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아란은 너무 부끄러워서 그를 밀치고 배를 가리려고 했지만, 너무 커진 배를 가리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어려워 양손을 다 놓으면 이대로 넘어질 것 같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어렵게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이제 돌아왔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그대의 아이라고 말했으면 해.”
그녀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옷 아래를 보여준 건 그가 아이를 조금 더 가까이 느끼기를 바라서였다. 그가 원한 아이가 아니라는 게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냉정한 그의 태도 역시.
아란은 대공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몰랐다. 임신하겠다며 관계를 가졌으니, 임신한 사실을 알리면 당연히 제 아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아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말에 대공의 웃음이 짙어졌다.
조금 전처럼 즐거운 미소는 아니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아이를 부정하기라도 할까 봐 아란은 덜컥 걱정이 앞섰다. 지금까지 귀족들 앞에서 의연한 척할 수 있던 건 전부 그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공.”
겁을 먹은 그녀가 작게 그를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 비웃었냐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다정하고 애틋했다. 그러나 배를 어루만지는 손 위엔 힘이 들어가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대로 힘을 준다면 아이는 죽을 것이다. 사일러스 공작도 없는 지금, 아란은 아이를 지킬 힘이 없었다.
대공은 그 안에 든 게 진짜 자신의 아이라도 상관없었다. 부푼 배가 놀랄 만큼 예뻐 아쉽긴 했지만, 그 안에 든 생명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차피 제 대용품으로 생겨난 존재였고, 자신이 돌아왔으니 그 쓸모도 사라졌다.
그러나 아란이 생각보다 아이에게 애정을 보였다. 아이의 존재는 어느덧 그녀에게 너무나 커져 있었다. 그간 외로웠던 듯해 애틋하면서도, 그렇게 된 게 전부 제 탓 같기도 했다.
죽이면 슬퍼하실 텐데.
아란이 자신을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슬퍼하는 건 싫었다. 그리고 이렇게 아이를 죽이면 크게 부담을 받을 그녀의 몸도 걱정되었다.
살려둘까?
가장 위험한 자에게 배를 맡기고도 아란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그가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테이블을 잡은 손 하나를 놓고 제 배 위에 놓인 그의 손에 겹쳤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고민은 무의미했다. 아란이 원하면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응? 그럴 거지?”
“물론입니다.”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는 드물게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고마워.”
아란이 가만히 대답했다. 여전히 그가 증오스럽고 이젠 거기에 서운함까지 더해졌지만, 적어도 지금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그가 오래전부터 보고 싶어 했던 미소로 이 고마움을 보답하려 했다. 그러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대공의 넋을 빼앗기엔 충분했다.
침묵이 길어질 무렵, 다시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아이가 꿀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배 위에 키스 세례를 쏟아냈다.
“……이왕이면 폐하를 많이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만이 이 아이가 가진 유일한 가치일 테니.
그는 뒷말을 삼키며 불룩한 배에 뺨을 비볐다. 아란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자 미진한 꿈틀거림이 견딜만했다.
한동안 태동을 느끼던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드레스 자락을 다시 내려주었다. 그리곤 조그만 어깨를 끌어안고 조심스레 그녀의 귀와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란은 뻣뻣하게 안겨있을 뿐, 그를 마주 안아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밀어내지도 않았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은 금방 농밀해졌다. 아란이 긴장하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고 연약한 피부에 흔적을 남겼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을 모르는 척해줄 만큼.
그녀가 다른 속셈을 품고 제 곁에 있는 거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제가 가진 부와 권력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것들 덕에 아란을 묶어둘 수 있으니 말이다.
흔적 몇 개를 더 남긴 그가 아쉽게 입술을 뗐다.
“연회장으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절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란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당연히 더 농도 높은 행위가 이어질 거라 예상한 탓이다. 아이 때문에 직접 관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실은 대공도 이대로 그녀를 놔주고 싶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었다.
“그래.”
아란은 더 붙잡지 않았다. 그는 제 말을 의심하지 않는 그녀의 순진함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침실을 나섰다.
* * *
아란에게 한 말과 달리, 그는 연회장으로 가지 않았다. 황궁을 나온 그는 대공저에 들렸다가 다시 사일러스 공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연회용 장식 검 대신 전장에서 사용했던 날이 예리한 진검으로 바꿔 찬 채였다.
