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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114화 (114/146)

114화

그리고 눈치도 없는 아란은 그를 위해 성대한 개선식을 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그녀였다면 제 연인과 아이를 죽일 살인자를 피해 세상 끝까지 도망쳤을 텐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아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거절의 뜻을 전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러웠다. 그녀는 늘 그의 알량한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태도가 아란의 부정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 같아 조금은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녀의 임신을 암시하는 듯하던 기이한 꿈을 꾸었던 것 역시, 어쩌면 자신이 그 아이의 아비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망상에 빠져 있던 대공은 저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부정이라니, 당치도 않은 표현이었다. 그는 그녀의 종에 불과했다. 감히 주인에게 정조를 바라는 종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다못해 아란이 천한 비렁뱅이의 아이를 가졌다 한들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기대를 품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작은 기대라도 품을 때면, 오히려 그를 비웃듯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때로는 무력하게 휩쓸려 그리되었고, 때로는 제 손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시민들이 전부 전하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웃어주십시오.”

내내 굳어 있는 대공을 향해 헤스턴 소공작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수도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거리는 대공과 제국군을 맞이하는 인파로 가득했다.

“폐하께서 개선식에 신경을 많이 쓰셨나 봅니다.”

“그런가.”

대공이 차게 대답했다. 개선식은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영광이었고, 심지어 아란이 그를 위해 직접 열어준 행사이기까지 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먼발치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란과 그녀의 배를 보았을 때, 그는 어느 때보다 치솟는 살의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멀리서도 불룩한 배가 도드라졌다. 꿈에서 그랬듯 그 배를 누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대답을 듣기 두려워 차라리 그것을 죽여 없애고 싶었다.

소문처럼 임신했다는 증거가 확연히 나타난 황제의 모습에 다른 지휘관들이 놀라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황제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몸이 무겁기 때문인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다른 지휘관과 병사들은 차마 배가 부른 황제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전부 고개를 숙였지만, 대공만은 오직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거운 배를 안고 뒤뚱뒤뚱 걷는 꼴이 가엽고도 우스웠다. 그 배 속에 깃든 것을 꺼내면, 그녀는 예전처럼 날렵하고 가벼운 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아란은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오.”

목이 멨는지 아란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울먹이는 얼굴을 본 순간, 홀리기라도 한 듯 그간 그를 미치게 했던 살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임신한 여자답지 않게 전보다 야윈 얼굴이 너무 애틋하고 예뻤다. 긴 머리카락, 가늘고 긴 목, 우아한 팔다리, 심지어 사일러스의 자식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동그란 배까지,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사로잡힌 것처럼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통증이 아닌, 벅찬 애정만이 그를 숨 쉬지 못하게 꽉 죄어왔다.

아란이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응당 그 위에 입 맞춰야 하지만, 그는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닿기엔 제 손과 얼굴이 너무 더러웠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로지나가 재빨리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으로 대충 먼지를 닦아낸 후에야 그는 비로소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제 배에 닿아있는 것을 안 아란이 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공과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소.”

그녀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날 밤 열린 승전 기념 연회에서 아란은 그의 유명세만 상기하고 말았다. 먼지투성이로 귀환한 낮과 달리, 연회에 참석한 대공은 막 전장에서 돌아온 사람답지 않게 아주 말끔한 모습이었다.

아란의 치하가 끝나자마자 무서울 만큼 모여든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가버리는 바람에 정작 그녀가 그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별로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연회가 열릴 때마다 이유를 불문하고 주목을 받는 그이니, 그가 주인공인 이번 연회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초대된 탓에 황궁 연회답지 않게 소란스러워, 도무지 진지한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그와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대공이 돌아왔으니 하루라도 빨리 아이가 그의 핏줄임을 인정받고 싶었다.

“자리가 불편하십니까?”

아란의 굳은 얼굴을 본 대공이 사람들을 비집고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다지. 공이야말로 전장에서 갓 돌아왔으니 피곤할 것 같소.”

