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대공이 공식적으로 아이를 인정하고 난 후, 아란은 임신을 핑계로 더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가봤자 피곤한 일만 생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귀족들은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황제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자들의 핏줄이었다. 성별이 무엇이든, 무사히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보다 강한 권력을 쥔 후계가 될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 충격이 더 컸다.
특히 황제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던 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감히 그의 아이를 두고 떠들어댄 자들을 대공이 가만히 놓아둘 리 없었다. 그들은 더러운 소문을 흘리며 낄낄대던 게 언제였냐는 듯, 구차한 변명을 생각해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더구나 황제를 대하던 대공의 반응을 보니 국혼이 거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대체 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런 관계였는지, 사람들은 그 모든 과정을 끝도 없이 추측하고 떠들어댔다. 그 사이에 ‘그럼 사일러스 공작은 대체 뭐였냐’는 식의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워낙 국혼이 큰일이기도 하고, 다들 제 앞날을 고민하느라 그대로 묻혀버렸다.
* * *
연회 마지막 날, 막 선잠이 들었던 아란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찾아올 자는 뻔했다. 그녀는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손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키가 대단히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눈을 비비며 묻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대공이 한쪽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었다. 어딘지 심술궂으면서, 자조적으로 보이기도 한 미소였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짙은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술 냄새 나.”
입덧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앞에서 토했을지도 몰랐다. 아란이 질색하자 대공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조금밖에 안 마셨는데.”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이 곧장 쫓아내려 하는데 그가 돌연 그녀를 껴안았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뱉어졌다. 보드라운 뺨과 목에 제 코와 입술을 비비며 그가 속삭였다.
“폐하.”
“응?”
“아란.”
“…….”
놀랍게도, 그는 정말 취한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술에 취해 굴렀다더니, 오늘은 아예 만취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 모양이다. 느슨하게 풀어진 대공은 많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냥 그녀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린 아란이 그를 밀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
“취했으면 시종에게 방을 내어달라고 하거나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지, 이렇게 찾아와 어쩌자는 거야.”
“보고 싶어서.”
아란은 기가 막혀 그를 쏘아보다 물었다.
“술은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귀찮은 질문들을 하기에, 대답 대신 술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아란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누가,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그는 그녀를 안은 그대로 은근슬쩍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란은 그에게 떠밀려 뒷걸음질 쳤다. 대공 너머로 로지나가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으나,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둘만 남게 되자 그는 더 거침없었다. 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아란은 연신 휘청였다.
그녀가 균형을 잃고 뒤뚱거릴 때마다 그가 재빨리 잡아주었기에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취한 주제에 그는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란은 결국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본 그가 물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그래. 매번 이런 식으로 찾아오고……. 민폐인 줄 알기나 해?”
그는 또 씩 웃더니, 대답은 안 하고 침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 못 보던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뭡니까?”
그가 협탁 위에 올려진 유리병을 들고 물었다. 살이 트는 것을 막아주는 향유였는데, 아까 로지나가 발라준 후 깜박 두고 간 모양이었다. 그가 코에 병을 대고 냄새를 맡았다. 향유라고는 하지만 정작 향은 아주 은은해 거의 맡아지지 않았다.
“피부가 트지 말라고 바르는 거야. 이미 배는 텄지만.”
진작 받아들인 일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새삼 속상해서 아란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발라드리겠습니다.”
“공이?”
“이런 건 보통 남편이 해주는 일이니까요.”
아란은 어처구니없이 그를 바라보다 툭 쏘아붙였다.
“그렇지만 공은 내 남편이 아니잖아.”
그 말에 대공이 일순 움찔했다.
“그래도 못할 건 없지 않나요. 전 아빠니까, 제가 발라주면 아이도 절 더 익숙하게 느낄 겁니다.”
주춤거린 것과 달리, 취객은 끈질겼다. 의도도 사뭇 의심스러웠다. 그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에 향유를 쏟아부었다. 아란은 기가 막혀 입을 살짝 벌렸다가, 그가 미끄러운 손으로 여기저기 만지기 전에 네글리제를 걷어 배를 보여주었다. 어쨌거나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닌 데다 안 그래도 배가 다시 가려워진 참이었다.
“배를 세게 누르면 안 돼.”
“예.”
온순하게 대답한 그는 시키는 대로 기름이 제 손의 온기로 데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배에 갖다 댔다. 그의 손은 크고 거칠어서, 로지나가 발라줄 때와는 느낌도 기분도 사뭇 달랐다. 아란은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딸인지 아들인지 궁금하지 않아?”
