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07화 (107/146)

107화

“아흑…….”

아무리 풀어줬다 해도 이 자세에서 대번에 넣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체중 때문에 입구가 벌어지며 성기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른하던 쾌락의 여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선단을 조금 넣었을 뿐인데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대공 역시 정신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를 꽉 죄어오는 내부 때문에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지금으로선 허리를 추어올리지 않게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윽…….”

그는 아란을 부르려 했으나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그는 다급히 아란의 허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녀를 말리기 위한 그 손은 결국 강하게 그녀의 몸을 지지해 주었을 뿐이었다.

아란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어이 그를 다 품었다. 오랜만의 침입에 놀란 내부가 강하게 그를 자극해왔다. 그마저도 벅차서, 둘은 한동안 그 상태로 멈춰있었다.

“아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황홀함에 그는 감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아란도 딱히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가냘픈 허리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억센 손길에 아란이 얼굴을 한층 더 찡그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이내 정신이 든 그녀는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그는 아직 움직이지 못했다. 이를 악문 그를 보며 아란이 속삭였다.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내 말대로 해줘.”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가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인내도 끊겼다.

* * *

그는 힘없이 늘어지는 몸을 마주 안고 난폭하게 추삽질을 했다. 몇 번이나 파정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가 아래서 치받아 올 때마다 아란은 맥없는 신음만 흘렸다.

아득한 기분에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의 목에 매달렸지만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러면 대공이 더 단단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란이 얼굴을 파묻고 있는 대공의 어깨는 그녀가 흘린 눈물과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욕심을 채우는 와중에도 언뜻언뜻 정신이 돌아올 때면 그는 어김없이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멈추지 마, 계속해…….”

그녀는 힘겨워하면서도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다리를 벌려 끌어당기기도 했다. 그러면 대공은 다시 이성을 놓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아란은 일부러 더, 더 요구했다. 더 거칠고, 더 난잡했으면 했다. 아파도 좋으니 두려움을 전부 날려 보냈으면 했다. 그의 난폭함을 핑계 삼아 그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밤새 이어진 행위는 동이 틀 무렵에야 끝났다. 그때까지도 아란은 용케 기절하지 않았다.

너무 울어 푹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녀가 물었다.

“이렇게 했는데 임신이 안 되면 어떡하지?”

그가 죽고, 아기도 없다면.

이제 그녀는 제 두 다리로 서는 법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대공이 그렇게 만들었다.

“폐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그가 땀에 전 머리칼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아란이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불확실한 것에 매달리는 그 절박함은 그녀 안에 있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증거 같아 그는 기뻤다. 그것이 증오뿐일지라도.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그가 아란에게 품은 소유욕, 질투, 가학심, 그리고 다른 온갖 저열한 감정들은 여전했으나, 그 모든 것보다 죄책감이 앞섰다.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죄인이었다.

“괜찮습니다.”

그가 거듭 속삭였다. 아란이 흐리게 미소지었다. 그의 위로는 다시 들어도 형편없었다.

“그래. 난 어떻게든 잘살 거야. 네가 없어도.”

그래도 아란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의미 없는 위로라 여긴 아란과 달리 대공은 진심이었다. 그가 아는 그녀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라지면 아란은 한동안은 힘들어하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를 대체할 것들을 찾아낼 것이다. 다른 남자든, 혹은 재물이든.

대공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죽을 수 없었다.

지금의 자리를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녀만이 전부였으니까.

* * *

그다음 날, 아란은 대공을 그녀의 침실로 불러냈다.

“왔네.”

아란이 읽던 문서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누가 봐도 불안정했던 어제보다 훨씬 차분한 태도였다. 그녀는 가운 안에 얇은 네글리제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실내는 그리 밝지 않았지만, 제대로 여미지 않은 가운 사이로 도드라진 빗장뼈와 윗가슴이 언뜻언뜻 보였다.

한두 번 본 몸이 아닌데도 그는 새삼 시선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란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날 봐.”

아란이 명령했다. 망설이던 그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가운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러나 뺨과 목덜미가 은은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발긋한 흔적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같은 빛으로 물든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들어와 대공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얇은 네글리제 아래 나신을 그는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시녀들에게 물으니 하룻밤만으로는 임신이 힘들다고 하던데.”

“…….”

