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아기는 사흘 후에 눈을 떴다. 대공을 쏙 빼닮은 붉은 빛이었다. 아이와 눈을 맞춘 대공은 제 눈동자와 똑같은 빛깔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때나마 제 아이가 아니라고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간 조금 몸을 회복한 아란이 옆에서 그 얼굴을 보고는 기가 막힌 듯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샀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은근히 울분이 솟았다.
“네 얼굴을 보니까 너무 일찍 사실을 말해준 것 같아. 계속 몰랐으면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못 봐서 아쉬울 정도야.”
“…….”
“유치하게 사일러스 공에게 화풀이나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일러스를 그 꼴로 만든 건 전혀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되레 더 때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새 회복해 다시 반들반들해진 낯짝을 들고 황궁을 오가는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제 딴엔 대부랍시고 아기 선물을 챙기는 모습조차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더 화가 났다.
그때 아주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그 생각을 모르는 아란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기를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직 쪼글쪼글하고 못생겨서, 둘 중 누구를 닮았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아기들은 다 이렇게 생겼나?”
물론 자신이 낳았으니 사랑스럽긴 했지만 빨갛고 주름진 아기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예쁘거나 귀엽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조금만 지나면 살도 붙고 귀여워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황녀는 콧대가 오똑한 것이 폐하를 닮았으니 분명 사랑스러울 겁니다.”
“벌써 팔불출이라도 되려는 거야?”
아란이 뾰족하게 물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아비가 제 딸을 사랑하는 일이 싫을 리 없었다. 한때 누구보다 사랑받는 황녀였던 아란은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잘 알았다. 마냥 자애롭던 부황을 떠올리자 새삼 코끝이 찡했다. 자신도 어미로서, 모후에게 받았던 사랑을 딸에게 주리라 다짐했다.
아란은 처음으로 아기 이름을 불렀다.
“브린.”
모후의 이름을 이렇게 불러볼 순간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외로웠던 그녀에게 아기는 다시 찾아온 가족이었다.
아란은 조심스레 아기를 품에 안았다. 서로를 증오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기의 체온은 너무 애틋했다. 그 체온을 품는 순간, 아란은 한순간이나마 대공에 대한 미움을 잊었다.
아란은 용기를 내어 대공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잠시 움찔거렸으나 이내 강하게 맞잡아왔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 * *
황녀, 브린은 무럭무럭 자랐다. 빨갛던 피부는 뽀얗게 살이 올랐고, 아이다운 분내가 났다. 허공에 대고 작은 손발을 휘두르는 모습은 보는 이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이목구비는 부모를 골고루 닮아,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공의 말대로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딸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면 아란은 매번 예기치 못한 곳에서 대공의 특징을 발견하곤 했다. 붉은 눈동자나 물결 모양으로 구부러진 머리칼은 제쳐두고서라도, 날렵한 귓불이나 세로로 긴 눈매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들이 딸에게 잘 어울린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이만큼이나 대공을 닮았는데, 그와 똑같은 붉은 눈동자를 가졌는데, 그 사실에 아무런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특징들마저 어여뻐 가끔은 눈물이 핑 돌았다.
반면 대공은 브린의 얼굴에서 아란을 닮은 부분만 골라 말했다. 가마 위치가 똑같다며 그가 아이의 정수리에 연신 입을 맞출 때마다, 아란은 제 머리에도 키스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딸에게 향하는 그의 애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누구를 닮았든, 그의 말대로 브린은 사랑스러웠다.
아란은 브린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팔이 아파지려 하자 자연스레 대공에게 넘겼다. 체력이 달려 딸을 오래 안아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두 달 새에 황녀는 놀랄 만큼 통통해진 데다, 움직임도 활발하여 더 버거웠다.
그는 익숙하게 아기를 받아 안았다. 처음엔 그가 아기를 함부로, 혹 거칠게 대할까 봐 걱정했는데, 예상과 달리 아란보다도 아기를 잘 봤다. 도리어 아란이 서툴러, 그녀가 아기를 안으려고 하면 유모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브린도 자신을 낳아준 그녀보다 대공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기가 손가락을 입에 넣고 쭉쭉 빨다가 침으로 범벅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끈적한 침으로 얼굴이 엉망이 되는데도 그는 황녀를 떼어놓을 생각을 않았다.
그러나 안정되게 아기를 받친 손, 팔과 달리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브린이 옹알이를 하며 웃음 비슷한 반응이라도 내보일라치면 그 어색함은 배가 되었다. 얼핏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딸을 저어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 표정이야말로 그가 내보이는 가장 솔직한 민낯이었다.