단순히 몸이 좋지 않은 게 아닌 걸 알면서, 그는 도무지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힐끗 부른 배에 닿았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아란을 향한 눈빛이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한데 정작 아이가 없는 것처럼 구는 게 서운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그가 원하지 않는 아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차가울 줄은 몰랐다.

“저도 괜찮습니다.”

“요즘은…….”

무심코 요즘은 병세가 어떠냐고 물으려던 그녀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곤 멈칫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귀족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란은 그냥 입을 다물고는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막 전장에서 돌아온 대공은 모르겠지만, 참석자 중 대다수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황제와 로아크 대공, 그리고 사일러스 공작을 흘낏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 자리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벌어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란은 그들의 뜻대로 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특히 아무 잘못도 없이 추문에 휩쓸리게 된 공작이 성가신 일이라도 당할까, 그녀는 그가 있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도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짧게 눈인사를 건넸을 뿐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주변을 맴도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이전의 다른 연회에서 그랬듯 가장 상석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이럴 땐 수태한 게 다행이었다. 춤을 추지 않아도 되고,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듣기 싫은 말은 아이를 핑계로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없는 연회는 생각보다 훨씬 견딜만했다.

그러다 그녀는 사일러스 공작이 연회장을 떠나려는 것을 보았다. 연회가 시작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연회 내내 자신과의 관계를 떠보려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을 텐데도,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느라 부러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게 환히 보여, 아란은 미안한 마음에 그의 뒤를 따랐다.

“기다리게, 사일러스 공.”

“폐하. 어찌 나오셨습니까.”

“공이야말로 어찌 인사도 없이 가려고 한단 말인가.”

타박하는 척, 그녀는 슬쩍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 말에 사일러스 공작은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 *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내 그녀를 신경 쓰고 있던 대공은 아란이 사라지자 곧장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사일러스 공작 역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따라붙는 사람들을 뿌리친 채 서둘러 두 사람이 사라졌을 법한 곳을 찾았다. 질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공에겐 다행스럽게, 그리고 두 연인에겐 불행하게도 그는 금방 두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란과 사일러스 공작은 연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드문 별궁 후원에 서 있었다. 곧장 그들을 떼어놓으려던 대공은 들려오는 대화에 걸음을 멈췄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듣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으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벌써 다나르로 돌아간다니, 수도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서두르는가.”

“이미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제 밀린 일들을 처리해야죠. 그래도 대공께서 돌아오셨으니, 폐하께서도 한시름 놓으시겠군요.”

아란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실은 걱정이 많아. 오늘도 연회 내내 무정하게 구는 걸 보니 말이야. 과연 제 아이로 받아줄지……. 혹시 그가 그 소문을 들은 건 아니겠지? 아이가 그대의 핏줄이라는 것 말이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대공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글쎄요.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폐하 앞에 멀쩡히 서 있지 못했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공께선 폐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실 겁니다. 그리고 정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아이에 대한 의무가 제게도 있으니까요.”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짓씹었다. 공작은 대부로서 책임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가 듣기엔 오해의 소지가 충분했다. 그는 아란이 모든 것을 부인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공은 짐보다 본인을 먼저 걱정해야 해. 나중에라도 대공이 소문을 듣는다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설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가 그대를 해코지한다면, 짐은 절대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입 안에서 으득하는 소리가 났다. 아란이 공작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헤시온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면, 그는 아란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당장 이 자리에서 칼부림을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그런 대공을 눈치채지 못한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란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언제 떠날 생각인가?”

“오늘 해가 뜨기 전에 떠나려고 합니다.”

“너무 이르군.”

그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영락없이 강제 이별하는 연인이었다. 잠시 잊혀졌던 가슴의 통증이 아득할 만큼 심해지고,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떨리는 손이 허리에 찬 검집을 꽉 쥐었다.

아란과 이야기하던 사일러스 공작이 문득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정확히 대공이 서 있는 덤불 뒤를 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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