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이상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라고 했었는데.
그러나 전장에서도, 돌아온 후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폐하……?”
아란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겉옷을 벗기더니 셔츠에도 손을 댔다. 대공은 갑자기 아란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당황했다.
“가만히 있어 봐.”
그녀는 무심결에 자신을 가로막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대공은 그녀가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밀치지도 못했다.
마지막 셔츠까지 벗긴 아란은 그를 돌려세워 등을 확인했다.
“어……?”
아무 흔적도 없이 매끈했다. 아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반점이 없어……?”
그녀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안 대공이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예. 수도로 돌아온 후에 약을 바꿨더니 많이 나아졌습니다.”
“정말?”
그게 그리 쉽게 낫는 병이었나? 아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가 주치의를 들였다고 한 기억이 났다. 중독을 치료할 정도로 실력 좋은 이였던 건가?
어쨌거나 증상도 사라졌고, 당사자가 멀쩡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야.”
그녀는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며칠 만에 대공저로 돌아온 대공은 피로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 위에 누웠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건너편의 창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던 짙은 녹색 커튼이 오늘따라 눈에 거슬렸다.
색을 바꿔볼까.
취향이 칙칙하다는 아란의 말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이번엔 조금 화사한 커튼이 어떨까 싶었다. 무늬도 커다랗게 들어가 있는 것으로.
무늬 없는 커튼을 들여다보던 그는 불현듯 시야가 까맣게 명멸하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몇 번 눈을 깜박이자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또…….”
근래 종종 이런 적이 있었다. 대공은 평소처럼 피곤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멈칫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제 건강을 확인하며 몇 번이고 안심한 듯 중얼거리던 목소리.
그는 마음을 바꿔 의원을 불렀다.
곧이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처음 반점을 발견했던 궁의였다. 그는 바라던 대로 궁정 의사직을 그만두었지만, 이제는 아예 대공저에 머무르며 대공의 몸을 보살피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대공을 살폈다.
“약의 부작용입니다.”
최근 그는 대공에게 처방하는 약을 바꾸었다. 아주 독한 데다 제대로 연구되지조차 않은 것이었는데, 이전 약이 더 듣지 않자 시도하게 된 처방이었다.
애초에 마물 피에 중독된 사람 숫자가 적다 보니 치료법이 너무 미흡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바꿨다. 어렵게 정답을 찾기보단, 차라리 중독되었다 나았다는 사례를 최대한 수집해 그중 괜찮은 것을 하나씩 답습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조심히 그 말을 꺼냈을 때, 대공은 곧바로 요구했다. 그 방법들을 전부 다 시도하라고.
의원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가 젊고 건강하다 한들, 효과도 입증되지 않은 방법을 마구잡이로 쓸 수는 없었다. 너무 위험했다. 의원으로서 여러 번 만류했지만 대공은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없이 그는 그것들을 필사적으로 다듬고 정리해 새 처방을 내놓았다. 다행히 잘 들어맞는지 증상이 호전되고 있었으나, 결국 부작용이 나타났다.
“일시적인 현상이라 아직은 괜찮은 듯하나, 지금처럼 독한 약을 계속 쓰시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대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시했다. 의원은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 걱정을 쏟아냈다. 대공가의 주치의가 된 후, 그는 이전보다 훨씬 대담해졌다.
“약도 지나치면 독입니다. 해독을 하려다가 중독만큼이나 부작용도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뭐든 해봐야지.”
대공은 이제 더 이상 제 몸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아란의 옆에 서 있어야 했다. 그녀의 치세 아래, 오래도록.
“살아야지.”
그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궁의는 내심 놀랐다. 매번 초연하게 굴길래 목숨에 미련이 없어 보였는데, 대공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부터 유독 적극적이었다.
막상 증상이 심각해지니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마물의 독은 환자의 의지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독한 약을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임신이 막바지에 이르자, 아란의 배는 정말로 더 부풀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올라, 요즘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보냈다.
“이렇게 배가 많이 나오면 보통 아들이라던데, 어떨까?”
아란이 팔을 펼쳐 배를 한가득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간 부쩍 살이 올라 몰라보게 통통해진 뺨이 도드라졌다. 대공은 잠시 그 얼굴을 홀린 듯이 보다가 대답했다.
“전 그냥 건강하기만 바랍니다.”
“하긴. 건강하게만 태어나주면 성별이 무슨 상관이겠어.”
대공이 제 이야기를 한 줄도 모르는 아란이 중얼거렸다.
