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11화 (111/146)

111화

날이 갈수록 아란의 배는 점점 부풀었다. 이제는 귀족들도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문은 곧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황제가 국서도 없이 수태한 것 같다는 이야기에 한동안 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국서 자리를 노리던 가문의 충격이 컸다. 그들은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황제의 시녀들을 매수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어쨌거나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윤리성을 문제 삼아 아이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싶어했지만 명분도, 권한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제국의 주인에게 이 정도는 큰 흠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후계가 생겼다는 것 자체만 생각하면 되레 잘됐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사교계는 예기치 못한 황제의 임신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그저 얌전하신 줄만 알았더니 허, 참……! 타국에서 대체 제국 황실을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헤스턴 공작이 황당함 섞인 분노를 터뜨렸다. 아직까지는 소문에 불과했지만, 그는 이미 황제의 임신을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 전 만난 그녀의 몸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비가 누구인지는 밝혀졌습니까?”

다른 귀족이 물었다.

“아직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설마 천한 자의 핏줄이라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요, 폐하께서도 최소한의 체통은 지키셨을 테지요!”

헤스턴 공작이 분노하는 척, 그러나 제발 그러길 바라는 어조로 말했다. 아비의 신분이 천하다면 전장에 가 있는 제 아들에게도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곧장 황제에게 알현을 청했다. 다행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알현이 수락되었다. 그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문에 대한 확답을 받아내고, 가능하면 배 속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황제가 도착했다. 그녀는 부른 배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실은 아이 때문에 편한 드레스를 입은 것뿐이지만 헤스턴 공작의 눈엔 모든 것이 고깝게만 보였다.

그는 황제에게 의례적으로 안부를 물으며, 임신에 관한 말을 꺼낼 기회만 노렸다. 다행히, 대화가 겉도는 것을 느낀 황제가 먼저 용건을 물었다.

“짐에게 할 말이라도 있소, 헤스턴 공?”

“실은…… 그렇습니다, 폐하.”

“말씀하시오.”

허락이 떨어지자 헤스턴 공작은 잠시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것 참…….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이지만 세간에 폐하께서 후계를 가지셨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헛소문이라 생각하지만 워낙 큰일이다 보니, 폐하께 고하지 않을 수 없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그의 질문을 들은 황제가 한참 후에 한마디 했다.

“소문이 맞소.”

“예?”

그녀가 순순히 인정하자 헤스턴 공작은 외려 놀랐다. 아란은 아란대로 난감했다. 그녀도 귀족들이 제 수태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인정하려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폐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헤스턴 공작은 아란을 위하는 척하며 비난 아닌 비난을 쏟아냈다. 아란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공이 짐을 이리 걱정해주는 줄은 몰랐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미혼인 주군께서 수태하셨는데, 어찌 신하 된 자로 걱정이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로 가도 목적지만 제대로 찾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공은 짐에게 후계가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오.”

어떻게든 태아에게 흠집을 내려는 헤스턴 공작의 속내가 빤히 보여, 아란도 낯 두꺼운 척 말해보았다. 아직 아이에게 큰 애정은 없지만, 세상에 나오기도 전부터 이런 식으로 푸대접을 받으니 화가 치밀었다.

“물론 기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법도와 순서가 있는 건데 모든 이의 모범이 되셔야 할 폐하께서 이러시면 어찌합니까……!”

아란이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헤스턴 공작이 이리 길길이 날뛰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는 공도 그대의 부인과 혼인하기 전에 사생아를 세 명이나 두지 않았소. 공은 짐처럼 후계가 절실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법도와 순서를 지키지 않았는지?”

그녀의 반격에 헤스턴 공작이 멈칫거렸다.

“그, 그건…….”

“그리고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태아는 엄연히 황가의 성을 물려받을 황족이니 말을 조심하시오.”

아란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공작이 말하는 대로 그녀가 사생아를 낳는 게 황실 법도까지 운운할 만큼 큰일이었다면 처음부터 임신할 마음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란이 세게 나가자 공작은 마지못해 물러나는 척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놀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두 번 용서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녀로서는 드물게 단호한 어조였다. 대공이 자리를 비운 지금, 그녀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지만 아이에 관한 일엔 결코 접고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각오가 여실히 느껴졌다. 황제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아는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폐하. 귀족들은 폐하를 보필하는 신하이며, 또 장차 황손을 모셔야 할 자가 아닙니까. 혈통과는 관계없이 낳으실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는 알 권리가 있다고 여깁니다.”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일을 왜 재촉하는가. 그리고, 짐이 낳은 것만으로도 혈통을 증명하기엔 충분하오.”

