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공작은 몰아치는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도 급급했다.
팔. 다리. 어깨.
묵직한 검집이 그의 몸을 연달아 강타했다. 시간이 흐르며 공작은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그의 몸에서 맞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보지 않아도 온몸에 멍이 들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검집을 무기로 선택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대공은 우아한 결투보다는 그냥 자신을 때리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마치 시정잡배들처럼.
그러나 공작도 나름 방어한 탓에 대공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늘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아픈 기색이 없었다. 그 사실을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건, 지금껏 대공은 진심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실력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격차가 확연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하늘이 파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공작은 곧 승부가 나리라는 걸 예감했다.
대공이 검집을 크게 휘둘렀다. 지친 공작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맞은 것이 실제 검이었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것이다.
대공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가 놓친 검을 주워들었다.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공작은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 이 순간을 꿈꿔 왔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부로 네 자식은 내 자식이 될 거다. 나는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면 아이는 네 존재조차 모르고 자라나 영원히 나를 아비라고 믿을 테지.”
이제는 형식적인 존대마저 집어치운 대공이 어딘지 들뜬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그는 사일러스 공작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뒹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도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리고 뒤이어 내뱉은 말이 꽤 괜찮은 복수처럼 느껴져 흐뭇하기도 했다.
“그것, 참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네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사일러스 공작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대공이 뛰어난 실력자라 한들, 그의 지능이 생선만도 못하다는 평가는 변함이 없었다. 이럴수록 황제에게 미움받을 거라는 걸 그 역시 모르지 않을 텐데. 이제는 그 지독한 집착이 딱할 지경이었다.
공작은 오해를 풀어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정작 황제의 손목 한 번 못 잡아본 게 억울하여 그냥 이대로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자신은 죽을 운명이었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사소한 복수밖에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 오해 때문에 괴로운 쪽은 황제가 아니라 대공뿐일 테니까. 비실비실, 자꾸만 웃음이 샜다.
“왜 자꾸 웃는 거지?”
대공이 인상을 썼다.
“제 아이를 잘 키워주신다니,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럽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대공의 마지막 인내가 끊겼다. 그가 더 참지 못하고 검을 높이 쳐들었다.
* * *
대공이 간밤에 벌인 소동을 전혀 모르는 아란은 모처럼 걱정 없는 하루를 맞이했다. 수태한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날 듯이 가벼웠다. 해가 뜬 지는 오래였지만 밤새 연회가 이어진 탓에 황궁에 머무는 사람들 대다수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대낮의 황궁이 이토록 고요한 건 오랜만이었다.
대다수의 일정이 취소되었지만, 급한 일들은 여전히 남아있기에 그녀는 천천히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 맞은편에 서 있는 대공이 보였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초췌했는데, 어제보다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정하게 굴면서도 묘하게 차갑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그는 아란을 보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그래.”
아란과 인사를 나눈 그는 몹시 부자연스럽게 그녀의 배를 굽어보았다. 마치 서로 낯은 익혔지만 인사를 건네기엔 서먹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래도 아란은 그가 나름대로 아이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 그의 성격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행동이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아. 공은 어떤가?”
그래서일까, 아란도 조금은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다.
“저는 아주 좋습니다.”
“그래, 다행이야. 그런데 공.”
“예.”
“조금 떨어져 주었으면 하는데.”
아란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무리 로지나 뿐이라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 건 부담스러웠다. 그러자 대공이 곧장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눈으로 아란과 볼록한 배에 눈을 맞추었다.
그 역시 제 행동이 자신답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배 속 생명을 제 자식으로 인정한 순간부터 아이는 제 핏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란의 건강 문제는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아이가 아란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그는 온 힘을 다해 아이를 지킬 생각이었다.
다정한 아란은 아이의 아버지인 자신을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 들뜨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바로 오늘 새벽까지도 아이에겐 별다른 정이 가지 않는다고 여겼던 게 다 겸연쩍을 정도였다.
그는 오래 망설이다 아란의 손가락 끝을 살며시 잡았다.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그가 낯간지러운 짓을 하자 그녀가 기겁하며 손을 뿌리쳤다. 그래도 자꾸만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란이 허락만 해준다면 이대로 키스하고 싶었다. 아니, 그런 성적 접촉이 아니라도 그냥 그녀와 마냥 닿아있었으면 싶었다.
