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하긴, 눈치 빠른 그가 저의 어설픈 거짓말에 넘어갔으리라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만큼 답답했다. 다행히 공작이 그것을 탓해 아란을 무안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예.”
“누구 아이인지도?”
“대공 전하의 아이입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아란이 변명하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께선 다른 선택지가 없으셨을 테니까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대공의 아이라는 건 극비니까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네.”
아란이 얼른 덧붙였다. 공작은 그녀가 무의식중에 배를 쓰다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려 했지만 이번엔 잘되지 않았다.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질투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아란이 살포시 미소지었다. 당혹스러움과 걱정으로 어쩔 줄 모르던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변한 건 부푼 배뿐만이 아니었다.
증오하는 상대의 아이를 가졌는데도 그녀는 불안해하거나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공의 아이라는 걸 밝히면 귀족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황제도 알고 있을 텐데, 오직 그 상대가 전장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사일러스 공작은 처음으로 대공이 부러웠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자꾸만 질투를 느끼는 자신이 더없이 치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눈앞에서 아란이 훌쩍 성숙해진 얼굴로 웃고 있어,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마주 웃었다.
“공에게 처음 말하는 건데, 사실 아이 이름도 정했어.”
“그러십니까.”
“아들이면 초대 황제 폐하의 이름을 따서 스카디, 딸이면 모후 이름을 따 브린이라고 지으려고 하네.”
“브린…….”
사일러스 공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때 그녀를 그렇게 불렀던 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물고기를 낚아 올리며 신기해하던 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줍게 미소짓는 얼굴은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제 그녀는 그에게서 성큼 멀어져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면 공이 대부가 되어주었으면 해.”
아란이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청했다. 무심한 만큼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녀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영광입니다, 폐하.”
* * *
대공은 꿈속에서 황제를 보았다. 그녀는 그를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그의 어깨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서운하여 가까이 다가서자, 아란이 기척을 죽이라며 가만히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였다.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온갖 귀한 보석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오라는 것 같았다. 그는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석을 잔뜩 안고 왔다. 그러나 뭘 주어도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마침내 그녀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는 확인하지도 않고 일단 그것을 집어 건넸다. 비로소 아란이 환히 웃었다.
뒤늦게 확인하니 조그만 왕관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소중히 품에 안았다. 대공은 어쩐지 마음이 벅차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전에 꾸었던 꿈처럼 그녀가 갑자기 저주를 퍼부을까 두려웠지만, 꿈에서나마 그 얼굴을 오래 보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아란이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더 오래 꿈속에 머물고 싶어 서둘러 다른 건 필요 없느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대공은 꿈에서 깨어났다. 다시 잠들기 위해 계속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새 졸음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은 전쟁을 반년 이하로 잡았으나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괜히 제국에 반발을 든 게 아님을 보여주듯, 라세르의 저항이 제법 거셌다. 제국군의 무능도 전쟁이 길어지는데 한몫했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그는 버릇처럼 등허리를 살폈다. 궁의의 지시를 잘 따르고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는데 반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전쟁 초반에는 조금 주춤한 감이 있던 것 같았는데, 이젠 되레 점점 다른 곳으로 번지기만 했다.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직은 통증도 없고 괜찮았다.
옷을 입은 그는 수도에서 온 편지를 손으로 훑었다. 그녀가 직접 답장한 적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종장이 대필했을 것이 분명한 내용물은 뜯어보지도 않고, 겉면의 인장만 어루만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인장만큼은 황제가 손수 찍는 것이다. 대공은 그것을 오래오래 만졌다.
그러다 조금 전 꿈을 떠올렸다. 내용이 꼭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아란의 신변에 무언가 일이 있진 않을까 하는.
전장에 전해지는 수도의 소식은 제한적이라 답답했다. 자연스럽게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일전의 감기는 다 나았다고 들었는데. 거기다 이번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없을 때 아란이 임신했을까 봐, 그 없이 약한 몸으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홀로 아이를 낳을까 봐.
그러나 얼마 전 받은 시녀의 편지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아니, 보고를 받을 것도 없이, 무언가 있었다면 아란의 성격상 직접 연락을 했을 것이었다. 특히 임신 같이 중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마지막에 아란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임신을 아는 즉시 서신을 보내 아이를 제 친자로 인정하라고 재촉하고도 남았다.
