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26화 (126/146)

126화

“로아크 대공.”

나직하게 그를 부르자 눈동자가 느리게 아란을 향해 돌아왔다.

“혹 지금 짐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거든 지체 없이 말해도 좋소.”

아란이 농담인 척, 은근히 그를 책망했다. 황제가 그를 이런 식으로 책망하는 것도, 그리고 대공이 회의에 집중하지 못 하는 일도 극히 드물어, 다른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은근히 웃음을 머금었다.

아란은 당연히 그가 이 상황을 언짢아하며 평소처럼 칼 같은 목소리로 부인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예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대답할 것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아란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란이 이유를 묻기 전에, 그의 커다란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강건해 보이던 육체가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회의장을 둔탁하게 울렸다.

“로아크 대공!”

아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곁에 앉아 있던 자들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아란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려다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다른 사람들이 몸에 손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함부로 손을 뻗는데, 그는 눈을 굳게 감고 그들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란은 그게 몹시 거슬렸다. 그러나 손대지 말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현실성 없이 아득했다. 눈 뜨지 않는 그도, 그를 부축하는 귀족들도, 웅성거림도. 전부 다. 시종들이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대공이 사라진 회의장엔 웅성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흠, 돌발 상황이 있었지만 회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벌써 라세르 왕세손에 관한 논의를 비롯해 중요한 다른 일들이 반년이나 미뤄졌으니 말입니다.”

비에른 후작이 말했다. 다른 귀족들도 회의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대공이 빠진 지금이, 조금이나마 그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때였다.

그러나 회의를 주관하는 내내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던 황제에게선 조금 전의 의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꼭 대공과 함께 그녀의 의지도 사라진 것 같았다.

“폐하?”

비에른 후작이 조급한 목소리로 황제를 재촉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아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소.”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대공이 사라진 문을 향한 채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오랜만에 폐하께서 친히 주관하신 회의가 아닙니까.”

비에른 후작이 항의했지만 아란은 무시로 그 대답을 일축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황제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되레 그녀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끝났다는 말 못 들었나? 전부 나가시오!”

전에 없이 고함을 치는 황제의 태도에 놀란 귀족들은 우선 그녀의 명령대로 회의장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일러스 공작이 아란에게 다가왔다.

“폐하.”

“사일러스 공…….”

아란이 조금 전과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공작은 부드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별일 아닐 겁니다. 워낙 전부터 격무에 시달리셨으니 피로하셨을 테지요.”

“그래. 그럴 걸세.”

아란도 사일러스 공작의 말처럼 편히 생각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등엔 분명 아무것도 없었고, 그를 증명하듯 대공은 내내 의욕이 넘쳤다.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녀가 갑자기 공작의 말을 부인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대공의 병을 몰랐다. 늘 아란의 마음을 달래주던 그의 위로도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란이 한순간 비틀거렸다.

그가 아란을 부축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붙잡을 틈도 없이 대공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 * *

아란은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는 대공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리한 치료가 부담이 된 거라고, 낯익은 그의 주치의가 설명했다.

“위험하다고 경고를 드렸지만 워낙 뜻이 완강하시어…….”

“그럼 언제 눈을 뜨는 건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주치의가 어쩔 줄 몰랐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하의 의지에 달렸다고밖엔…….”

아란은 입술 안쪽을 씹었다. 내로라하는 의원들을 전부 불러 물어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의지라는 단어만 반복했다.

“알겠으니 돌아가 보아라.”

아란이 힘없이 고개를 젓자 기다렸다는 듯 의원이 후다닥 사라졌다.

“저, 폐하……. 괜찮으세요?”

로지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란을 불렀다.

“그럼.”

아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란에겐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가 있으니, 이전처럼 그가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권력을 두고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놓고 원망할 수 없어 더 원망스러운 남자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녀가 끝내 거짓말까지 하게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그저 기껏 낸 용기가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쉽고 억울할 뿐이다.

“괜찮고말고.”

그녀가 재차 뇌까렸다. 로지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황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말과 달리 그녀는 꼭 건드리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치 빠른 로지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슬픔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방을 나섰다.

