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20화 (120/146)

120화

대공은 서운하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렇게 몸이라도 열어준 게 어디냐며. 그렇다면 그것만이라도 더 온전히 가지고 싶었다. 그는 아란의 쾌락을 최대치로 끌어내려 노력했다.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달콤한 신음이라도 듣고 싶었다. 느리게 성기를 꽂아 넣으며 손으로 음핵을 굴리자 그녀가 어쩔 줄 몰랐다.

“아흣, 아, 안, 흐…….”

그녀는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강렬한 쾌감이 그녀의 온몸을 관통했다.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과 함께 전신이 경련하며 아래에서 애액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제 것을 세게 쥐어짜는 내부를 느끼며 자신도 한계가 왔음을 느꼈다. 더 참을 수도 있었지만 이 이상 하는 건 아란이 걱정되어 내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옥죄는 몸을 끌어안고 그는 정액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마침내 사정이 끝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땀투성이였다. 특히 대공은 평소보다 몇 배로 인내하느라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 붕대 안에 땀이 배어 상처가 따가운데도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삼키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부른 배 때문에 몸을 밀착시킬 수는 없었지만 나른한 쾌락이 남은 얼굴을 보자 아쉬움이 덜어졌다.

대공은 제법 다정한 아버지인 척, 다정하게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미세한 태동이 느껴졌다. 같은 것을 느꼈는지 아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 얼굴을 계속 볼 수만 있다면 그는 이런 거짓말쯤은 얼마든 할 수 있었다.

“폐하를 닮아야 하는데요.”

아무도 친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게 그녀만 닮았으면 했다.

아란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감았다. 그는 그대로 누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느새 그녀는 작게 코까지 골며 깊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는 제 품 안의 몸을 거듭 쓰다듬다 가슴 윗부분을 아주 살짝 깨물었다. 아란이 잠결에 불만스럽게 웅얼거렸다.

반쪽이라도 그는 행복했다. 아란을 생각하면 불행해야 하는데, 그녀가 바라는 대로 되고 싶은데,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 * *

연회가 끝나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회의에 참석한 아란은 다나르로 간 줄만 알았던 사일러스 공작이 변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일러스 공이 다쳤다고?”

급작스러운 안부에 아란이 믿기지 않는 어조로 되물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해사한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작의 소식을 전한 비에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나르로 돌아가려 말에 올랐다 낙마했답니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낙마라니? 그 사람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아니, 아니지. 상태는 어떻다던가?”

아란은 너무 놀라서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다.

“부상이 상당하지만 다행히 목숨엔 지장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기수인 그가 어쩌다 말에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나르로 가지 못하고 수도에 남은 것을 보니 심각한 모양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문득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순간일 뿐이었다. 이내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 진심으로 유감이군요.”

그가 짧게 소감을 말했다.

* * *

사일러스 공작의 사고를 들은 이후, 그녀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하는데도, 부모를 허망하게 잃은 경험 때문인지 그녀의 걱정은 약간 과한 감이 있었다. 그 모습에 대공은 속이 뒤틀렸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내색하지 못했다.

“뼈만 몇 군데 부러졌을 뿐, 무사하다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래. 떨어지며 말발굽에 걷어차이지 않은 게 다행이야.”

“예. 말이 폐하의 마음을 헤아려 그를 살려주었나 봅니다.”

평범한 위로이지만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들려 아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돌아본 대공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폐하께선 부디 폐하와 아이만 걱정하세요.”

아란이 조금 진정된 것 같자 그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폐하의 시녀가 보이지 않는군요.”

“로지나를 말하는 거야?”

“예.”

“그 아이는 심부름을 보냈어.”

제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아란의 임신 사실을 숨긴 로지나에게 벌을 내리려던 대공은 잠시 낯을 굳혔으나, 곧 표정을 풀었다. 시녀 한 명 벌주는 것쯤은 언제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내 관심을 지우고, 아란에게 집중했다.

한편, 로지나는 아란의 명령대로 공작의 저택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 아란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직접 사일러스 공작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나 부상이 심하여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는 그녀의 방문을 거절했다. 그러나 걱정을 참지 못한 아란은 끝내 로지나 손에 선물과 약을 들려 보냈다.

느닷없이 황제의 시녀가 방문하자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상이 그렇게 심한가?

로지나는 재빨리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 각하를 불편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폐하의 하사품만 전달해드리고 얼른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가 좀처럼 풀리지 않자 로지나는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환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보낸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무시하는 처사에 기분이 몹시 상한 로지나는 웃음을 거두고 엄격한 낯으로 그들을 꾸짖으려 했다.

