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연설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제 지휘관들이 계급순으로 황제에게 인사를 할 차례였다. 가장 먼저 대공이 나섰다. 아란은 약간 쌀쌀맞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장담했던 대로, 오만한 민족에게 라인스터 제국의 권위를 보여주시오.”
“맹세 드립니다.”
그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 그대로 무릎을 꿇고 손등 위에 키스했다. 수도 없이 한 행위인데, 왜 이리 마음이 저린지 알 수 없었다. 아란 역시 담담해 보였지만, 입술이 닿았을 때, 그는 얇은 피부 너머로 전해지는 미묘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대공은 그녀의 첫 전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고 싶었다. 이 전쟁에서 지면, 앞으로 그녀의 치세가 순탄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그가 아란의 만류에도 참전하는 이유였다.
그는 제국군을 믿지 않았다. 대륙을 통치하는 제국인 만큼 군대 규모는 컸지만, 오랜 평화로 그들은 지나치게 해이해진 상태였다. 한때 온 대륙에 떨친 무위는 전부 옛이야기였다. 그러나 타국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곤란했다. 이번 전쟁은 제국이 이빨 빠진 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기회였다.
“무탈히 다녀오도록.”
언젠가 했던 인사를 아란이 다시 말했다. 그것이 꼭 주술처럼 들렸다. 대공은 드물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그 역시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되돌렸다. 아란은 일부러 더 쌀쌀맞게 그를 외면하고는, 대공 다음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헤스턴 소공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지휘관들과 인사를 전부 마치자, 사제들이 군대를 축복했다. 그 후에는 군사들이 친지와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란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된 광장을 바라보았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가 가족, 친구, 연인과 절절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에게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고작 가신들과 간단히 몇 마디 주고받은 게 다였다. 여기 있는 누구도 대공을 위해 온 마음으로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그는 혼자였다.
높은 곳에 서 있는 아란의 눈엔 그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대공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아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망설이다 결국 시선을 내렸을 때, 그가 진군 명령을 내렸다. 그 휘하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물 섞인 환호를 쏟아냈다.
귀가 찢어질 것처럼 소란스러운 가운데, 대공이 마지막으로 아란에게 짧게 묵례했다. 그리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아란은 그 자리에 뿌리내린 것처럼 서서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전쟁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수도군이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합류하기로 예정되었던 연대 하나가 라세르의 선공으로 대패한 것이다. 대공은 싸우기도 전에 패잔병부터 수습할 처지가 되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지만 머릿수가 세 배는 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라세르를 만만히 본 지휘관들이 후퇴 명령을 늦게 내리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컸다. 그나마 미리 실력 있는 용병들을 고용해두지 않았다면 전멸당했을지도 몰랐다.
간신히 살아남은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바라보는 대공의 눈길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첫 전투의 승패는 이어질 다른 전투들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그 첫 전투를 이런 식으로 무력하게 패배했으니, 지금쯤 라세르 군대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을 것이다. 그는 패배의 책임을 물어 연대 지휘관들 모두를 엄벌에 처했다.
“포로로 끌려간 자들이 꽤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무시하기엔 귀족 출신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내버려 두어라. 있어봤자 도움 될 것 없는 자들이다.”
끌려간 자들을 구출하려면 못할 것도 없으나, 그는 이런 곳에서 단 하루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냉소적으로 돌아서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아란이라면 그런 멍청한 자들도 지켜야 할 제국민이라며 마음 아파할 것이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자들을 불러라. 구출 작전을 짜겠다.”
돌아갈 날이 지연되었다는 생각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는 말을 바꾸었다.
다행히 그의 급한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바로 그날 밤, 라세르 측에서 두 번째 기습을 감행했다.
* * *
대공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이미 전령에게 간략한 상황을 전달받았지만, 서신엔 전황이 더 상세히 적혀 있었다. 첫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에 걱정한 것치고는, 제국군은 무난하게 승기를 잡고 있었다.
몇 장이나 이어진 긴 서신은 짧은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났다. 아란은 그 부분을 조금 오래 내려다 보다가, 이내 냉랭한 태도로 시종장에게 건넸다.
“답신은 경이 쓰게.”
