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무슨 오해요?”
“그 헛소문들…….”
“예? 그게 정말인가요?”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지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을 끔벅거리던 그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서둘러 물었다.
“그럼, 지금 모습은 대공 전하께서 그러신 건가요?”
“그래.”
“아니, 물론 그분 성격에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해인 걸 말씀드렸으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요?”
공작은 입을 다물었고, 로지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다나르에서부터 황제와 사일러스 공작을 보아온 그녀는 진작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는 상태였다.
설마 질투 같은 하찮은 감정으로 심술을 부린 건 아니겠지? 대공은 못 믿어도 사일러스 공작은 나름대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로지나는 불안을 누르며 물었다.
“설마, 말씀 안 하신 건 아니시죠?”
“…….”
공작은 뜨끔한 표정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머저리들!
그녀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사내들이란 원래 이리 한심한 존재들인 건지. 두 사람의 생각 따위야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만,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을 생각하면 참담했다.
그런 그녀에게 사일러스 공작이 뒤늦게 한마디 더 보탰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큼 일방적으로 당한 건 아니야.”
제 변명이 민망한 줄은 아는지, 공작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로지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거운 마음으로 황궁으로 돌아오자, 아무것도 모르는 아란은 사일러스 공작의 안부부터 물었다.
“왔구나. 공작의 상태는 어떻더냐?”
“저, 폐하……. 외람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몹시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에 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지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에게 더듬더듬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알렸다.
분명 대로하거나 슬퍼할 줄 알았던 황제가 말이 없자, 로지나는 힐끗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황제의 낯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 가볍게 한숨을 쉰 아란이 조용히 명령했다.
“전해주어 고맙구나. 그럼 이만 가보렴.”
이번만큼은 자신이 황제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로지나는 그녀의 심기가 더 어지러워지기 전에 조용히 물러났다.
* * *
대공은 최근 아란이 자신을 피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아이를 인정한 후 눈에 띄게 누그러졌던 태도가 다시 냉랭하게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공은 우선 그녀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수태한 여자는 원래 감정을 조절하는 게 힘들다고 들었으니 일시적인 변덕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실제로 아란은 임신 전보다 감정 변화가 잦기도 했다.
대신 그는 아이에게 더 다정한 태도를 보이려 애썼으나, 그때마다 아란은 더욱 표정이 굳어지더니 그를 쫓아 보냈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침실 출입을 금지당하고 말았다. 외면이 심해진 건 그 후였다. 이제는 낮이라 해서 그런 태도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요즘 그는 임신한 그녀 대신 전후 처리에 대한 일을 거의 전부 떠맡았는데, 보고를 올릴 때가 아니면 아란은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로지나를 불러내 추궁하려 해도 아란이 곁에 끼고 도는 바람에 따로 불러낼 틈이 없었다.
얄팍한 인내심은 며칠 안 가 바닥나고 말았다. 다른 때도 아니고, 아이를 가져 가장 취약한 상태인 그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건 몹시 속이 타는 일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요 며칠간 그랬듯, 보고가 끝나자마자 냉정하게 그를 물리려는 아란에게 그가 말했다. 아란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했다.
“말하게.”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
그녀가 녹색 눈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감한 시선이 며칠 새 다시 거칠어진 얼굴에서 멈췄다. 대공이 그녀를 알현하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대공은 그 눈빛에서 그녀의 기분을 유추하려 했으나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좋소. 마침 짐도 공에게 할 말이 있으니 따로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청이 받아들여진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도려내진 것처럼 허전했다. 분명 아란은 그의 앞에 있었으나 아득히 멀게만 보였다.
흔쾌히 청을 수락한 것과 달리, 그녀는 며칠이 더 지나서야 그를 불렀다.
해가 지고 나서 황제의 서재에 든 건 드문 일이라 새삼 낯설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아란이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 역시 서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앞에 놓인 찻잔엔 아직 김이 나오고 있었다.
“차 마시겠어?”
“괜찮습니다.”
그러자 아란은 더 권하지 않았다. 그리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먼저 말하라는 뜻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대공이 입을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아.”
아란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실은 아이가 자라면서 소화가 잘 안 됐지만, 그에게는 그런 불평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아이의 상태도 궁금합니다.”
“궁의 말로는 아주 건강하다던데. 그리고?”
