곤 하나도 없는 손가락이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란은 망설임 없이 그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어디 아프진 않아? 숨쉬기 힘들진 않고? 물 마실래?”
그 상태로 연달아 질문을 쏟아내자 흐린 시야로 그가 고개를 젓는 게 느껴졌다.
“걱정시키지 마.”
얽힌 손을 끌어 이마에 갖다 대며 아란은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마치 그와 함께 기도를 올리는 것 같았다. 감긴 눈 사이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전보다 확연히 앙상해진 손이 눈물을 닦아줄 것처럼 들썩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참이나 그 상태로 감정을 억누르던 아란은 이윽고 그가 바라던 대로 눈물을 그쳤다. 뒤늦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내내 혼절해 있느라 기억이 없을 텐데도, 그는 몹시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로소 그 눈동자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러다 의원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의원을 데려올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다시 눈을 감을까 봐 그녀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대공이 입을 달싹였다.
“여기에…….”
“그래.”
아란은 서둘러 대답했다. 잠시 떨어지려 했던 손을 꽉 맞잡았다. 그는 초췌한 얼굴로 다시 한번 웃었다.
아란의 걱정과 달리, 그가 다시 정신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는 특유의 회복력으로 점차 생기를 되찾았다. 첫날엔 몇 마디 말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다음 날엔 몸을 뒤척였고, 다음 날의 다음 날엔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를 치료하던 의원들이 전부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마냥 기뻐하긴 일렀다. 의원의 말로는 여전히 그의 몸엔 독이 전부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아있다고 했다. 당장 고비는 넘겼다지만, 완치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걸릴 터였다.
아란은 대공 앞에선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역시 제 상태를 모르지 않거니와, 오랜만에 깨어난 그 앞에서 불안함을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브린까지 대공저로 데려와 그에게 보여주었다. 딸을 보면 살아갈 의욕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예상대로 대공은 딸을 보고 반색하며 힘없는 팔을 뻗었다. 그러나 약 냄새가 심해서인지, 그의 팔에 안기자마자 브린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간 아란이 서운할 만큼 아빠만 찾아대던 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꺼렸다면 몰랐을까, 급작스러운 거부에 대공은 내심 충격이 큰 것 같았다. 그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브린, 한 달 만에 아비도 몰라보는 거냐? 나쁜 아이 같으니.”
그 말을 들은 아란이 장난스레 그를 타박했다.
“감히 황제 앞에서 황녀를 타박하다니, 무엄하다. 황손에게 예를 갖춰야지.”
단순히 농담이었을 뿐인데, 대공이 어딘지 허를 찔린 표정으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설마 신분으로 꼬투리를 잡힐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슬픈 목소리로 브린에게 사과했다.
“그렇군요. 전 일개 귀족일 뿐이니까요. 부디 이 아비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갑자기 바뀐 말투가 웃겨서, 아란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한참 끅끅거리던 그녀가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딸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아비가 된 게 서운하지는 않아?”
“그런 거 아닙니다.”
“거짓말.”
“정말 아닙니다. 다만 좋은 아비보다 예의 바른 아비가 되는 게 우선이라는 사실이 아쉬울 뿐입니다.”
아란은 브린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싫으면 너도 황족이 되든가.”
그 뜻을 알아들은 대공이 놀란 눈을 했다. 황족이 아닌 자가 황가로 편입하는 방법은 혼인뿐이었다. 아란은 헛기침을 하며 괜히 브린의 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나 대공의 얼굴은 곧 어두워졌다. 아직 병이 그대로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자신이 국서로 나서도 괜찮을지 염려되었다.
그가 답이 없자 아란이 힐끗 그의 얼굴을 살폈다.
“왜? 곧 죽을까 봐 걱정돼?”
“…….”
말랑한 피부를 잡아당기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울음을 그쳤던 브린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란은 딸을 달래주는 대신 로지나를 불러 아기를 돌볼 것을 명령했다. 우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 와중에 그것이 못내 신경 쓰인 대공이 문밖을 힐끔거리자 아란이 냉랭하게 말했다.
“브린은 원래 자주 울어.”
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란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나한테 청혼하려고 눈 뜬 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런데 왜 망설여? 살아 돌아온 게 아까워서라도 뜻을 이뤄야지.”
그녀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난 이미 한 번 너를 용서했어. 이제는 먼저 손 내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젠 네가 먼저 다가와.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의 뜻을 따르고 싶었다. 아란이 바라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언제나 하고 싶던 말이었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보았던 환상 역시 그 마음을 부추겼다. 과거는 이미 틀어졌지만, 노력하다 보면 어쩌면 그런 날이 오지도 않을까 하는 기대가 피어올랐다.
갈등하던 그는 마음을 굳혔다. 이기적이지만, 하루를 살아도 그녀의 남편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자꾸만 혀가 굳어졌다.
“시간을 주십시오. 최소한 반지라도 준비가 되면…….”
일단 그는 이런 식으로 청혼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귀한 주인이니 청혼도 격에 맞아야 했다. 아란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무능해도 난 이 제국의 주인이야. 보석 몇 개로 내 환심을 살 수는 없어.”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란이 손가락을 뻗어 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리고 반지는 약혼식 때 줬었잖아.”
그는 비로소 이게 그녀에게 하는 두 번째 청혼임을 떠올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까. 부모의 뜻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약혼식까지 올린 사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예물로 무엇을 주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망설임을 떨쳐내듯 아란이 단호히 말했다.
“앞으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내 딸의 소유가 될 테니, 이제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건 네 미래뿐이야.”
그 말에 대공이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란은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그 역시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아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땐, 전신이 땀에 절어 있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떠올리느라 축축함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고심이 길어지자 아란이 재촉하듯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한참 만에 그가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결혼해주십시오.”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청혼이었다. 그가 꿈꾸었던 청혼은 이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했지만 말이다. 아란 역시 불만족스러웠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그리고 망설이다 덧붙였다.
“나의 아란흐로드.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그제야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거절하면 네가 다시 쓰러질까 봐 받아주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부추긴 청혼이라는 생각에 약이 오른 아란은 이제부터라도 도도한 어조로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터진 눈물 때문에 훌쩍이느라 효과는 없었다.
“왜 우십니까. 웃어준다고 하셨으면서.”
“하아. 양심도 없지, 이런 식으로 청혼하고 내가 웃길 바랐어?”
제가 생각해도 그녀의 말이 맞았기에, 대공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만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아란흐로드. 제 모든 것을 바쳐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행복이 뭔지 모르는 남자의 약속은 그리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꼭 지켜.”
울고 있는 아란 대신 그가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