아란은 로지나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해가 져 사위가 어둑해졌다. 그제야 아란은 조금 정신이 들었다. 뒤늦게 회의장에서 자신이 보인 추태와 취소된 일정, 사일러스 공작에게 저지른 실수가 떠올랐지만, 어떤 것도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대공의 탓으로 돌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딸의 아버지로 널 선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보다 무모하지 않은 남자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말이야.”

아란이 아는 대공은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자였다. 내심 화를 내며 눈을 번쩍 뜰 그를 기대하고 부추겼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도 아란은 아직 희망을 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았다. 고작 이런 병 따위에 쓰러지지 않을 것을 그녀는 믿었다.

이레가 지났다. 여전히 그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 깨어난 적이 있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인 데다, 그나마도 완전히 의식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열에 들떠 몽롱한 눈으로 뜻 모를 말을 내뱉는 그를 볼 때면 아란은 덜컥 겁이 났다. 당장이라도 사신이 그를 꾀어 데려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끝없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도 안 일어날 거야?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과 혼인할 텐데. 브린도 다른 남자의 딸이 될 텐데?”

이렇게 날 두고 가버릴 거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아란은 그의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변함없이 뜨거운 그 체온만이 그가 아직 그녀 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 * *

로아크 대공가의 후계자는 갓 소년티를 벗은 어린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스무 살이 조금 넘는 나이에 이미 여든 먹은 노인처럼 세상에 질린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외동아들에게 실수와 빈틈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가차 없는 체벌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부모의 실망이나 자괴감이 아닌 지루함이었다. 그를 감싼 세상은 삭막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그런 그에게도 연인은 있었다. 그녀는 백 년 만에 태어난 귀한 황녀이자 그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부모들이 당사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멋대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애초 결혼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오히려 그게 고맙게 여겨질 정도였다.

처음부터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분명 한때는 성가시다고 여겼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봄처럼 살며시 다가와 얼어붙은 그의 마음을 녹였다.

‘아란흐로드.’

이름을 부르면 아란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순처럼 연한 녹색 눈을 가진 그녀는 그의 차가운 무채색 세상에서 빛깔과 온기를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 몸이 달았다. 황녀가 열아홉이 되자마자 그는 한시도 더 참지 못하고 청혼했고, 아란은 흔쾌히 승낙했다.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고, 두 사람은 서로를 품었다. 매일매일 몸을 포개도 목마름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곧 아들을 낳았다. 몸이 약한 아내에게 임신과 출산이라는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아란이 너무나 원했다.

자식을 꺼렸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아란을 빼닮은 아들을 몹시 사랑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과 달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은 아들이 아닌 아란뿐이었다.

하루하루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아들을 한참 얼러도 돌아서면 도무지 그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떠올려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왜 이러는 거지?

‘왜 그래, 에녹?’

그가 인상을 쓰자 옆에 서 있던 아란이 물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하며 아란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그녀 역시 낯설었다.

머리가 차가워졌다. 비로소 모든 것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아들을 안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강보는 텅 비어있었다. 각오한 일인데도 날카로운 슬픔에 숨이 턱 막혔다.

‘에녹?’

아이가 없는데도 아란은 아무 의문도 품지 않았다. 오직 그만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말문이 막힌 채로 아란을 응시했다. 슬픔이라곤 평생 모를 것 같은 천진한 낯이었다. 그는 희고 매끈한 뺨을 한 번 쓸어보았다. 그러자 금세 홍조가 떠올랐다. 누구라도 반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이렇게 찬란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치고 음울한 눈동자에, 창백한 뺨을 가진 여자였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왜 우는 거야?’

갑자기 그가 눈물을 흘리자 아란이 놀라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태어난 적 없는 아들처럼, 그녀 역시 존재하지 않는 연인이었다.

아무리 후회한다 한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그녀는 허상일 뿐이다. 그녀와 나눈 사랑도, 아들도 전부 그저 그의 소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기적인 환상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는 사랑스러운 가짜 아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에 녹아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제가 있어야 하는 자리로. 평생 괴로움 속에 속죄하며 살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더없이 행복한 그녀의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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