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05화 (105/146)

105화

아란이 다시 한번 그의 품에 안기려 했다. 대공은 그녀가 완전히 안겨 오기 전에 가냘픈 어깨를 잡아챘다.

“이제 와서 신사인 척하는 거야?”

아란이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란은 그의 사랑은 믿지 않았지만 그의 정욕은 믿었다. 끊임없이 샘솟아 매번 그녀를 울게 했던 그 열망은 여전히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핏빛 눈동자는 욕망으로 번들거렸고, 어깨를 잡은 손은 뜨겁게 달아올라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폐하께서야말로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겁니까.”

“네가 정말 날 생각한다면 증거를 줘. 네가 죽어도 네 모든 것을 물려받아 날 지켜 줄 아이 말이야.”

그제야 그는 아란이 이러는 이유를 알았다. 제 말을 믿지 못해 불안해하는 그녀가 안타깝고 애처로웠으나 화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제가 죽을 일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아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들끓는 정욕과 화를 억누르느라 대공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아란은 그 말을 무시하고 제 드레스를 벗으려고 했다. 시녀들의 도움도 없이 되는대로 걸친 탓에 매무새가 엉망이었다.

그러나 리본 하나를 제대로 풀어내기도 전에 그에 의해 움직임이 막혔다.

“쓸데없는 짓 마십시오.”

“....”

대공이 쉽사리 넘어오지 않을 것을 안 아란이 태도를 바꿨다. 그녀는 제 어깨를 짚은 그의 손에 뺨을 기댔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럼 내 소원을 들어줘. 어차피 내겐 후계가 필요해. 이왕 낳아야 한다면 네 아이였으면 좋겠어.”

그녀의 속삭임이 너무 달콤해서 대공은 이를 악물었다. 어색하게 손등에 뺨을 비비는 서툰 몸짓에도 아래에 피가 몰렸다.

그러나 아란이 필사적인 만큼 그 역시 완고했다. 두 사람이 정사를 나눈 것이, 아니, 그가 그녀를 강간하지 않은 게 벌써 몇 달 전이었다. 그녀에게 손을 댈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간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아란은 다시 임신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했고, 이번에 관계를 맺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

“못 합니다.”

그는 아란의 어깨를 놓고 그녀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응접실 문을 열었다.

“돌아가십시오. 저택 앞에 계시면 시종이 황궁까지 타고 가실 마차를 내어드릴 겁니다. 배웅해드리지 못하는 무례는 용서하십시오.”

완벽히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아란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후에 귀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뒤늦게 제가 한 짓을 깨달은 탓이었다. 미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란은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이미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지만, 대공 앞에서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을 외면하며, 그는 하염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 상태로 더는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건 아란이었다.

문을 나서기 전, 아란은 마지막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를 나가면, 바로 다른 남자를 찾아갈 거야.”

그 말에 내내 그녀를 외면하던 대공이 아란을 마주 보았다.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물어뜯을 듯이 사납고 맹렬한 눈빛이었지만, 아란은 물러서지 않았다.

“헤시온이라고, 내게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는 남자가 있거든.”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차린 대공은 이번에야말로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란은 뒤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러나 신경은 모두 등 뒤에 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저를 붙잡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이 외에 더는 그를 자극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끝내 그녀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란의 패배를 선고하는 소리였다. 동시에 이 증오뿐인 관계에 종말을 고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그녀는 힘없이 복도를 걸었다. 적막한 복도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거절당한 건 상관없었지만, 그 앞에서 제 밑바닥을 전부 내보였다는 사실이 더없이 비참하고 창피했다. 미친 여자처럼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그저 서둘러 돌아가 침대에 숨고 싶었다.

복도 끝에 다다라 문을 조금 열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문을 거칠게 밀어 닫았다.

벽이 울릴 만큼 큰 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뒤이어 커다란 몸이 그녀를 덮치듯 꽉 끌어안았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고, 귓가에 거친 호흡이 밀려왔다.

저항할 틈도 없이 빙글 시야가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분노한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것을 감출 여유도 없는지 몹시 사납고 초조해 보였다.

“가지 마세요.”

쇳소리처럼 거칠게 그가 속삭였다. 아란이 대답하지 않자 재차 입을 열었다.

“못 보냅니다.”

그가 패배를 선언했다.

