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임신을 확인하고, 아란은 며칠간 넋이 나가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대공에게 달려든 건 누구도 아닌 그녀였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얼이 빠졌다.
일단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지나를 비롯해 시녀 중 눈치가 빠른 몇 명은 아란이 이번 달에 월경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미혼인 황제에게 그런 문제를 묻는 것이 무례한 일인 데다, 몸이 약한 그녀이니 달거리를 건너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넘어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로지나는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일이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대공은 이런 일에 실수할 남자가 절대 아니었다.
“향수는 되었다.”
그 말에 로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란에게 뿌려주려던 향수는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드문 아란이 그나마 좋아하던 것이었다.
“그럼 다른 향수를 뿌려드릴까요?”
“아니, 당분간은 향수를 뿌리지 않겠다.”
황제가 향수를 거부한 이유가 단순한 변덕 때문인지, 혹은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인지 살피던 로지나는, 문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콕 집어 말하기 힘들었지만, 아란의 몸 모양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늘 곁에서 그녀를 시중드는 로지나여서 알 수 있는 미묘한 변화였다.
의아한 시선이 아란의 전신을 훑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날씬하다기보단 야위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마른 몸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도드라지는 것이 있었다.
시선은 이윽고 한 곳에 멈췄다.
“…….”
무례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아랫배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지나는 자신이 본 게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도. 그녀는 그만 손에 든 향수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지독한 향수 냄새에 아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뒤늦게 로지나가 허둥지둥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냄새가 다 빠지려면 하루는 침실을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울상이 되어 사과하는 로지나를 보며 아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귀한 향수가 깨진 것보다 그 냄새가 전부 빠질 때까지 침실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더 성가셨다.
* * *
아란은 펜을 들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몇 시간째 그녀는 빈 종이 위에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벌써 며칠이나 이어진 고민이었다.
대공에게 임신을 알려야 할 텐데, 그 소식을 전하려니 새삼 너무 낯설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생겼지만 부모인 두 사람의 관계는 희한하기 짝이 없었다. 대공은 그녀의 남편이나 약혼자가 아니고, 심지어 연인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서로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남보다도 못한 사이인 남자에게 임신을 고하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렵고 난처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다. 아란은 막막한 얼굴로 빈 종이만 바라보았다.
그간 대공에게서는 꽤 여러 장의 서신이 왔다. 매번 시종장이 대필한 형식적인 답장만 받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오직 그녀의 안부만을 물었다. 임신이나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었다. 그것이 아이에 대한 그의 거부감을 드러내는 듯해서 아란은 더 망설이게 되었다.
아직 아란은 아이에게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또한 자신이 멋대로 수태한 아이에게 그가 애정을 가질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 아이가 친부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조금은 두려웠다.
물론 머리로는 하루라도 빨리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만일을 대비하여 지금 당장 아이에게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물려준다 맹세하라며 닦달해야 옳았다.
아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빠르게 편지를 써 내려갔다.
「지난날 짐과 공 사이에 있었던 일로 짐이 수태하였으니 공은 약속한 대로 그대가 아이의 친부임을 인정하고, 장차 아이가 공의 자식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명한다.」
서신을 완성하고 다시 읽어보니 지나치게 딱딱했다. 이런 식으로는 대공의 반발만 살 것 같았다. 아란은 종이를 구겨버리고 새 종이를 꺼냈다. 조금 더 부드럽게 설득할 생각이었다.
그의 안부에 답하는 척, 지금 그녀가 수태로 인해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불편한 몸 상태를 이야기하면 분명 그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제게 가혹하게 대할 때조차 대공은 그녀가 약한 소리를 하면 결국 접어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의 마음은 헤질 대로 헤졌지만 말이다. 그때를 떠올린 아란은 울컥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로아크 대공…….」
이번 편지는 한 줄도 쓰지 못하고 구겨졌다. 아란은 그를 친애하지 않았다.
그 다음 문장들도 연달아 계속 버려졌다. 설득은커녕, 전쟁터에 있는 그에게 사소한 불편함 따위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모양새라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초기라 유산할 가능성이 크다는데, 자칫 아이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없을 것이다. 아직 말하기엔 때가 이른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어떤 걸 적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실은 아이 외에도 하고 싶은 말, 궁금한 말은 많았다. 중독은 괜찮은지, 징후가 좋지 않으면 곧바로 돌아오라든지. 그에게 딸려 보낸 궁의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긴 하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픔을 내색하지 않는 성격을 알기에 더 그랬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오늘도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펜을 내려놓고 말았다.