그 때,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 그녀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각하?”

분명 골절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들었는데, 로지나를 마주 보고 있는 사일러스 공작은 분명 두 발로 멀쩡하게 서 있었다. 왼쪽 어깨엔 붕대가 두껍게 감긴 채였다.

그러나 로지나는 공작의 얼굴을 보느라 어깨 같은 건 신경도 쓰지 못했다. 평소의 미끈한 외모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오른 데다 온통 멍투성이였다. 로지나는 의학 지식은 없었지만, 누가 보아도 지금 그의 모습이 낙마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한 꼴이었다.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단 괜찮아 보이시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로지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비록 그의 꼴은 엉망이었지만, 골절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아 보였다.

“내내 침대 신세였다가, 오늘 아침에 겨우 일어났다네.”

“며칠 만에 부러진 뼈가 붙다니, 치유력이 대단하신데요.”

그녀의 물음에 공작은 낭패한 얼굴로 웃었다. 수상쩍은 모습을 본 로지나의 눈이 샐쭉해졌다.

“제가 들었던 것과 실제 각하의 상태가 다른데, 제가 폐하께 이대로 보고를 올려도 될까요? 어째서 소식이 와전되었을까요?”

어설프게 변명했다간 지금 제가 본 것을 전부 일러바치겠다는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 공작의 난처한 웃음이 한층 짙어졌다.

그는 그날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대공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의 목을 관통하려던 검은 대신 왼쪽 어깨에 박혔다. 푸욱, 하는 소리가 나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고통에 몸을 떠는 그를 보면서도 대공은 더 힘을 주어 검을 내리눌렀다. 천천히 체중이 실리며 대공의 몸이 가까워졌다.

언젠가처럼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대공이 끔찍이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을 감히 욕심내지 않겠다고 말해.’

‘크윽… 윽…….’

재촉하듯 대공이 칼자루를 비틀었다. 공작은 신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욕심…… 없이, 저는, 원래 폐하의 신하로……’

아팠다.

어깨가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충성스런 신하 그 이상은 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아란이 매일같이 전쟁에 나간 대공을 생각하며 아이를 키워가는 모습을 볼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틀어졌던 걸까. 오래전 그가 그녀에게 거짓 섞인 충심을 고백했을 때부터?

깨닫게 된 이상 이대로 서서히, 조용히 죽여갈 마음이었는데. 그의 연적은 적이라 생각한 상대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다. 무자비하게 짓밟고 뜯어냈다.

어깨를 파고들던 칼날이 사라졌다. 필사적으로 올려다본 대공의 눈은 어느덧 이지를 되찾아 번쩍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정신일 때조차 그는 자신의 목을 베고 싶어 했다. 다만 그 감정을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너는 이후로 아이의 친권을 주장할 수 없다. 살아서, 아이를 빼앗기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

친권 따위는 애초에 없는데. 멍청한 작자 같으니.

피가 울컥울컥 흘러 바닥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공작은 다짐했다. 그의 충성은 아란과, 그녀의 아이에게 바치겠노라고.

특히 아이에게는 충심을 다해, 친부보다도 자신을 더 따르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럼 정말로 아이를 빼앗기는 쪽이 누구일지, 언젠가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자, 걱정되었는지 수행원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대공은 태연히 검을 검집에 넣어 갈무리했다.

‘저와 제 수행원들을 살려두신다면, 오늘 일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게 될 텐데요.’

‘아예 가문이 몰살당하길 바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말을 남긴 대공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널브러진 제 모습을 호위에게 발견 당한 건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공작은 그때를 회상하며 버릇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려다, 검에 찔린 곳에 화끈한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썼다.

그가 대공의 만행을 비밀에 부친 건 협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공이 오해하게 된 건 자신의 질투가 한몫한 데다, 역설적이게도 아란이 저를 아낀다는 사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게다가 검집을 든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맞아 앓아눕게 된 걸 떠들어봤자 본인만 우스워질 뿐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건방지게 황제의 방문을 거절한 신하를 위해 시녀까지 보낸 아란을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치졸한 질투 따위로 묻어두기엔 너무 큰 문제였다. 신하 된 자로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말해야 하는 게 맞았다. 대공의 협박 따윈 두렵지도 않았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니 오해가 풀리는 순간 무색해질 터였다.

대공이 이대로 오해하여 속을 끓이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결정하는 건 아란의 몫이어야 했다. 부디 그녀가 충격을 적게 받길 바라며,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계시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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