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처음 황제의 임신을 알았을 때, 로지나는 대공이 드디어 미쳐서 황제를 수태시킨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최근 변한 대공의 태도와, 임신하고도 태연한 황제의 반응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로지나는 황제와 대공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이런 엄청난 짓을 벌인 두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다만 황제가 배우자도 없이 그 모든 뒷감당을 혼자 짊어져야 하는 것이 가여웠다. 물론 황제는 제 동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이름은 차차 생각해 봐야겠구나.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가보렴.”
아란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로지나가 그녀의 어깨에 가운을 덮어주고는 침실을 나섰다. 혼자가 된 아란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로지나의 생각과 달리, 막상 아란은 변하는 몸 외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로지나가 웬만한 남편들보다 더 살뜰히 챙겨주었고, 아이 역시 건강히 태어나기만 하면 차기 황제로서, 대공가의 유일한 핏줄로서 부족함 없이 자라날 테니 걱정할 게 없었다. 국서가 없어도 아란과 아이의 미래는 완벽했다.
다만, 아이가 커갈수록 이따금 마음 한편이 답답해졌다. 아이는 대공을 아란 곁에 붙들어 맬 수단이기도 했지만, 아란 역시 대공에게 속박되었음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것을 상기할 때면 속이 울렁거렸다.
무엇보다도 한순간의 격렬한 충동만으로 만들기에 생명은 지나치게 무거웠고, 아란은 그것을 미처 몰랐다.
아첨이 조금 섞였겠지만, 로지나가 태어날 아이를 사랑스럽게 묘사할 때도 기분이 이상했다. 애정 없이 만들어진 아이가 그녀의 말처럼 예쁘고 올바르게 자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란은 뒤늦게 제가 벌인 일의 무게를 통감했다.
모후와 부황은 자신이 생긴 걸 알자마자 기쁨에 체통도 잊고 눈물을 보였다는데, 정작 그녀는 제 안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나 하고 있었다.
아란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아이에게 느낀 최초의 감정이었다.
그것이 미안해서라도, 아란은 아이에게 조금씩 정을 붙여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외톨이인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유일한 혈육이고 가족이었다. 아란은 조금씩 부풀기 시작한 배를 쓰다듬었다.
“이름.”
아란이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배를 쓰다듬는 손길도 굳어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몇 번이고 그 행동을 반복했다.
“이름을 생각해보자, 아가야.”
* * *
사일러스 공작이 아란을 찾아왔다. 병력 대다수가 해군인 사일러스 공작가는 이번 전쟁에 군수품을 지원했을 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한동안 수도를 비웠다가 바로 어제야 간신히 돌아온 참이었다.
“일은 잘 마쳤나?”
“예. 덕분에. 참, 이번에 새로 수입하기로 한 차인데 폐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향기가 독특하더군요.”
그가 아란에게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그녀는 공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냄새로 말린 풀의 존재를 눈치챘다. 요즘은 입덧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 후각이 매우 민감해졌다. 평소라면 분명 향긋했을 냄새가 지금은 역하게만 느껴졌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네…….”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건 아닌데.”
아란이 난처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로지나가 창문을 열었다. 아란은 곧장 창가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었지만 한번 시작된 헛구역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난데없는 격렬한 반응에 사일러스 공작은 드물게 당황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아란이 맥없이 손을 젓다가 다시 구역질을 했다.
“전하. 차는 제가 받아두었다가, 나중에 폐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란의 상태를 살피던 로지나가 공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작은 얼떨결에 그녀에게 상자를 넘겼다. 로지나는 그것을 다른 시녀의 손에 들려 보내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러나저러나 남자들은 별 도움이 안 됐다.
차가 담긴 상자가 사라진 후에야 아란은 헛구역질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냄새는 남아있었지만 조금 전보단 나았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내내 식사를 제대로 못 했더니 조금만 무리해도 힘에 부쳤다.
“감기에 걸리셨다고 들었는데, 더 심해진 겁니까……?”
“그, 그렇다네.”
아란이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물론 공작은 그 어설픈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궁의들은 대체 뭘 하는 겁니까?”
“그게 어디 그들의 잘못이겠는가. 그나저나, 요즘 다나르가 몹시 붐빈다고 들었네.”
아란이 얼른 말을 돌렸다.
전쟁 때문에 육로가 막히자 해상 무역이 더 활발해졌다. 규모를 막론하고 모든 항구가 드나드는 배로 붐볐다. 다나르 같은 거대 항구 도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공작이 바빠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벅차긴 하지만 아직은 전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곤란하겠지만 말입니다.”