아란이 단호하게 헤스턴 공작의 요구를 잘라냈다. 그러면서도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가 찾아온 건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그녀와 아이를 두고 얼마나 많은 말이 오갈지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란은 문득 대공을 떠올렸다. 어린 이즈미 왕족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열이 올랐던 밤, 침실까지 업어주던 그의 등은 넓고 단단했다. 굳건한 척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난처한 일을 맞닥뜨릴 때면 있을 때면 그날처럼 그의 등에 기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란은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아이가 생기면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다더니, 정말 마음이 약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사일러스 공작의 말대로, 적어도 대공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수도로 개선할 때까지는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 일이 있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전쟁 중인 상황에서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적 사령관의 약점을 잡으려는 어떤 자가 저나 아이를 해코지하려 들지 몰랐다. 무엇보다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야 했다. 대공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은 홀로 아이를 지켜내야 했다.

아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폐하, 숨기시지 말고 말씀을…….”

“지금 짐을 다그치는 건가? 때가 되면 어련히 알려주지 않을까.”

아란이 역정을 냈다. 얌전한 황제가 갑작스럽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이라, 공작은 얼이 빠졌다. 그 때 문밖에서 시종장이 고하는 소리가 냉랭한 공기를 깨트렸다.

“폐하, 사일러스 공작께서 급히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십니다.”

시종장이 문밖에서 고했다.

“사일러스 공이?”

아란은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일러스 공작을 안으로 들였다. 그녀와 달리 헤스턴 공작은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남몰래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귀족이라면 몰라도 사일러스 공작은 지금 그에게 전혀 달가운 이가 아니었다.

황제가 반란을 피해 다나르로 갔던 이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완전히 친황제파로 돌아섰다. 게다가 그 역시 유력한 국서 후보 중 한 명이었으므로, 헤스턴 공작은 그를 내심 견제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헤스턴 공께도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알현실로 들어선 사일러스 공작이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헤스턴 공작은 헛기침을 했다.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살피던 헤스턴 공작은, 갑자기 어떤 생각을 떠올리곤 재빨리 두 사람을 살폈다.

사일러스 공작이 등장하기 무섭게 황제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리고 그런 황제를 바라보는 사일러스 공작의 눈빛 역시 더없이 애틋했다.

설마?

그러고 보니 황제는 다나르에 몇 달이나 머물렀다. 그리고 사일러스 공작은 그녀를 보필한다는 이유로 한동안 수도에 걸음 하지 않았다. 다나르는 낭만적인 항구 도시였고, 황제와 사일러스 공작은 한창때의 젊은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생긴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왜 이걸 이제야 생각했을까!

“무슨 일인가.”

아란이 묻자 사일러스 공작이 헤스턴 공작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듣는 귀가 있는 자리에선 말씀드리기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미안하게 되었소, 헤스턴 공작. 오늘 대화는 다음에 마무리하기로 하겠소.”

“……알겠습니다.”

이미 황제의 관심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깨달은 헤스턴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예기치 못한 수확까지 얻었으니 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한시라도 빨리 아내에게 떠벌리고 싶어 서둘러 알현실을 나섰다.

그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아란은, 헤스턴 공작이 사라지자 한결 편한 얼굴로 사일러스 공작에게 물었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공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잘 되었네. 일단 용건 먼저 들어보지.”

그 말에 사일러스 공작이 멋쩍게 웃었다.

“실은, 헤스턴 공작이 알현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폐하를 그의 잔소리에서 구출해드리러 왔습니다. 그가 할 말이 대충 짐작이 가서요.”

“뭐라고?”

실없는 말에 기가 막힌 아란이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웃었다. 사일러스 공작도 머쓱하게 미소지었다. 웃음을 교환한 두 사람은 간단히 안부 인사를 나눴다. 그러다 공작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 이미 그녀의 임신을 알고 있던 그조차 당황스러울 만큼 몇 주 만에 배가 확연히 나와 있었다.

“공은 진작 알고 있었지?”

아란은 저도 모르게 배를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시녀를 핑계 삼아 그에게 했던 거짓말이 전부 제 얘기였음이 들통나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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