대화가 멈춘 사이, 열어둔 창문을 타고 리시안셔스 향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란이 답답해해서 그녀의 방 창문은 거의 닫힌 적이 없었다.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면서, 아란은 자신이 그 향기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았다.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과거에 좋아했었던 것도 같다.
“꽃이 피었네.”
“그렇습니다.”
“이름이 리시안셔스였나.”
“예.”
불현듯 꽃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아란은 정원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요즘은 부축을 받아도 오래 움직이기 힘든 데다, 오늘은 특히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나중에, 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줘.”
“예.”
대공은 먹먹한 기분이 되었다. 아란이 스스로의 의지로 무언가를 제게 요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늘 아란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궁금해했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행복감이 또다시 치고 올라왔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를 보며 아란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그녀는 배 안쪽이 딱딱해지는 걸 느끼고 조금 인상을 썼다. 임신 막바지가 되며 배가 뭉치는 일이 잦았는데, 오늘은 특히 심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침부터 배가 너무…….”
“궁의를 불러올까요?”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는 아래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곧 뜨거운 액체가 다리 사이에서 울컥 흘러나와 드레스를 흥건히 적셨다. 아란은 놀라 상체를 일으켰으나, 혼자서는 한껏 부푼 배 아래를 볼 수는 없었다.
“양수가 터진 것 같아…….”
대공이 서둘러 그녀가 덮고 있던 담요를 젖혔다. 드레스가 정체 모를 액체와 피로 젖은 게 그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대공의 표정이 굳자 아란은 덜컥 겁을 먹었다.
“궁의를 부르겠습니다.”
서둘러 로지나에게 명령한 대공이 잔뜩 긴장한 아란을 껴안고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조그만 얼굴은 그새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상태였다. 그는 그 위에 입을 맞추며 초조하게 궁의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궁의가 아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산실을 꾸려야 한다고 알렸다. 예정일보다 조금 이른 출산이었다.
“무서워…….”
아란은 진정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숨이 거칠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가 생겼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으나, 막상 닥치니 겁이 났다. 그 와중에 진통이 찾아오는 주기가 점차 잦아지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습니다.”
대공은 앵무새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아란이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물었다.
“여기 있을 거지……?”
절박한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란은 떨면서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맞잡아오는 그의 손도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 * *
그날 밤이 하얗게 지나간 후, 아기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밤새 황궁의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 곁에서 황제를 지켜보는 대공부터 말단 시녀까지, 전부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난산은 아니었지만, 워낙 산모의 체력이 약한 데다 초산이라 힘들었다. 몇 시간이고 비명이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자 전부 안심했다.
“황녀 전하이십니다.”
궁의가 아란에게 아기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푹 젖은 머리카락은 예상대로 백금발이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양 주먹을 꽉 쥔 모습은 아기 역시 지난밤이 힘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는데도 체구는 절대 작지 않으시네요. 더 오래 태중에 계셨으면 폐하께서 지금보다 힘들어지실 뻔했습니다.”
“그런가…….”
다행히 아기는 건강했지만, 막상 아란은 기진맥진해 아기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다. 대신 그녀는 손을 뻗어 아기의 조그만 손을 잡았다. 그러다 힘없이 웃었다.
“아무래도 두 번은 못 하겠어.”
그 말에 대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지난밤은 그에게 다시 없을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출산 도중 아란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고, 그때마다 대공이 곁에서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면 그녀는 곧 비명을 지르며 강한 힘으로 그 손에 매달려왔다.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 때마다 대공은 무력함에 미칠 것 같았다.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아이인데, 왜 자신은 이 고통을 나눌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장을 구르며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람은 일상처럼 보아왔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울린 적도 많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런 식으로 본능만 남아 악을 쓰는 아란은 처음이었다. 너무나 끔찍했다.
그러나 그 비명마저 잦아들 때면 가슴이 선득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동요할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진통하는 내내 그는 아란이 아기와 함께 떠나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는 그녀를 수태시킨 자신을 수도 없이 저주했다. 잡은 손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은 대공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힘이 풀리며 아래로 떨어졌을 때, 대공은 제 심장까지 같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는 굳어진 채 아란만을 바라보았다.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멈춰버렸을 것이다.
살았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그녀는 살아있었다. 아기를 마주한 환희보다, 아란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대공이 누구에게인지도 모를 감사를 수없이 되뇌는 사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디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줘.”
“예.”
그는 목이 메어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아란은 안심한 표정을 짓더니, 곧 혼절하듯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