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23화 (123/146)

123화

그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아란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대공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몰래 입술을 훔치려던 그는 불현듯 배 쪽을 쳐다보았다. 아란이 숨을 쉴 때마다 확연히 커진 배가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을 느낀 아란이 잠시 웅얼거렸지만, 많이 피곤했는지 잠에서 깨지 못했다.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죽은 부모를 떠올렸다. 제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가졌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다른 사내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제 아이를 수태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기억 속 부모는 딱히 그를 방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

물론 모두가 그들 같지는 않았다. 꼴사나울 만큼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내들은 많았다. 헤스턴 공작만 해도 그랬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잘난 구석이라고는 없는 제 아들을 어찌나 자랑하는지, 헤스턴 소공작이 되레 민망해할 정도였다.

아직도 그는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란은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할 것을 명령했으나, 그는 여전히 그 아이가 기쁨이 될지, 혹은 재앙이 될지 알지 못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있었다. 아란이 고통스럽지 않게, 무사히 건강하게 나와주었으면 했다.

“안녕.”

그는 아이에게 작게 인사해보았다. 제가 듣기에도 몹시 어색했다. 누구도 방금 그 인사를 아버지가 아이에게 건네는 첫인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아란을 흡족하게 할 수 없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이번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해보았다.

“안녕, 아가야.”

거기까지 말해놓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제 행동이 몹시 겸연쩍었다. 그는 대신 아란의 배를 검지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에 대답하듯 아기가 발로 배를 가볍게 차는 게 느껴졌다. 아란이 자고 있어 다행이었다. 안다면 틀림없이 그를 비웃었을 것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란과 자신의 피가 섞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그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비로소 그는 아기가 궁금해졌다. 성별은 무엇일지, 얼굴은 누구를 더 닮았을지. 기왕이면 아란을 닮았으면 했다. 자신을 닮은 아기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깊은 곳에 뭉쳐 있던 이름 모를 것이 팍하고 터졌다. 동시에 공기가 그의 성대를 성급하게 울렸다. 귓가를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에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오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계속 이러고 싶었다는 것도.

한번 웃음이 나오자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를 들은 아란이 잠에서 깨어났다.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로 웃고 있는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배를 조심스레 두드리는 손길도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아이가 꿀렁꿀렁 움직였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다정한 순간이 낯설기도 하고 조금은 우스웠다.

꿈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녀는 대공을 똑바로 바라보려 했다. 사나운 기색이 완전히 사라진 그의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대공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웃는 낯은 여전했다.

“왜 웃어?”

“행복해서.”

그 대답을 들은 아란도 그를 따라 슬며시 웃었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평생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나 봅니다.”

“별일이네…….”

다시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아란은 억지로 눈을 뜨려 했다.

“할 일이 많은데…….”

그가 웃는 낯 그대로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괜찮으니 더 주무세요.”

아직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나긋했다. 그래서 아란은 완전히 꿈이라고 여기곤 다시 눈을 감았다. 더없이 평온한 잠이었다.

* * *

기가 막히던 오해도 풀리고, 아란은 본격적으로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범한 귀족인 것도 아니고 아기가 첫 황손임을 생각하면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간 전쟁을 치르느라, 그리고 전장으로 떠난 귀족들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미처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도 출산 경험이 있는 시녀들이 아니었다면 아예 아무 준비도 못 하고 손을 놓고 있었을 것이다. 아란은 정말 중요한 일을 제외한 나머지를 거의 대공에게 맡기고, 늦게나마 대부분의 관심을 아기에게 기울였다.

그녀가 요람 도안을 들여다보며 결정을 못 내리고 있을 때, 대공이 찾아 왔다. 그는 요즈음 매일 일이 끝나기 무섭게 찾아와 그녀의 옆을 지키곤 했다. 가장 먼저 그녀의 몸 상태를 확인한 대공은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아 도안을 함께 살펴보았다.

예상외로 그는 아이에게 무척 관심이 많았다. 지금처럼 아란이 아기방을 꾸밀 시시콜콜한 계획을 말하면 진지하게 듣고, 가끔은 몇 가지 의견을 내곤 했다.