그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 초기 아란이 그랬듯 그는 이제 막 아이의 존재를 인정했을 뿐이어서, 성별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은 금방 나왔다.
“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란이 설핏 웃었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네. 로지나도 그렇고……. 참, 이름은 내가 알아서 정했어. 혹시 생각해 둔 게 있다면 말해.”
“저는 뭐든.”
그 대답에서 아란은 아직 그가 아이에게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도 처음 차갑던 반응에 비하면 며칠 만에 놀랍도록 다정해진 것이라 서운한 마음도 없었다. 조금 더 기다리면 정이 들겠거니 했다.
성급히 침실에 들어섰던 것과 달리, 그는 부드럽게 배와 옆구리, 아랫배까지 천천히 향유를 펴 발랐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향유가 촉촉하게 배어들었다. 서툴지만 묘하게 안정되는 느낌에 아란은 내심 당황스러웠다.
얼추 다 발라졌다고 생각되자마자 그녀는 후다닥 옷자락을 내렸다. 배가 천 아래로 사라지자 그가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다 됐어. 그럼 이제 가 봐.”
“아직 덜 발라진 것 같습니다. 배만 부푼 게 아니니까요.”
그가 어디를 말하는지 깨달은 아란이 당황과 수치로 낯을 붉혔다. 가슴이…… 팽팽해진 것은 맞았으나, 그걸 눈치챘을 줄이야. 아기를 위하는 척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역시 그를 믿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임부나 희롱하는, 다시 없을 무뢰배 같았다. 저 손에 몸을 맡기느니 차라리 살이 트게 놔두는 게 나았다.
아란이 그를 쫓아내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재빠르게 다가온 그가 그대로 입 맞추며 한 손으로 어깨와 쇄골을 치댔다. 맞닿은 입술에서 술 냄새가 훅 끼쳐 아란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새 네글리제가 흘러내려 가슴 둔덕이 드러났다. 옷을 추스르려 하자, 그가 갈급하게 속삭였다.
“아……, 제발 허락해 주세요.”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질 수 있을 텐데도, 그의 손은 차마 가슴을 움켜쥐지 못하고 그 위만 배회하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이 성마르게 그녀의 턱과 뺨, 귓불을 가볍게 물고 빨았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면 안 돼. 아기가 있잖아.”
안정기에 접어든 지는 꽤 되었지만, 그녀는 아이에게 해가 될 것 같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리가 가게 하지 않을 테니까…….”
목덜미에 파묻혔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를 피해 상체를 뒤로 빼던 아란이 그대로 쓰러지려 하자, 그가 서둘러 목 뒤를 잡았다. 네글리제는 이제 허리까지 흘러내린 채였다. 그는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부푼 가슴을, 크기와 색이 변한 유두를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너무 예뻐.”
벌써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어쩌면 저런 말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애가 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란은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그가 날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두려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권력을 전부 빼앗긴 한낱 종이었다. 언제든 비난하고 모욕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려 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란흐로드.”
“…….”
“대답해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것이 맞나요?”
그가 물었다. 아란은 달싹이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지금 그의 행동은 단순한 성욕이라고 치부하기엔 부족했다.
“아직 제가 필요하십니까?”
아란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재촉했다. 그녀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안심한 듯 웃었다.
“그렇다면 안아주세요.”
조심스러웠지만 절실했고, 무언가를 너무 간절하게 확인하고 싶은 의지마저 느껴졌다. 불안하고 두려운 나머지 이렇게 취기를 빌어 매달리고 있을 정도로.
무엇이 그를 이리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몰랐지만, 그 갈망에 그녀의 마음마저 일순 흔들렸다. 어쨌거나 그는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었으므로 마음이 너그러워진 이유도 있었다.
그녀의 망설임을 느낀 것처럼 그가 얼굴을 더 내렸다. 메마른 입술이 유두를 아주 살짝 스쳤다. 어쩌면 숨결이 닿은 것뿐일지도 몰랐다.
“으…….”
그러나 아란의 반응은 확연했다. 임신 초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예민한 곳이라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쾌락에서 나온 반응이 아님을 깨달은 그가 얼른 입술을 뗐다. 그러나 내쉬는 한숨은 뜨거웠고, 정염은 여전했다.
아란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가 언젠가 이런 것을 요구할 줄은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예상보다 훨씬 난처했다. 그녀야 제 몸이고, 아이를 사랑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는 어떻게 이렇게 배가 나온 여자와 그럴 생각이 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건, 자신을 향한 그의 욕망이 아주 싫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변한 몸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내내 공허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아란은 천천히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픈 건 싫어. 난폭하게 구는 것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가슴을 한입 가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