앞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와 아버지, 둘 중 하나는 아란 옆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했다. 그 하나가 어느 쪽인지는, 이제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그가 사일러스 공작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공작은 막 공작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문 안쪽이 유달리 소란스러웠다. 공작을 배웅하느라 여러 사람이 오고 가는 소리를 듣던 대공은, 지금 제 모습을 드러내면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제가 할 짓을 아란의 귀에 들어가게 할 수 없었다.
대공은 한발 먼저 수도 밖으로 나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서서히 밝아오는 성벽 사이로 한 무리의 행렬이 빠져나왔다. 공작의 일행이었다. 대공은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공작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행렬이 다가왔을 즈음, 대공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공작은 갑자기 나타난 인영을 보고 조금 당황했지만, 곧 정체를 깨닫고 손을 들어 뒤따라오던 가신과 호위들을 멈춰 세웠다. 이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매끄럽게 인사를 건넸다.
“대공 전하?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무슨 일이십니까?”
“공이 쥐새끼처럼 몰래 수도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어서.”
험한 말에 공작의 낯이 조금 굳었다.
“누구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시면 차도 대접해 드릴 수가 없는데요.”
“공과 마주 앉아 차 마실 생각은 없으니 다행입니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사나운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공작은 작게 혀를 찼다. 어쩐지 황제와 나눴던 말이 정말로 일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모른 척하고 태연히 말을 이었다.
“오, 대공과 제 마음이 일치하는 날이 오다니 신기한데요.”
대공은 그의 비아냥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공작은 별수 없이 사람들을 잠시 쉬게 한 채 그를 따랐다.
인적 드문 장소에 이르자 공작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용건이신지 이제 들어볼까요. 작별인사를 해주시려는 건 아닐 테고.”
“작별인사. 마음에 드는군요, 그 표현.”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뒤늦게 망토 안에 숨겨져 있던 검을 발견한 공작의 낯이 굳어졌다.
“이제 공을 살려둘 수가 없으니.”
“그게 무슨…….”
“일전에 내가 말했을 텐데요. 허튼수작 부리면 죽여버리겠다고.”
사일러스 공작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신청하시면 될 일이지, 이런 식이라니요? 대공께서는 귀족으로서의 명예도 모르십니까?”
“어차피 공이 죽는다는 결말은 같을 텐데, 명예 따위를 챙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시간이나 허비하는 셈이지.”
심드렁한 목소리였지만 살기가 명백했다. 천천히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사위가 어슴푸레한 가운데 검날이 예리하게 빛났다. 공작이 온몸을 긴장하며 나직이 경고했다.
“아무리 대단하신 로아크 대공 전하라도 절 죽이시면 뒷감당이 힘드실 겁니다.”
“그건 공이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대공이 돌연 공작을 향해 뽑아낸 검을 던졌다. 공작은 엉겁결에 제 앞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는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받으세요.”
“무기를 제게 주시면 전하께선 어쩌려고 하십니까.”
대공이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검집을 들어 보였다.
“공을 상대하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혹은 상대를 얕보는 건지, 어느 쪽이든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호위 한 명 없이 다짜고짜 찾아와 이런 일을 저지르는 패기에 공작은 질려버렸다. 그러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인데 이상하게 그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원래 정상인은 미친놈을 상대하기 힘든 법이었다.
그리고 대공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증명하듯 주저 없이 사일러스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서둘러 검으로 공격을 막아내며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칼을 맞대고 나서야 그는 대공이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망토 아래 입은 옷도 연회에서 입었던 예복 그대로였다.
대공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는 이유란 뻔했다. 연회에서 소문을 들었든지, 아님 그와 비슷한 다른 일이 있었겠지. 어쨌든 그는 전부 알게 된 것이다. 세간을 떠도는, 황제와 자신을 둘러싼 더러운 소문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고.
한심한 마음이 치밀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쩜 저리도 믿음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공, 설마 황제 폐하에 대한……”
그가 황제를 입에 담자마자 대공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내 앞에서 그분을 입에 담지 마라.”
대공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거친 반응에 사일러스 공작은 뜬금없지만, 황제는 안전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걱정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인듯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윽!”
공작은 어서 상황을 설명해 오해를 풀려고 했으나, 묵직한 검집에 배를 얻어맞아 몸을 꺾고 말았다. 숙인 등으로 이어 강한 타격이 가해졌다. 맞아서 났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은 그가 입을 열 새를 주지 않았다. 구차한 변명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었다. 아니, 이미 소문의 진위 여부는 상관이 없었다. 당사자를 없애면 곧 끝날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