아란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네글리제마저 벗었다. 부드러운 천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날 일은 순전히 충동적으로 벌인 거라고 생각했던 대공은 내심 놀랐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은 이렇게 될 걸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부름을 받자마자 피임 효과가 있는 약을 미리 먹어두었지만, 고작 몇 시간 만에 약효가 얼마나 돌 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리 와.”

“폐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그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란이 그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가져다 댔다. 생생히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떨고 있었지만 역시 어제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손 아래서 느껴지는 심장은 여전히 팔딱팔딱 거세게 뛰고 있었다.

“어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

아란은 최대한 의연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성공한 것 같았다. 알몸인 그녀보다 옷을 전부 갖춰 입은 대공이 더 곤혹스러워 보였다.

대공은 한참 후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제 실수였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난잡했던 지난 밤의 모습은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엄격한 어조였다. 실제로도 온종일 그는 어제 일을 자책했다. 아무리 그녀가 도발하고, 유혹하더라도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가 보기에 아란은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살이 조금 올랐다지만 여전히 만지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 아란이 그를 잃을 것을 걱정하는 이상으로, 그 역시 그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겐 아기가 그녀의 생명력을 빨아먹을 기생충 이상으론 생각되지 않았다.

“실수?”

“예. 실수였습니다.”

그가 힘주어 대답했다. 사실은 실수가 아니었다. 아란이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에 전부 알면서도 저지른 일들이었다.

“실수라고……?”

아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두 눈동자에 잠시 노기가 스쳤으나 곧 사라졌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뭐든 상관없어. 넌 오늘도 같은 실수를 하게 될 테니까.”

* * *

마침내 출정식 날이 되었다. 제국의 승리를 예언하듯 날씨는 쾌청했다. 렌스 백작의 목이 걸렸던 바로 그 광장에서 아란은 그녀의 군대를 배웅하기로 했다.

엄숙한 자리인 만큼 그녀는 옷차림을 신경 썼다. 너무 화려하거나 경박하지 않게, 그렇지만 위엄은 살려야 했다. 평소 아란에게 화사한 드레스를 입히고 싶어 안달 난 로지나도 오늘만큼은 군말 없이 짙은 색의 드레스를 골라주었다. 흰 피부와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강조하기 위해 장신구도 최소한만 착용했다.

광장은 병사들과 그들을 배웅하러 나온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란도 내심 놀랐다.

“사람이 엄청 많아요.”

뒤에서 로지나가 소곤거렸다. 긴장한 아란은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를 다스리면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 보았다.

더 놀라운 건 제국군의 숫자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대는 오늘 수도에서 출발해 국경에 도착한 후, 근방 귀족들이 지휘하는 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긴장을 참으며 천천히 단상 위로 올랐다. 시종장이 황제의 등장을 알리자 소란스럽던 광장이 찬물을 뿌린 것처럼 조용해졌다. 아무리 아란이 황제라도 이렇게 많은 시선을 받은 건 처음이라 그녀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 탓에 안 그래도 병약하기로 유명한 그녀는 오늘따라 더 창백해 보였다.

그래도 아란은 꿋꿋이 서서 군대를 격려하고 사기를 드높일 연설문을 읽었다.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발음이 또렷하고 부드러워 듣기 편안했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도 지금은 되레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곧은 자세와 품위 있는 모습은 젊은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아란은 제 약해 빠진 몸이 이런 용도에서나마 쓸모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참전하여 싸울 수 없는 그녀가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갓 소녀티를 벗어난 젊은 황제가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건 꽤 그럴듯한 광경이라, 그 모습을 기록하러 온 예술가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매번 아란의 말에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비에른 후작마저도 오늘만큼은 참된 신하처럼 열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란 역시 기꺼이 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 대공은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바로 오늘 새벽까지도 두 사람은 알몸으로 얽혀 있었다. 아직도 온몸에 희미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며칠 내내 저지른 실수의 증거였다.

그러나 대공의 열렬한 시선과 달리 그를 바라보는 아란의 눈길은 냉랭하기만 했다. 대공이 총사령관인 만큼 대놓고 쌀쌀맞게 대하지는 못하고 이따금 웃어주기도 했지만, 대공은 그녀가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을 알았다.

‘가지 마, 에녹……!’

절정에 달했을 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애원이 귓가에 맴돌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정사 내내 강한 모습을 보이려던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러낸 진심이었다.

‘…….’

그러나 대답 없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왔던 대공은, 결국 몇 시간 후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당연한 듯 제국군 가장 선두를 차지한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잠시간 눈썹을 찡그렸다가 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