“이 틈에 또 해적이 들끓을까 걱정이야. 우선은 병력을 있는 대로 지원하겠네. 외국인이 많아지면 치안도 신경 써야 할 테니.”
“감사합니다, 폐하.”
두 사람은 그 후에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후, 공작이 자리를 뜨려 했을 때였다.
“저, 사일러스 공.”
아란이 망설이며 그를 불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란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공작은 끈기 있게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오해하지 말고 듣게. 이건 짐이 아니라 짐의 시녀 이야기인데 짐도 도와줄 방법을 찾지 못해서.”
누가 들어도 본인 이야기였지만 공작은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아주 예민한 주제이니 비밀을 반드시 지켜야 하네…….”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황제는 수치를 몰라야 한다지만, 미혼 여자가 임신 사실을 털어놓자니 낯이 뜨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란은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짐의 시녀가 수태를 했는데.”
“수태라고요?”
사일러스 공작은 하마터면 무슨 소리냐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 뻔했다. 차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한 게 임신 때문이었다니.
큰 소리에 놀랐는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가,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 사내가 전장에 나가서, 이번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말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 중이라고 하더군. 공은 같은 남자이니 짐에게, 아니, 짐의 시녀에게 조언해줄 수 있겠지?”
“못 알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아이를 가졌다면 축하할 일이지요.”
공작이 조금 차갑게 대답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저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그게…… 남자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란은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사일러스 공작은 너무 기가 차서 화도 내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공이야 원래 미쳤다지만, 황제는 비교도 안 되게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말을 들으니 아이를 원한 쪽은 아란 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 손이 떨리고 있었으나 다행히 고개 숙인 아란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크게 심호흡한 그는 아란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녀는 황권을 안정시키고 싶어 하니 대공의 아이를 가져 후계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극단적이었다. 대공이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리 성급할 이유가 없었다. 혼인조차 하지 않고 어떻게 임신 먼저.
“…….”
그는 아란의 배를 힐끗거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남의 이야기를 빌어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내리깐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말하지 마십시오.”
단정적인 어조에 아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장 알려봐야 좋을 게 없습니다.”
사심이 가득 섞인 거짓말이었다. 대공 좋은 일을 시킬까 보냐 싶은 억지와 추한 질투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사일러스 공작이라면 덮어놓고 신뢰하는 아란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믿음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공작은 씁쓸한 속내를 감췄다. 그러면서도 덧붙였다.
“사내들은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라 사소한 이유로도 일을 곧잘 망치니까요.”
바로 지금 자신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것도 중요한 일이지 않나……. 단지 소식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일을 망친단 말인가?”
“사병이면 몰라도, 지휘관이면 누구보다 냉철하게 굴어야 할 사람입니다. 고요한 수면에 굳이 파문을 만들 필요는 없지요. 어차피 돌아오면 전부 알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면?”
“지휘관이 돌아오지 못할 확률은 지극히 적습니다. 그 사내가 귀족이라면 몸값 때문에라도 쉽게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정 내키지 않거든, 최소한 제국군이 완전히 승기를 잡은 뒤에 말하라고 조언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당장 아이가 태어날 게 아니라면요.”
“듣고 보니 공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란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는지. 짐이 참전할 수도 없고 답답해.”
“폐하께서 일으킨 전쟁이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라세르 국왕이 알아서 패망을 재촉한 거지요. 차라리 그가 생선 대가리로 머리를 교체했다면 무고한 라세르 국민들이 희생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살면서 그렇게 어리석은 자는 두 번째군요.”
“생선 대가리?”
그 말이 우스웠는지 아란이 모처럼 소리 내 웃었다. 누구와 달리 공작은 위로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한참 웃던 그녀가 웃는 낯 그대로 물었다.
“그럼 다른 한 명은 누구지?”
“그건…….”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사일러스 공작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입에 칼을 문 그라지만 차마 배 속 아이 앞에서 그 아비를 욕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란은 생선 대가리, 하고 중얼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이 예뻐서 기가 막혔다. 그가 바친 애정의 결말이 고작 이런 것이라도, 그는 여전히 황제를 원하고 있었다. 화는 났지만, 대공이 부재중인 지금 자신이라도 나서서 그녀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아무래도 생선으로 머리를 교체해야 할 사람은 두 명이 아닌 세 명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