아란은 그 얼굴을 보며 출정식을 떠올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저만 혼자인 줄도 모르고 의연하게 서 있던 그를.
그때와 지금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보는 사람의 가슴마저 시리게 만들던 고독 같은 건 이젠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상념에 잠겼을 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새삼 신기합니다.”
“뭐가?”
“어떤 얼굴일지 상상도 못 했었는데, 폐하와 제 생김새가 섞이면 이렇군요.”
그가 조금 웃으며 아란을 돌아보았다. 아기도 커다란 눈을 끔벅였다. 똑같은 빛깔의 눈동자 두 쌍이 동시에 그녀를 응시했다. 아란은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면 그녀가 사랑하는 붉은 눈이 어느 쪽인지 헷갈리곤 했다. 그건 분명 황녀에 대한 애정이 대공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일 텐데, 어째서인지 선뜻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애써 생각을 떨쳐내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곧 세례식을 할 거야.”
그 말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곳에서 사일러스 공작이 대부랍시고 으스댈 걸 생각하니 잊고 있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그러다 문득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란이 조금 한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요전에도 대공은 공작이 보내온 축하선물을 몰래 버리려다 그녀에게 들킨 전적이 있었다.
그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브린과 노는 척했다. 다시 뻗어온 아기의 끈적한 손에 기꺼이 제 얼굴을 내어주었다.
아빠의 얼굴에 침을 덕지덕지 바른 브린은 고단했는지 곧 잠들었다. 유모가 아기를 데리고 아란의 침실을 나서자, 대공이 불쑥 말했다.
“신전을 지을까 합니다.”
“왜?”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무슨 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아란이 다시 묻자 그는 웃기만 했다.
대공은 자신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그렇기에 행복해지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자신 같은 인간이 행복해지기까지 하면 너무 불공평하니까.
그렇지만 요즘은 감히 행복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불안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아란과 브린에게도 옮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마저 결국은 불행해지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선득해질 때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선행을 베풀면 여태까지 쌓은 죗값이 조금은 상쇄되지 않을까.
딸이 커갈수록 그는 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들이 좋은 부모인지 아닌지 명확히 판단하지는 못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아란은 그가 그의 부모처럼 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히려 부모와 자신의 원수인 선선대 황제의 마음에 공감했다. 아란이 태어났을 때 신전을 지었던 그의 마음을, 대공은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또한 선선대 황제가 아란을 지나치게 귀애하여 벌인 웃지 못할 이야기들을 떠올릴 때면 그의 심정이 구구절절 이해되었다. 그의 딸을 무참히 짓밟았던 게 바로 자신이면서도 말이다.
염치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진심으로 오래오래 그녀와 딸 곁에 남고 싶었다.
* * *
아란은 대공의 만류에도 더 쉬지 않고 정무에 복귀했다. 아직 회복이 다 된 건 아니지만, 그녀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황제이니 오래 쉬는 건 보기에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황제로서 성실히 임하면 장차 후계가 될 어린 딸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모든 이들이 그녀와 대공의 결합을 기뻐하는 건 아니었다. 대공이 무서워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특히 고루한 신념을 가진 귀족 중에는 황녀가 사생아와 다를 바 없다며 폄훼하는 자들이 분명 있었다.
아란은 오랜만에 황좌에 앉은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귀족들 앞에서 자세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아직 얼굴이 까칠했지만 이젠 화장으로 가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허세를 부린다고 하여 제 유약함을 감출 수 없으며, 외려 더 우스워 보이는 꼴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저들끼리 논박을 펼치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라세르 왕세손의 처분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라세르 왕가의 마지막 핏줄인 그를 처형하여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이자는 의견과, 살려두어 라세르의 여론을 가라앉히자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위태로운 마지막 왕족. 언젠가 보았던 어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란은 과거의 자신을 회상했다. 현재 라세르처럼 나라의 존폐 위기가 걸린 상황까진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지금 왕세손처럼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다. 소년이 느낄 두려움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그녀의 두 눈에 잠시 연민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도 왕족은 왕족이다. 핏줄의 죄가 곧 그의 죄였다.
“어린 소년을 처형하는 건 분명 가혹한 짓이지만, 그렇다고 죗값을 치르지 않게 할 수는 없겠지.”
무겁게 중얼거린 아란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는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문득 아란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시작부터 총괄한 것도, 승리로 이끈 것도 그였으니 이 안건은 그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그는 어찌 된 일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란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곤 그를 바라보았다. 대공은 늘 그렇듯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