짧게 명령하고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그녀는 버릇처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수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평화로웠으나 젊은이들이 떠난 탓인지 예전만큼 활기가 없었다. 그건 황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조용하여 오히려 그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귀족들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궁 분위기가 밝았다. 로지나만 봐도 그랬다. 출정식 전부터 축 처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전장에서 출발한 편지가 오늘 한꺼번에 도착한 덕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생기 넘치는 얼굴이 보기 좋아 아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편지를 받았거든요.”
“그, 갈색 머리에 키가 큰 젊은 기사?”
수줍은지 로지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얼마 전부터 젊은 기사 하나와 가까이 지내더니 그새 깊은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네. 답장을 보낼 때 선물도 함께 보내고 싶은데 뭐가 좋을지 모르겠어요.”
“뭐가 좋을까.”
로지나는 들뜬 말투로 생각해둔 선물 목록을 읊어댔다. 아란은 가만히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흥미 있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로지나의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 애정이 담뿍 묻어나 덩달아 즐거웠다.
그러면서도 아란은 대공의 서신을 떠올렸다. 그와 보낸 마지막 밤들도.
얼마나 넋이 나갔었는지, 그 밤에 벌어진 일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강하고 다정하게 안아주던 손길만 어렴풋이 남았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자신은 미친 게 분명했다. 애당초 몸도 약한 자신이 그 며칠 밤으로 수태할 가능성은 매우 작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매달렸는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란이 다른 생각에 잠겼다는 것을 눈치챈 로지나는 혼자서만 떠든 게 무안했는지 곧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몸은 어떠세요? 이번 감기는 도통 안 떨어지네요.”
“곧 괜찮아지겠지.”
요즘은 툭하면 열이 나고 이상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누가 깨우지 않으면 온종일 잠만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로지나의 목소리가 거의 자장가처럼 들렸다. 약을 먹으면 나아질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평생 달고 살았던 약 냄새가 요즘 따라 유독 거북해서 도무지 목 안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모처럼 밝아진 황궁 분위기에 아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도 그날만큼은 우울한 생각을 떨치고 평소보다 쾌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힘들어도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먹고,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침실에 들자 조금은 외로워졌다.
아란은 그것을 무시하며 침대에 누웠다. 다행히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잠이 쏟아졌다. 잠이 늘고 나서는 우울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는 일이 사라졌다. 이 이상한 감기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아란은 밀려오는 수마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꿈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물을 조금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 사실을 떠올리고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월경을 시작할 날짜가 한참 지나 있었다.
* * *
아란은 로지나에게도 말하지 않고 은밀히 궁의를 불러 제 몸을 살피게 했다. 그녀의 몸을 진찰하던 궁의가 한순간 당혹스러운 침음을 흘렸다. 아란이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어떤가. 설마 짐이 수태를 한 건 아니겠지?”
“수태하신 게 맞습니다, 폐하.”
궁의가 애써 당혹스러움을 숨기며 대답했다. 그녀는 선대 황후의 주치의로 일했던 노련한 의원으로, 뛰어난 실력 덕에 아란의 즉위 후 황궁에 일어났던 대대적인 물갈이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어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수태한 건 기뻐해야 할 일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혼이었다. 어쩌면 원치 않는 아이일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아란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납작해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일까,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
궁의가 조심스레 아란을 불렀다. 그러나 아란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니 역시 의도한 임신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궁의가 무겁게 입을 다물었을 때, 아란이 말했다.
“짐이 이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은 궁의를 더 놀라게 했다. 사생아를 둔 황제는 셀 수 없었지만, 여성이었던 경우에 사생아를 낳는 일은 드물었다. 워낙 임신과 출산이 몸에 무리가 많이 가기도 하고, 황제가 직접 낳은 아이들의 경우엔 계승권 문제도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번엔 아란에게 첫아이가 될 테니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후계로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궁의는 그 모든 생각을 의식 깊이 눌러두었다. 의원인 그녀에게 중요한 건 정치 문제가 아닌 임부였다.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초기엔 워낙 변수가 많습니다.”
“알았네. 당분간은 이 일이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게.”
“알겠습니다.”
임신 초기에 주의해야 할 것들을 일러준 후에 궁의는 은밀히 그녀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감히 황제를 돌아보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황제를 수태시킨 남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낼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황궁 내에서도 아란과 대공의 사이를 아는 자들은 극히 적어 궁의가 아이의 아비를 모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는 몸이 약한 황제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 가장 염려스러웠다. 궁의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