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황제가 수태를 시인한 이후에도 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엔 어처구니없게도, 배 속 아이의 아버지가 사일러스 공작이라는 소문이었다.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로지나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란이 기겁했다.
그녀는 그 소문을 들은 이후 사일러스 공작을 피해 다녔다. 괜히 자신을 가까이한 탓에 매번 그가 봉변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차마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허튼 소문을 발설한 이들을 엄히 처벌했다.
황제가 소문을 극렬히 부인했음에도, 사람들은 쉽사리 믿지 않았다. 사일러스 공작의 친지 중 몇 명은 넌지시 그를 떠보기까지 했다. 공작 역시 그 소문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만 했다.
하필이면 황제가 수태한 시점도 절묘했다. 소문은 사랑에 빠진 황제와 공작이 대공의 눈치를 보며 애만 태우다가, 그가 떠나자마자 서둘러 아이부터 가진 게 아니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황제가 자신의 임신 소식이 수도 밖으로 퍼지지 못하게 막는 것도 혼전 임신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대공의 귀에 들어갈 것을 염려해서일 거라는 둥, 온갖 추측이 무성했다. 그러나 가장 소문을 부추기는 건 그 모든 소문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꾹 닫는 황제의 태도였다.
아란은 대공이 어서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여전히 답장을 하진 못했지만 꼬박꼬박 도착하는 그의 편지를 보면 그의 건강이 그리 나빠진 것 같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그저 지금은 사일러스 공작에게 들 낯이 없었다. 자신이 조롱을 듣는 건 전부 제 책임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는 자신과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도 어서 혼인해야 할 텐데, 황제와 염문이 돈 남자와 혼인하려 할 여자가 있을지 걱정이었다.
나름대로 그를 배려하여 독대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만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매일 한계치 이상으로 물자와 사람이 드나드는 다나르에선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미안하게 되었네. 공에게는 늘 면목이 없어.”
사일러스 공작의 보고를 듣던 아란이 불쑥 말했다.
“무엇을 사과하십니까.”
“그냥 여러모로. 다나르도 상황이 어려울 텐데, 수도에 머물러 주는 것도 고맙고.”
그녀가 사과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모르는 척해주었다.
“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미 많은 일을 걱정하고 계신데, 저까지 폐하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작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실제로 그는 소문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겐 형제가 많아 그가 자식을 보지 않아도 공작가를 이을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귀족으로서는 드물게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란은 몰랐지만 그가 소문을 부인하는 태도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는데, 그건 멀리 떨어져 있는 대공보다는 가까이 있는 자신이 황제와 아이를 지키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대담한 자라고 해도 아이의 아비일지도 모르는 사내가 보는 앞에서 허튼수작을 부리기는 힘들 테니까.
그렇지만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매번 듣다 보면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대로 대공이 돌아오지 못하면 정말 소문대로 그가 아이의 아비인 척 국서가 되고 싶다는 충동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아이를 사랑으로 품을 자신은 없었지만, 귀족들은 대체로 육아를 직접 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그리 어려울 건 없었다. 아이가 대공을 닮았다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한 번씩 속이 뒤집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아란은 미안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래도 얼마 가지는 않을걸세. 이제 그 사람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까 해. 아이도 안정기에 들어섰다 하고 제국군도 라세르 수도 바로 앞까지 진격했다니, 짐의 서신을 받아볼 때쯤엔 이미 돌아오는 중일 테지. 그가 돌아오면 모든 오해가 풀릴 거야.”
그 말에 사일러스 공작은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주군은 무심하고 잔인하여 언제나 헛된 망상을 품어볼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는 억지로 웃었다.
* * *
마침내 대공이 라세르 국왕을 처형하고 귀환 중이라는 소식이 수도에 전해졌다. 아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너무나 애타게 기다렸던 소식인데, 너무 기꺼우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참기 위해 얼굴을 찡그렸다.
황제의 반응을 본 귀족들은 또다시 사실을 왜곡했다. 실은 임신 때문에 감정이 더 격해진 것이지만, 평소 어떤 일에도 무덤덤했던 그녀의 태도가 오해를 키웠다. 그러나 아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공만 돌아오면 전부 풀릴 문제들이었다.
일과가 전부 끝나고 혼자가 된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조금 웃었다. 그간의 울적함이 싹 날아간 것 같았다. 그녀의 기분이 전해진 듯 안쪽이 술렁거렸다.
