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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122화 (122/146)

122화

아란은 울먹이는 것을 잊고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얼핏 누그러진 듯한 낯을 본 그는 그녀가 안심했다고 여겼는지, 다가와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아무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란은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화를 내봐야 의미가 없으니 그럴 의지조차 사라졌다.

그는 너무나 서툴고, 여전히 감정을 몰랐다. 그래서 타인을 상처 입히는 만큼 제게 상처를 내는 것도 서슴없었다.

“……나는, 이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증오스럽고, 그만큼 가여워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대공이 눈을 깜박였다. 아란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즉위하고 1년간, 나는 꼭 감옥에 갇힌 것 같았지. 너는 나를 고문하는 고문 기술자이고. ”

갑작스러운 고백에 대공이 주춤 몸을 떨었다. 아란이 결코 말하지 않으려 했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의 과오가 지금, 사형선고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전부 체념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매 순간 복수를 꿈꿨어.”

휘둘리고, 억눌리고, 겁먹었던 날들. 아란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네 마음을 알았을 때, 그게 너무 역겨우면서도 기뻤어. 드디어 네 소중한 것을 전부 빼앗을 기회가 왔으니까. 그런데 알면 알수록 너는 가진 게 없더라.”

목소리가 떨렸다. 가진 게 없는 건 아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에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어떤 것에도 애정을 두지 않으니 빼앗고 괴롭혀봤자 허무하기만 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도 무심해 죽음도 개의치 않았다. 되레 그 황량한 삶을 엿보게 된 아란만 당황스럽고 괴로웠다.

“안 그래도 미운데, 매번 더 미워할 거리를 주는데도, 그래서 마음껏 미워할 수가 없어. 널 미워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아란이 울기 시작했다. 대공이 어쩔 줄 모르며 그녀를 껴안았다.

“폐하…….”

“너도, 로지나도, 사일러스 공도 아이가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싫어. 나는 건강하지도 못하고 머리도 나쁘니까.”

“왜 그런 말씀을…….”

“그런데 널 닮으면, 머리가 더 나쁠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침통하게 들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대공은 너무 놀라 위로의 말을 잊었다.

“제 자식도 못 알아보는 아비를 닮는다면 얼마나 멍청하겠어. 제국의 미래가 걱정되려고 그래.”

아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2대째 혼군이 즉위하면 안 되는데…….

그녀의 걱정에도 대공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찻물을 뒤집어써도 잘생긴 얼굴은 여전했지만, 얼빠진 표정은 낯설었다. 속눈썹에 맺혔던 찻물이 눈물처럼 굴러떨어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가 더듬대며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폐하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네 핏줄이야. 너와, 나의.”

“그럼 사일러스 공작은…….”

“도대체 이런 설명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냥 신하야. 나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고. 소문은 다 거짓말이야.”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또렷한 목소리였다. 대공은 순간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꿈결처럼 황홀했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만큼은 끝내 숨기고 싶었던 제 추악한 욕심이 낱낱이 까발려진 것 같아 부끄러웠다.

대공은 밀려오는 양가감정에 몸을 떨다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란이 화가 난 진짜 이유도.

순식간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신은 어리석게도 또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는 아란을 믿었어야 했다. 그를 괴롭히던 온갖 추문과, 수태를 알리던 아란의 서신을 떠올렸다. 신뢰가 있었다면 그 한 줄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폐하, 제가…….”

그는 차마 용서를 빌지도 못했다. 그저 몹시 불안한 눈으로 아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고민 많이 했어. 너무 화가 나서 끝까지 말 안 해주고 싶었거든. 그렇지만, 네가 날 못 믿는 게 온전히 네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 이런 결과를 예상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란이 크게 한숨을 쉬며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그러자 뒤이어 긴 손가락이 따라붙어 남은 눈물을 훔쳤다. 눈물보다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아란은 어렵게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는 점점 자라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그녀는 이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아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맞닥뜨렸어야 할 문제였다.

버릴 수도 없고 미워할 수도 없다면, 남은 것은 용서하는 것뿐인데.

그러나 그녀는 망설였다. 도무지 그를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 용서는 가장 용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용기 내지 못한 용서는 무력한 체념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하려는 건 체념일까, 아니면 용서일까?

모르는 새에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피 맛이 났다. 그녀가 자해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두꺼운 엄지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너는 내가 밉지 않아?”