그녀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승리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발이 허공에 뜨고, 어느새 올라온 커다란 손이 뒷목을 꽉 잡아 눌렀다. 뜨거운 입술이 무방비하게 벌어진 조그만 입술을 집어삼켰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그는 말 그대로 짐승처럼 달라붙었다. 난폭하게 이가 부딪히고, 끝없이 안을 파고드는 혀가 무자비했다. 숨이 막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어 숨결 한 톨마저 삼켰다. 한계까지 젖혀진 목이 당겨오고 자세도 답답해 몸을 비틀자 더 세게 안겼다. 가슴팍을 두드리던 손 역시 단단히 틀어 잡혔다.

아란은 잠시 눈을 떴다가, 그대로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놀랐다.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당장 이 자리에서 그녀와 흘레붙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시종과 하인들이 사라진 이 복도에서, 가파른 계단에서.

자신이 버둥거릴수록 그의 욕망은 더 활활 타올랐다. 그 증거로 엉덩이 아래서 느껴지는 그의 것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아란은 다소 창백하게 질려 그의 팔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그러자 보답이라도 하듯 그의 몸짓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올라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순간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키스 때문에 그녀는 언제 침실에 도착했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그녀는 침대에 누워 대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얽힌 팔다리에서, 맞닿은 가슴에서 자신을 감싼 뜨겁고 탄탄한 육체가 느껴졌다.

아란은 한순간 덜컥 겁을 먹었다. 핏줄이 저지른 죄의 증거를 빼곡히 달고서, 그녀에게 죄를 범했던 몸이었다. 매 순간 그의 몸이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 의지로 그를 유혹한 지금도 그랬다.

수치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그녀는 조급하게 그의 옷을 벗겼다. 오직 그 일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원하는 상대를 침대로 끌어들인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그러나 막상 맨살이 드러나자, 어쩔 수 없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대공 역시 아란의 떨림을 전부 느꼈다.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은 눈을 보며 그가 속삭였다.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이 잔뜩 찌푸려진 채였다.

“폐하.”

그 한마디를 하느라 그는 모든 인내를 끌어써야 했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녀가 마음을 바꾼다면 물러설 수 있었다. 아란이 다른 남자에게 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는 그녀가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창백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도망가길 바라기도 했다. 오랫동안 눌러 참은 정염이 어느 정도일지, 그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어 두려웠다.

자각이 없던 예전에도 미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을 정도였다. 하물며 그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지금에 와서는…….

“이제 와 물릴 생각은 없어.”

잠시 숨을 고르던 아란이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제 속을 꿰뚫어 본 듯한 말에 그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호기로운 어조와 달리,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 아란은 그의 가슴팍을 짚은 손에 멋대로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한 자신이 도망치기 전에 제 옷마저도 벗었다. 손이 떨려 뜻대로 되지 않자 오만한 얼굴로 대공에게 턱짓했다.

잠시 망설이던 대공이 엉성한 매듭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드레스가 완전히 벗겨지고, 속옷마저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아란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시종의 시중을 받는 황제답게 당당하게 굴고 싶었으나, 막상 그의 앞에서 맨몸을 보이게 되자 옷을 벗지 않고 일을 치르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는 후회가 들었다. 알몸이 되니 형편없이 떨리는 게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피부를 맞대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입자고 말하기도 어색했다.

그녀는 힐끔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그녀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가파르게 위아래로 솟았다 꺼지는 양 가슴을 볼 때는 붉은 눈이 음습한 욕망으로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란은 두 팔로 몸을 가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의 바지춤에 손을 대 아까부터 흉흉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꺼냈다.

차마 아래로는 시선을 내리지 못하고 손으로만 잡았지만, 그 크기는 여실히 느껴졌다. 이게 제 안을 몇 번이나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심호흡을 한 그녀는 그것을 성급하게 자기 안쪽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을 헤집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그는 아란을 말렸다. 이미 몸이 단 자신과 달리 그녀는 아직 메마른 채였다.

그는 소름이 돋은 피부 위로 입술을 내렸다. 뺨과 턱을 지나 목덜미, 어깨와 쇄골, 그리고 가슴의 정점까지, 느릿하지만 집요하게 움직였다. 습하고 야한 소리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그대로 아란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핥고 빨았다.

아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무얼 하든 미동도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려 했지만, 점점 배 아래가 간지러워졌다. 어찌 됐건 그에게 익숙한, 그만 아는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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