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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115화 (115/146)

115화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도 없군요. 하도 어처구니없는 말을 많이 듣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졌나 봅니다.”

아란의 얼굴이 흐려졌다.

“정말 공에겐 짐이 늘 죄인이군. 그래도 곧 모두 그게 헛소문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마음 편히 가졌으면 해.”

“예.”

“그럼, 부디 건강히 다녀오게. 공작성 사람들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예. 모두 폐하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사일러스 공작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아란은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연회 자리를 지키고 있어 봐야 별 소득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병의 차도는 어떤지, 아이는 어떻게 할 건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이번 연회는 며칠간 이어질 테고, 앞으로 내내 이런 상황이라면 당분간 그녀가 그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느린 걸음으로 침실에 도착한 아란은 문 앞에 서 있는 대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복도에 드리워진 어둠에 반쯤 녹아든 채 움직임도 없는 그의 얼굴엔 빛 한점 드리워지지 않았다.

“공?”

그녀는 이내 침착한 태도로 뒤따르던 사람들을 다 물리고 그를 침실 안으로 들였다.

“연회는 어쩌고?”

“잠시 나왔습니다.”

주인공이 없다면 연회는 무의미해질 텐데. 그러나 아란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앉으라는 뜻으로 테이블 의자를 가리키자, 그가 의자를 빼 그녀 먼저 앉게 했다.

아란은 다소 어색하게 제 앞에 앉은 대공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침실에서 그와 이렇게 조용히 마주 앉은 적이 없어서 새삼 낯설었다. 로지나를 시켜 차라도 내놓을까 하다가 그가 차를 그리 즐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만두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던 것 같은데, 정작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작년 건국제가 생각났다. 그는 꼭 그때와 같은 눈으로 그녀의 배를 보고 있었다. 짐승을 사냥하는 듯한 그런 눈으로, 당장이라도 그 속을 갈라 안에 든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어쩐지 섬뜩한 느낌에 아란은 몸을 틀어 배를 가리려고 했다. 그러나 도리어 부푼 곡선이 더 도드라졌다.

“몸은 좀 괜찮아?”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예, 하고 그가 대답했다.

“걱정했어. 많이 아플까 봐…….”

대공이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그녀의 말은 달콤했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저보단 폐하께 더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군요.”

“아.”

아란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도와는 달리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몸짓을 보며 대공이 계속 말을 이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지금보다는 이 상황을 더 편히 받아들였을 텐데 말입니다. 소식을 많이 늦게 전달하셨더군요.”

“말하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던 아란이 돌연 자세를 바로 했다. 생각해보니 아기를 가진 게 죄도 아닌데 이렇게 저자세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임신으로 힘들어진 사람은 그녀 본인이지, 그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를 품고 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려주고 싶었다.

아무리 아이에게 정을 붙였다 해도 임신은 고달픈 일이었다. 입덧이 심했을 땐 피골이 상접했을 정도로 음식을 먹기 힘들었고, 점차 배가 나오며 당연히 해왔던 일들을 못 하게 되었다. 허리를 굽히거나 펴는 건 물론이고, 똑바로 누워서 잘 수도 없었다. 툭하면 뭉치는 배나 허리 통증, 현기증, 몸이 붓는 것도 괴로웠다.

그러나 가장 힘든 건, 그 모든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내색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황궁에 그녀의 임신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로지나와 사일러스 공작까지 그녀의 임신을 기뻐하기보단 당황스러워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틈에서,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회의가 길어지거나 사절이 방문해 자리를 오래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도 오면 잦은 요의 때문에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럴 땐 남자 귀족 중 대다수가 전장에 나간 게 천만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의 비참한 기분을, 아마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무엇보다 출산을 생각하면 벌써 무서웠다. 몸이 약한 자신이 마지막 과정까지 무사히 견딜 수 있을지, 실은 자신이 없었다. 그 모든 과정에 대공이 도움을 준 거라곤 함께 밤을 보낸 것밖에 없었다. 거기다 실수라며 그녀를 무안하게 해놓고서는, 막상 새벽이 되도록 놓아주지 않던 사람 역시 바로 그였다.

“미리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어. 전장에 나간 그대가 이 이야기를 들어 좋을 게 없으니.”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장에서 이 기막힌 전말을 알았다면 전쟁 따윈 집어치우고 탈영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실소가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총사령관이 탈영을 하다니.

“잘하셨습니다.”

아란만큼이나, 그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는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수태한 몸으로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응……. 생각보다 더 많이. 그대는 모를 거야. 그래도 그대가 무사히 돌아와서 마음이 놓여.”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주 당당한 눈빛이었다.