아란이 물었다. 입안을 파고든 손가락 때문에 발음이 뭉개져 우스웠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전혀.”

아란은 그가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의 아이라고 믿으면서도 결국엔 억지로 아이를 받아들인 것처럼, 그녀에 대한 증오를 보이지 않게 묻어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보이지 않으니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 건 아닌지.

그러나, 그것은 아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녀가 거짓말을 해야 할 차례인 것 같았다.

울기 싫은데 눈물이 자꾸만 넘쳐흘렀다. 의연한 용서 같은 건 결국 그녀의 몫이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아란이 더 울기 시작하자 대공이 허둥거렸다.

“울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잘못을 빌어도 아란은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대공이 자신을 오해해서 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난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영혼을 갉아내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또렷했다. 혈육으로 얽힌 원한과 그가 지금껏 지은 죄가 너무 깊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그는 지금처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영원히 눈을 감고 허공을 헤맬 것만 같았다. 그녀는 냉소적인 척하지만 때때로 서툰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소년을 기억했다.

아란은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자신을 망치는 것 외에는 괴로움을 이길 방법을 몰랐을 그 소년에게, 아란은 마침내 손을 내밀기로 했다.

“에녹.”

눈가를 문지르던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아란은 끝까지 주저하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안 될지도 몰라.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너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보려고 해.”

거짓말을 내뱉는 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현실보다는 훨씬 참을만했다.

아란은 제 뺨을 감싼 그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대공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이었다.

“왜 대답 안 해? 용서받기 싫어?”

“아뇨, 아닙니다. 다만…….”

그가 혼란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아란은 그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가진 거라곤 의심뿐이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말을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이다. 아란은 그것을 알면서도 더 확신을 주지는 않았다. 이만큼 기회를 주었으니 받아들이는 건 그의 몫이었다. 용서보다 그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이 있었다. 그와 그녀가 함께 살아갈 미래가.

아란은 그의 손에 겹쳤던 제 손을 놓았다. 이제 용건은 끝났으니 침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대공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할 말이 남았어?”

내내 울고 있었던 것을 믿을 수 없이 침착한 목소리였다. 일단 잡아두긴 했지만 대공은 말문이 막혔다.

늘 꿈꾸던 상황이 드디어 왔는데도, 환희보다 걱정이 앞섰다. 실은 조금도 믿기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꿈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그러면, 그 후에 찾아올 허망함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는 제 손안에 갇힌 온기를 더 간절히 움켜쥐었다.

아란이 한숨을 쉬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어. 사실 지금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어.”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알면 너도 이제는 그 망나니 같은 성격 좀 바꿔봐. 아이에게만큼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되어야지.”

“……예.”

반드시 그러겠다고 다짐하며 대답했건만, 아란은 그를 못 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예.”

“그럼 먼저 사일러스 공에게 사과해. 정말 그에겐 내가 들 낯이 없어.”

“사일러스…….”

이 상황에서도 아란이 그를 거론하는 게 싫어서, 대공은 아주 조금 인상을 썼다. 아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왜? 싫어?”

“아닙니다.”

정말로 내키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사일러스에게 사과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그리했을 것이다.

그는 이번이 아란이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놓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 * *

“내가 오해했습니다. 사과합니다.”

갑작스레 공작저를 찾아온 대공이 대뜸 사과의 말을 꺼내자 사일러스 공작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직도 얼굴에 멍이 빠지지 않은 데다 거동이 불편해 외출도 못 하고 있었다.

대공은 내심 흐뭇하게 엉망이 된 그를 훑었다. 지금껏 본 사일러스 공작의 얼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사과를 하러 온 처지이므로,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다친 곳은 괜찮습니까?”

“지금 사람 놀리십니까?”

사일러스 공작이 기막힌 어조로 물었다.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말하는 목소리가 쌩쌩한 걸 보니 얼추 나았나 봅니다.”

“전하께서는 늘 그렇듯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그 회복력이 아주 부럽습니다.”

“아무튼, 폐하께서 여쭈시거든 내가 사과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십시오.”

“참나…….”

누가 봐도 황제가 시켜서 마지못해 온 티가 역력해, 사일러스 공작은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려던 대공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공의 잘못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요. 그런 더러운 소문이 돌 동안 대체 뭘 하고 있던 겁니까?”

그의 질책에 사일러스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그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나는 분명히 사과했습니다.”

그는 일방적인 사과만 남긴 채, 사일러스 공작이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다시 말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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