날 선 목소리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하고 싶은 말이야 아주 많았다. 가장 먼저, 요즘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반응을 보니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법한 말을 고르는 건 어려웠다. 그가 망설이자 아란이 코웃음을 쳤다.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뭐, 좋아. 나도 마침 아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
“말씀하십시오.”
“네가 없는 동안 사일러스 공작에게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어.”
“그러셨습니까.”
대부라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아이와 얽히는 게 몹시 불쾌했다. 역시 죽일 걸 그랬나 보다. 대공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아란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은 차디찼다.
“괜찮겠어?”
“예.”
“어째서? 그를 싫어했잖아.”
“사일러스 공은 지체 높고 폐하의 신……임을 얻고 있으니 그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임?”
무엇이 그리 웃긴지, 아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대공은 영문을 모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적막한 서재를 울리는 웃음이 날카로웠다.
“그런데 그를 왜 그런 꼴로 만들어 놓았어? 로지나의 표현을 빌리자니, 아주 곤죽이 되었다던데.”
대공의 낯이 굳었다. 그가 마땅한 변명거리를 떠올리기 전에, 아란이 재차 물었다.
“내 신임을 받는 그를 놔둘 수가 없었어? 나를 사랑하니까?”
“저는 그런……,”
“나를 너무 사랑해서, 사일러스 공의 아이까지는 보듬어주려고 했니?”
“…….”
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이제 그녀는 어깨까지 떨면서 웃고 있었다. 대공은 마음이 스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늘 아란이 웃길 바랐지만 이런 걸 원하지는 않았다.
“정말인가 보네. 너무 대단한 사랑을 받아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야.”
웃음을 참느라 아란이 끅끅거리며 말했다. 대공은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제 아이입니다.”
“거짓말하지 마!”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그녀가 매섭게 외쳤다.
“날 언제까지 바보 취급할 거야? 솔직히 대답해. 왜 의심하는 거야?”
아란은 속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와 뒤엉켜 있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단순히 아이를 원치 않아 냉랭한 줄만 알고 마음 졸였던 날들이 허망했다.
대공은 거짓을 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란이 모든 전말을 알아낸 게 분명했다. 사일러스의 입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는 이곳을 나가자마자 그에게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당장은 아란에게 대답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피임을 했었습니다.”
그 말에 아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 어조로 되물었다.
“뭐라고?”
“지금껏 폐하와 밤을 보내며 피임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능성이…….”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뜨끈한 찻물이 얼굴에 쏟아졌다. 그는 얼굴과 머리칼을 적신 찻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란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찻잔을 쥔 손이 분노로 떨렸다.
“피임을 했다고?”
사납게 외치던 아란은 돌연 배가 뭉치는 느낌에 얼굴을 찌푸리며 복부를 감싸 쥐었다. 빈 찻잔이 떨어져 카펫 위를 굴렀다. 놀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아란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다가오지 마!”
그리고는 양손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쌌다. 대공은 차마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란은 계속 얼굴을 가린 채로 말했다.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널 찾아갔는지 너는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그런데 너는 날 가지고 놀았구나.”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폐하께서는 몸이 약하시니 임신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대공은 서둘러 변명했다. 아란을 달래주고 싶어 애가 달았다.
“하.”
아란이 힘없이 웃었다.
“그래. 애초에 넌 아이를 원치 않았지. 이해는 안 되지만 나를 위해 그랬다고 치자. 무슨 마음으로 네 자식이라고 공표했어?”
“폐하께서 바라셨으니까요.”
“네 아이가 아닌데도?”
“폐하께서 낳은 아이라면, 누구의 핏줄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아란은 금세 그 사실을 눈치챘다. 정말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면 사일러스 공작에게 찾아가 그 행패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아란은 여전히 그녀를 기만하려 드는 그를 비난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대공이 먼저 말했다.
“이미 공표했으니 부정할 수 없는 제 아이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치고는 완고한 태도였다. 눈동자도, 목소리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넌 그걸로 만족해?”
“폐하께서 저를 아이의 아버지로 원하시니, 이보다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아란은 그가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거짓말에 스스로 완벽히 속아 넘어갔다는 것도.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을 닮지 않을 아이를 키우며, 평생 괴롭더라도 좋다고 한다. 오로지 제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 하나로 만족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