그 과정에서 아란이 알게 된 건, 그의 취향이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것이었다. 물론 날 때부터 귀족인 데다 어릴 때 그녀의 시중을 몇 년간 들었으니 아예 몹쓸 안목은 아니지만, 아란의 마음엔 영 차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아기가 아닌 조그만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란은 그가 고른 천을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쁘진 않은데, 왜 자꾸 칙칙한 것만 고르는 거야? 아기방에 쓸 건데 조금 더 화사해도 좋잖아.”

그녀의 타박에 막 짙은 남색 비단을 집어 들던 대공이 슬쩍 그것을 내려놓고는 크림색 공단을 골랐다.

“잘못 집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 타박한 것이 무색하게, 아란이 보기에 그와 화사한 빛깔은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밝은색 옷을 입은 모습을 거의 못 봐서일지도 몰랐다.

눈에 익을 때까지 밝은 옷만 입으라고 명령해볼까.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마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란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불쑥 말했다.

“네가 전장에서 돌아온 후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들려. 알고 있어?”

“그런가요.”

대공은 덤덤히 대답했다. 그런 것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런 면에서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러나 요즘 그는 전에 없이 태도가 너그러워진 데다, 가끔은 어린 자식이 있는 귀족들에게 아이 소식을 묻기도 한다고 했다. 아란이 듣는 이야기 속 대공은 그녀가 아는 남자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러나 아기방에 걸 커튼 색을 저리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소문이 아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생길까 봐 피임까지 했었다면서, 막상 생기니 마음이 바뀐 모양이다.

“아이가 생긴 게 그렇게 좋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런 거지 그런 것 같다는 건 또 뭔지. 그래도 예전의 대공을 생각하면 너무 기꺼운 반응이었다. 아란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대공 또한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 이런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전에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있잖아.”

“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란은 먼저 운을 떼고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배 속 아이가 대공의 핏줄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귀족들은 틈만 나면 아란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대공 역시 같은 질문을 받고 있을 테니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국혼은 아이 만큼 중요한 문제였지만 한편으로는 외면하고픈 주제이기도 했다.

그를 용서하기로 했으면서도, 아직 아란은 선뜻 결혼하자는 뜻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었으므로, 일단 그의 의사를 물었다.

“사람들이 혼인에 대해 묻던데, 네 생각은 어때?”

“저는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오래 고민하고 내놓은 질문과 달리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란의 망설임을 눈치챈 그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덧붙였다.

“저를 온전히 용서해주시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이만 생각하세요. 무슨 일이든 출산 이후니까요.”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일단은 아이를 낳고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국혼은 준비 기간도 길었고, 하더라도 배가 나온 채로 결혼할 수는 없었다. 아란은 아직 시간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대공이 상대라는 걸 안 이상, 귀족들도 더 이상 국서에 대해 아무 말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그녀의 마음을 편안히 하는 데 한몫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대공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깍지를 끼자 아란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저번처럼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녀 나름의 노력이라는 걸 알기에 그는 더 욕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제 손은 주인의 의지를 거스르고 그녀의 손등을 간질이다 손목을 타고 올라갔다.

어느새 그는 동그란 어깨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묻고 있었다. 느슨하게 몸을 감싼 드레스가 벌어지며 윗부분이 흘러내렸다. 뜨거운 숨결이 맨살에 닿았다. 명백한 의도를 담은 몸짓에 아란은 눈을 깜박였다.

이제 임신도 후기에 접어들었으므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관계해선 안 된다고 궁의가 언질을 준 바 있었다. 사실 대공이 전장에서 돌아오기 전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다 이렇게…….

아란은 멍하니 그의 입술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러고 있으니 그와의 관계가 들킬까 봐 두려워했던 과거가 거짓말 같았다. 그녀는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드러난 어깨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살짝 시선을 올리자 눈이 마주쳤다.

그 붉은 눈동자가 두려워 감히 마주할 생각도 못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 다르게, 이제 먼저 시선을 피하는 쪽은 그가 되었다. 아란은 그를 다루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폐하…….”

그녀는 새삼 대공을 바라보았다. 제 사감과는 별개로, 그는 누가 보더라도 국서 후보로 손색이 없었다. 성격은 조금, 아니, 사실 많이 이상하지만,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권력도 있고, 건강하다. 그 외에 어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의 병은 어떻게 된 거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