아란은 그런 그를 한번 힐끗 보고는, 이상한 사람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서둘러 그를 지나쳤다. 대공은 오랜만에 크게 소리 내 웃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 뒤를 따랐다.
* * *
연회는 어제처럼 성대하고 화려했다. 전날 기대했던 일이 하나도 벌어지지 않은 데다, 오늘은 사일러스 공작까지 수도를 떠나고 없어서인지, 아란과 대공에 대한 관심은 한결 시들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황제의 배를 힐끗거리는 시선은 여전했다. 특히 수도로 막 귀환한 귀족들은 아직 상황파악을 못 했거나, 파악했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비에른 후작은 그중 후자였다.
어제 연회 내내 로아크 대공과 사일러스 공작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살피던 그는, 두 사람 전부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기엔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전략을 바꿔 황제에게 캐묻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헤스턴 공작보다 재빨리 아란의 곁을 차지했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리는군요, 폐하.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었지요.”
“아, 비에른 후작.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오. 그대의 전공이 상당하다 들었소.”
아란은 그의 인사에 답하면서도 내심 긴장했다. 아까부터 하도 귀족들에게 시달렸더니 용건을 듣기도 전에 기가 질렸다.
“예. 오랜만에 수도로 오니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더군요. 특히 황궁이 말입니다.”
“아.”
후작이 수도를 떠나 있던 시간은 고작 반년 남짓인데, 보수적이다 못해 폐쇄적인 황궁에 그간 큰 변화가 있을 리 없었다. 아란을 두고 에둘러 말한 게 분명했다. 아란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결국 돌려 말하기를 그만두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순서에 어긋난 일을 벌이시고 후계를 정하려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폐하?”
아란이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어느새 다가온 대공이 먼저 끼어들었다.
“그렇게 후계를 낳으시라며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막상 후계를 수태하시니 왜 이제 와 그런 표정입니까.”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국서가 있을 때 이야기…….”
“폐하껜 국서가 필요 없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후계의 아버지라면 최소한 황가와 수준이 맞는 사내여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폐하께서 일언반구 안 하신다니, 다들 궁금해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고 후작이 주변의 동의를 구하며 으쓱했다. 여기저기 동조하는 듯한 소리를 무시하고 대공이 말을 이었다.
“그럼, 후작이 보기에 나는 어떻습니까. 폐하께서 내 수준을 높이 평가해 주실 것 같습니까?”
“전하야 차고 넘치지요. 폐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실 겁니다.”
후작이 얼른 아부를 했다. 대공이 웃음을 흘렸다.
“그럼 문제 될 게 없겠군요.”
대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차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요?”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 아이입니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그 말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 귀에 선명히 박혔다. 한순간 정적이 감돌았다가, 물속에 떨어진 잉크가 확산하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연회장 곳곳에 퍼졌다. 특히 헤스턴 공작은 저러다 턱이 빠지지 않을까,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대공이 태연히 다가와 아란의 뺨에 입 맞추곤 이마를 살짝 맞댔다. 그리곤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순전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담긴 애정은 진심이었다. 합의되지 않은 행동에 당황한 게 역력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밀어내지 않는 아란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실 이 순간 회장 안의 누구보다도 놀라고 있는 것은 바로 대공이었다. 말을 꺼낸 이후부터, 그는 아까부터 술렁이던 마음이 급격히 커진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복잡한 감정이라 낯설긴 하지만 굳이 명명해보자면, 기쁨인 것 같았다.
대공은 자신이 아란의 것임을 확인받는 이상으로, 얼마나 사람들 앞에서 아란이 제 사람임을 내보이고 싶었는지 알았다. 더 짙은 애정표현으로 아무도 넘볼 수 없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란이 싫어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는 자꾸만 팔을 뻗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자제했다. 아직 술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는데 벌써 취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껏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만큼, 그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후작 옆에 있던 헤스턴 공작은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소리를 들은 듯한 얼굴로 아란을 바라보았다.
“폐하……?”
놀란 사람들을 향해 아란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튼, 그리되었으니 다들 알아두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