얼마 전부터는 작지만 아이의 움직임도 느껴졌다. 마치 비눗방울이 터지는 것 같은 감각은 어느덧 아이에게 몰두해 있는 아란을 설레게 했다. 너무 신기해서 로지나에게도 배를 만져보게 했는데, 너무 미미한 움직임이라 그런지 그녀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혹시 아이가 저를 닮아 몸이 약한 건 아닌지 걱정되어 궁의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조금 있으면 더 세차게 움직일 거라고 말해주었다. 안심은 되었지만 한번 우울해진 기분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실은 아이가 조금씩 자라나는 과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는 것이 많이 외로웠다. 로지나와 시녀들이 아무리 잘 챙겨주어도 허전함을 전부 채워주지는 못했다. 아란은 홀로 기뻤다가, 걱정했다가, 불안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다.
대공이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늘 진심이었다. 그는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아주 조금쯤은 애틋함이 섞인 것도 같았다.
* * *
아란의 배처럼 소문은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대공이 수도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엔 차마 들어줄 수 없는 수준까지 변질되어 있었다.
거의 기정사실처럼 떠도는 그런 소문들은 아란의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무력하다 해도 황제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떠들어댈 만큼 정신 나간 자들은 없기도 했고, 아란의 주변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더라도 임신한 그녀에게 전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란과 달리 대공은 수도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녀와 관련된 소문들을 마주했다. 아란이 그의 눈을 피해 매일 밤 공작과 밀회를 나눴다거나, 실은 그녀조차 배 속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를 만큼 많은 남자가 그녀의 침실을 드나들었다거나 하는 식의 더러운 이야기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공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는 화가 치밀었다. 감히 누구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느냐며 칼을 뽑을 뻔했다.
그러나 헛소문으로 치부하고 싶었던 그를 비웃듯, 뒤늦게 도착한 아란의 서신은 그 소문이 얼마쯤은 사실이라는 걸 증명해버리고 말았다.
아란이, 아이를 가졌다.
황제에 대한 자극적인 소문들은 어느새 군 전체에 퍼졌다. 대공이 함부로 입을 놀린 자들을 족족 처형하는 바람에 곧 소문은 사그라졌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어느덧 의심이 자리 잡았다.
피임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 정말 그녀는 그날에 임신했을까.
서신에서 그녀는 임신했다는 것만 밝혔을 뿐, 누구의 아이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란이 정말 소문과 같은 일을 벌였다고 믿기는 힘들었지만, 세상 모든 남자 중 가장 몸을 섞고 싶지 않을 자신을 유혹할 만큼 당시 그녀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자신과 보낸 밤들로 그녀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차마 뒤는 더 상상할 수 없었다.
배 속 아기의 아비가 누구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낳은 아이라면 누구의 핏줄이든 전부 제 자식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아란이 원하면 기꺼이 아이를 사랑하는 척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가 아란 외의 존재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아란이 침대 위에서 어떻게 흐트러지는지, 어떤 목소리로 신음하고 어떤 얼굴로 우는지, 다른 남자가 전부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그자를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특히 염문이 난 남자가 사일러스 공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엔 잠도 이루지 못했다.
역시 그를 살려두는 게 아니었다. 아란의 미움을 사더라도 죽였어야 했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자신을 미워할 테니.
그는 매일 밤 사일러스 공작을 살해하고 그 옆에서 울부짖는 아란의 배를 짓눌러 그 아이까지 죽이는 꿈을 꿨다. 연인과 아이를 한꺼번에 잃고 증오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면 기이한 희열이 느껴졌다.
‘아이는 또 가지면 됩니다.’
다정한 척 아란의 귓가에 속삭이면 그녀는 경악해 허우적거렸다. 애처롭게 저항하는 몸을 결박한 후 다리를 벌리고 그 안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 꿈은 끝났다.
기가 막힌 내용이었지만, 그대로 저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은 시시각각 그를 괴롭혔다.
그 꿈이야말로 그의 저열한 진심을 전부 보여주었다. 아란의 아이라면 기꺼이 사랑하는 척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전부 자기기만이었다. 정말 아란이 사일러스 공작의 아이를 품었다면, 그 배 속을 긁어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짓을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사일러스 공작을 더 괴롭게 죽일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라세르의 수도에서 시작된 가슴 통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도 그런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그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