그새 연기가 는 것인지, 원래 이리 뻔뻔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제 연인의 말을 믿고 무서울 게 없는 것일까.

그는 대뜸 불룩 튀어나온 배에 손을 올렸다. 아란은 그 무례한 행동에 화들짝 놀랐고, 그녀의 마음을 느꼈는지 아기가 손이 얹힌 곳을 거세게 찼다.

“아!”

아란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꺾으며 배를 감쌌고, 대공도 놀라 손을 거뒀다.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동을 느낀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격렬하게 움직인 적은 처음이었다.

“아, 아기가 놀랐나 봐.”

아란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

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주저하며 그를 올려다본 아란은,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상태임을 알았다. 그는 마치 평생 무인도에 갇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아이만큼이나 그도 놀랐는지, 조금 전과는 달리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 눈빛엔 적대감이 생생했다.

그를 본 아란은 몹시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 핏줄인데 저런 눈이라니. 그녀는 그 와중에도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갑자기 소식을 들었으니 낯선 게 당연해. 더구나 궁의가 그러는데, 나는 배가 유달리 많이 나온 편이라고 하니까.”

“…….”

“그래도 곧 익숙해질 거야. 나도 처음엔 아무 감정도 없었는데, 자꾸 말을 걸고 쓰다듬어주니까 조금씩 애정이 생겼어.”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아 다시 제 배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한번 만져 봐. 요즘은 아기가 많이 커서 배 위로 움직이는 게 보이거든. 아마…….”

조금 전처럼 움직인다면 옷을 입은 상태에서도 보일지 모른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안아 들어 테이블 위에 앉혔다. 아란이 엉겁결에 테이블 모서리를 짚은 사이, 그가 다짜고짜 드레스를 걷어 올리려고 했다.

“뭐 하는……!”

아란은 균형을 잡느라 발버둥 치지도 못했다. 대공이 단단히 지탱하고 있긴 하지만, 괜히 저항하다 자칫 테이블 위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녀의 거부를 알아챈 그가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아기가 움직이는 걸 보고 싶습니다.”

아란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란은 제 오해를 깨닫고 무안함을 느꼈다.

어찌 됐건 그는 아이의 아버지였고, 지금까지 두 사람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도 많이 했으니 배를 보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는 주춤주춤 긴장을 풀었다. 여전히 아이를 향한 적의가 느껴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도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허락의 뜻을 읽은 그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순식간에 드레스 자락이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올라갔다. 배가 많이 나온 탓에 몸을 죄는 속치마 같은 건 입고 있지 않아 다리와 둥그런 배가 드러났다.

허락은 했지만 막상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자 그녀가 움츠러들었다. 그 바람에 몸이 휘청이자, 강인한 손이 얼른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임신한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처음엔 허리만 숙였지만, 곧 무릎으로 바닥을 디뎌 시선을 낮췄다.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배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는 그곳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눈동자가 얇아지다 못해 트기 시작한 피부와 그 때문에 더욱 적나라하게 보이는 핏줄, 색소가 침착되어 색이 짙어진 배꼽 따위를 고스란히 담았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사나운 눈빛을 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집중하는 그의 얼굴은 누그러져 있었다. 아란은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그 모습을 외면했다.

궁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그녀를 위로했지만 변한 몸을 보는 건 속상했다. 그것을 남에게 보이는 건 더더욱 그랬다. 후계를 낳는 게 의무라고 해도 아직 그녀는 어린 나이였다. 치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몸이 변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대공의 숨결이 피부 위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은근히 느껴지는 수치로 몸을 떨었다.

조금 전 세찬 태동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이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음……. 아기가 이제 안 움직이려는 것 같아.”

“기다리면 움직이지 않을까요.”

“다음에 움직이면 말해줄게. 오래 봐서 좋은 것도 아니고.”

“아뇨.”

그가 아란의 허리를 껴안고 있던 팔 하나를 풀어 배를 만졌다.

“너무 예뻐서 화가 나.”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예쁘다니. 아란은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은 남자들이 토라진 여자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하는 의례적인 대답 같은 거라고, 시녀들은 저들끼리 대화할 때마다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대공은 지금껏 한 번도 그런 표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가 여자에게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아는 남자라는 게 새삼스러우면서도 묘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화는 왜 나는 거지……?

그 의문은 그가 손가락으로 평평해진 배꼽을 건드리자 싹 잊혔다. 그녀는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뭐, 뭐 하는 거야?”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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