* * *
궁의는 아이가 생각보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약해빠진 몸에 깃든 데다 대공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아 계속 마음을 졸였는데 한결 불안을 덜게 되었다. 마물에 의한 중독은 타인에게 전염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막상 아이가 생기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선 몸이 약하시니 더더욱이요.”
궁의가 부드럽게 경고했다. 아란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궁의의 말대로 매사 조심했다. 그러면서 수태 사실을 어떻게 공표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은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몇 달만 더 지나면 숨기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아마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겠지.
아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을 쉬세요, 폐하.”
한숨 소리를 들은 로지나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로지나는 아란의 불안함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힘드실 건 알지만, 그래도 아기님도 계시니 좋은 일만 생각하셔야죠. 제가 더 잘 모실게요.”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아란이 힘없이 대답했다. 로지나가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물었다.
“폐하께선 궁금하지 않으세요?”
“뭐가?”
“아기님 말이에요. 전 너무 궁금해요. 황녀님이실까요? 아니면 황자님?”
“글쎄…….”
아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로지나는 둘만 있을 때면 끊임없이 아이에 대해 종알거렸다. 가끔은 지겹기도 했지만, 임신 이후로 부쩍 우울해하는 날이 잦아진 아란에겐 그녀의 긴 수다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폐하께선 어느 쪽을 더 원하세요?”
“음…….”
아란은 이번에도 답을 얼버무렸다. 아이의 성별이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다. 단지 황가는 딸이 유난히 귀하니 아마 아들일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사실 딸이든 아들이든 그냥 자신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전 기왕이면 폐하를 닮았으면 좋겠어요.”
로지나는 진심이었다. 세상에 대공 같은 자는 그 한 명으로 족했다. 기왕이면 황제처럼 너그럽고 정 많은 황녀였으면 했다. 외모도 그녀를 닮으면 분명 사랑스러울 것이다. 로지나는 황궁을 아장아장 돌아다니는 백금발의 어린 황녀를 상상하며 미소지었다.
그녀의 말에 아란도 처음으로 제 배 속 아이를 상상해보았다. 쉽사리 떠오르지는 않았다. 분명 자신과 대공을 닮았을 텐데, 두 사람은 성정만큼이나 외모도 전혀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아란의 상상 속 아이는 대충 뭉친 찰흙처럼 모호하고 괴상한 모습이었다. 두피를 뒤덮은 머리카락은 금발과 흑발이 뒤섞였고, 두 눈 중 한쪽은 매섭게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다른 한쪽은 힘없이 쳐진 짝짝이였다. 성격마저도 난폭한 동시에 소심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란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외양이 어떻든, 그녀와 그를 닮은 존재가 곧 세상에 생겨날지 모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다.
아란의 중얼거림을 제 말에 대한 대답으로 착각한 로지나가 그녀를 설득하려 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를 닮았으면 황녀님이든 황자님이든 분명 미인이 되실 거라고요.”
열심히 제 의견을 피력하는 로지나를 보며 아란이 쓰게 웃었다. 로지나의 말대로, 외양만큼은 자신을 닮아도 좋지 않을까. 물론 얼굴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말라빠진 몸이나 힘주면 똑 부러질 것 같은 골격까지 닮으면 곤란하니까. 그녀는 나름대로 정상적인 모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황가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머리칼은 상상 속 얼룩덜룩한 색이 아니라 백금발일테고, 눈동자는…….
그 부분에서 아란은 제법 고민했다. 자신을 닮은 녹색 눈도 나쁘지 않지만, 부황처럼 선명한 푸른빛이나 모후처럼 신비로운 자색도 좋았다.
“붉은 눈만 아니면 눈동자 색은 뭐든 괜찮을 것 같아.”
“동감이에요.”
로지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생각해두셨어요?”
“이름?”
아란이 되물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귀한 아기님이신데 미리 생각해두시면 좋지 않겠어요? 그…… 대공 전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이름이 없으면 곤란하잖아요.”
“그런가…….”
하기야, 그녀의 이름도 미리 지어진 것이었다. 모후가 아란을 낳기 전에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으로 부황은 아란이 딸일 것을 확신하고는 미리 이름을 지어놓았다고 했다. 아란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로지나는 그런 아란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는 대공의 명은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공이 전쟁터로 향한 이후부터는 더 자주 보냈다.
그러나 로지나는 아직 대공에게 황제의 수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까진 아란이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대공이 이 사실을 알면 분노할 테지만, 그녀는 이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쪽이 아란이라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