하기야, 그가 피임하지 않고 그녀와 관계한 건 딱 하루뿐이었으니 애초에 확률이 작은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늘 꾸는 무의미한 꿈 중 하나였다.
너무나 그리운 나머지 이젠 웃는 모습조차 그려내는가 싶어 속이 뜨거워졌다.
어찌 되었든 그는 지금 전장이었고, 당장 할 수 있는 건 하루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대공은 막사를 나서서 적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둠 속에서 창백한 성벽만 빛났다.
이 성을 함락시키면 라세르의 수도로 가는 길목이 뚫린다. 그것을 알기에 라세르도 필사적이었다. 라세르 왕은 친히 제 동생을 보내 성을 수비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성엔 식량이 더 남지 않았고, 날이 밝으면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해가 뜨기 무섭게 제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성 준비를 했다. 누군가 성벽에 올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세르의 왕제였다. 대공과 눈이 마주친 그가 큰소리로 이죽거렸다.
“전투가 길어지니 라인스터의 공주님께서 애가 타시겠군요. 애완견을 이리 오래 떨어뜨려 놓은 적이 드무시니.”
성벽 높이 오른 왕제가 대공을 도발했다. 대공은 미간을 찌푸렸다. 점잖은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없이 비열해 보였다.
“말을 삼가라.”
“제 말이 거슬리십니까? 그런 여자를 따르니 애완견이라는 소리를 듣는 겁니다.”
왕제가 다시 말했다. 그가 보기에는 대공이 황제를 따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자를, 그것도 혼인조차 하지 않은 어린 여자를 가장 위대한 자리에 올려놓는 건 무예를 숭상하는 라세르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공은 전혀 자존심 상한 기색이 없었다.
“네 왕은 그 애완견에게 물릴 것을 염려하여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지.”
왕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호기롭게 외쳤다.
“공이 정말로 애완견인지, 아니면 용맹한 사냥개인지, 오늘로써 판가름 나겠군요.”
“이왕이면 전자가 좋겠는데.”
한껏 비아냥거린 대공이 마침내 신호를 내렸다.
전투는 사흘 밤낮으로 벌어졌다. 왕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의 용맹함은 기울어진 전세를 뒤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그간 굳게 닫혔던 성문이 마침내 열렸고, 왕제는 대공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 애완견에게 죽는 기분이.”
대공은 웃음기조차 없는 어조로 물었다.
왕제는 이성을 잃고 그와 황제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대공은 자신을 모욕하는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으나, 왕제가 아란을 비난하자 서슴없이 칼을 휘둘렀다.
심지어 그는, 부러 단번에 그의 숨을 끊어주지 않았다. 왕제의 목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끝까지 몸뚱이에 붙어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세르군은 우왕좌왕하다 전멸했다. 대공은 그 승리에 안주하지 않고 곧장 라세르의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제국군이 온다는 소식에 라세르 국왕은 왕세손을 데리고 미리 도망쳤지만, 대공은 끝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라세르 국왕 역시 동생처럼 목이 잘렸고, 왕세손은 사로잡혔다.
“차라리 죽여라!”
앳된 티가 역력한 소년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소년이 바라는 대로 그를 참수하려던 대공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손에서 벗어난 검이 저 멀리 바닥에 떨어졌다.
어쩐지 왕세손을 죽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심각한 얼굴로 후계를 논하던 아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이를 원한다며 서투르게 도발하던 몸짓도. 소년이 악을 썼지만, 그는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라세르의 수도는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왕국민들은 포로로 잡혔다. 그들 중 절반은 제국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죽을 테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팔리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왕의 말로였다.
그러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의 주군은 절대 그런 최후를 맞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공은 그녀를 누구보다 영광스러운 군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손이 피에 흠뻑 젖어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보자, 형제들의 피로 붉게 물든 드레스를 입은 채 꼼짝도 못 하던 아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겨우 그 기억을 떨치며 돌아서던 그는 문득 심장을 쿡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대었다. 통증은 금세 사라졌다.
“총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곁에 있던 부관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아니다.”
그는 황궁이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단 한 번도 안부를 묻거나 서신을 보내지는 않았어도, 그녀가 얼마나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에 마음이 부풀어 그는 금세 고통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