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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104화 (104/146)

104화

이렇게 밝은 시간에 그의 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원래도 그녀는 그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옷을 벗는 일이 거의 없었고, 어쩌다 벗을 땐 성급하게 굴어 그 몸을 바라볼 틈을 주지 않았다.

이제야 그녀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의 몸엔 어린아이가 악의 없이 해놓은 낙서가, 혹은 아주 긴 세월을 살아온 고목 껍질 같은 흔적이 가득했다.

아니, 그런 낭만적인 단어로 표현하는 건 기만이었다. 그건 전부 그녀의 핏줄들이 저지른 죄의 증거였다. 가장 위에는 그녀의 응징이 선명했다.

그녀는 억지로 그것들을 무시하며 그의 맨몸을 훑었지만, 궁의가 말한 붉은 반점은 없었다.

“돌아 서.”

그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제야 그녀는 그의 허리 쪽에 있는 붉은 반점을 볼 수 있었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곳을 훑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그의 전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란은 그가 긴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우월감도 느끼지 못했다.

“정말로 중독된 거야……?”

“궁의에게 들으셨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였다. 아란은 울컥했다.

“그게 중요해? 왜 숨겼어?”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잘 치료 받으면 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아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거칠게 그를 돌려세워 얼굴을 마주했다. 녹색 눈이 드물게 격렬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죽으면 난 복수도 못 하게 되는 거잖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야. 그것만큼 허망한 일이 어디 있어?”

그녀의 뜨거운 증오가 생생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죽는 건 허락 못 해. 넌 끝까지 살아서 내 곁에서 괴로워해야 해.”

재회한 이후로, 아란은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늘 제 죽음만을 상상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느꼈다. 심하게 앓을 때마다, 나을 수 있다며 뺨을 쓰다듬어주면서도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부모님의 눈빛을. 응석을 전부 들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함을 숨기지 않는 궁 안의 사람들을 말이다.

아란은 그때마다 살아서 그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살고 싶어 했던 건 어쩌면 그 탓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편해지기 무섭게 그녀는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대공의 몸 안에는 생명을 갉아먹는 독이 퍼지고 있었다. 아란은 그를 노려보던 시선을 떼어냈다.

“이번 출정에서 빠져.”

“제가 없으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집니다. 저 역시, 의무를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죽을 생각이야?”

“전 안 죽습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복수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죽음으로 도망칠 수는 없지요.”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란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옷을 주워 그의 맨몸에 던졌다.

“누굴 바보로 알아?”

“맹세하겠습니다. 폐하께서 허락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겠다고.”

불안해하는 아란에게, 대공이 온 마음을 다해 맹세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대단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란은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달리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저렇게 맹세하고도 막상 최후의 순간이 오면 그는 지금처럼 담담한 눈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란은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의 뺨을 때렸다. 제법 매서운 소리가 났다.

“죽으면 안 돼.”

손바닥이 얼얼한 것도 느끼지 못한 아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서슴지 않고 뺨을 때리던 기세와 달리 목소리는 초라하게 떨렸다. 그것을 인지하자 떨림이 몸 전체로 번졌다. 눈가부터 뺨까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죽으면 안 된다고…….”

“폐하.”

뺨을 얻어맞은 것보다 아란이 우는 것에 더 놀란 대공이 그녀를 달래려고 들었다. 그는 익숙하게 조그만 어깨를 끌어당겼다. 뜨거운 맨가슴에 젖은 뺨이 닿았다. 맹렬하게 뛰는 심장과 뜨거운 체온에선 생기가 넘쳐서, 아란은 이 몸을 독이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참전 취소해.”

“당장 위험한 건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장엔 군의관들이 있고, 저를 담당할 군의관이라면 나름대로 실력이 쓸만할 겁니다.”

아란이 그를 밀쳤다.

“누가 널 걱정해?”

그녀는 제가 눈물이 나는 이유를 몰랐다. 다만 막막한 기분이었다. 물론 언젠간 그를 내칠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죽고 싶으면 네 마음대로 해. 그냥 죽어버려. 꼴도 보기 싫었는데 잘 됐어.”

더 그를 마주할 수가 없어, 아란은 방을 뛰쳐나왔다.

대공은 또 자신을 속였다. 앞에선 굴종하는 척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은 전부 숨기려 들었다. 그가 기만하는 줄도 모르고 자신은 그의 등에 업혀 약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었다. 아란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 * *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아란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억지로 일 생각을 했다.

아란은 며칠 후 있을 출병식을 떠올렸다. 그날, 그녀는 위엄있는 모습과 다정한 연설로 군사들의 사기를 돋울 생각이었다. 자신은 검을 휘두르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건 처음 출병하는 군사들의 두려움을 달래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서 있을 대공을 생각하자 다른 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중독된 몸으로 전장에 가겠다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독이든 전쟁이든, 평범한 사람이라면 응당 두려워하고 꺼릴 일이었다.

하물며 그는 얼마 전까지 아란의 명으로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음식도 잘 먹지 못했었다. 평소와 다른 몸 상태로 잠시 잠깐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적군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아란은 발밑이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마치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아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그랬듯, 그녀는 그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더 확실한 답이 필요했다. 이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몸은 의지를 거부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로지나조차 대동하지 않고 황궁을 나섰다.

이전에도 밤중에 혼자 대공의 저택으로 달려갔던 적이 있었다. 두려움으로 망설이던 그때와 달리, 뜨거운 분노로 가득 찬 지금 그녀는 거침없었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비병을 지나치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시종장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대공저로 들어섰다. 마침내 조금 당혹스러워 보이는 표정의 대공이 마주한 후에야 아란은 걸음을 멈췄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물었다. 그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얼굴은 말끔하고 목소리는 또렷했다.

“용건이 없으면 못 올 곳인가?”

아란이 차갑게 대답했다. 대공은 어쩔 줄 모르며 아란의 뒤를 쫓던 사용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고는 그녀를 응접실로 들였다.

“이 밤에 혼자 돌아다니시는 건 위험합니다. 차라리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뭐든 그대만큼 위험할까.”

대공의 얼굴이 굳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을 말이었으나, 사실 그는 그녀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처럼 그녀는 호위도, 시녀도 없이 혼자였다.

아란은 그를 불렀어야 했다. 한마디만 하면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이 달려갔을 것이다

그는 진작 그녀에게 제 모든 권리를 넘겨주었지만, 지금만큼은 다시 그녀를 통제하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치밀었다. 그것이 아주 쉽다는 것을 알기에 충동은 거셌다.

그는 화를 눌러 참으며 눈앞의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제답게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로 서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조금만 강압적으로 굴어도 순식간에 꺾일 기상이었다. 조금 전 그녀의 입으로 말했듯, 아란에게 가장 위험한 건 그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행동은 말과 다르게 그 사실을 전부 잊어버린 듯했다.

이곳은 황궁이 아니었다. 대공저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오롯한 그의 공간이며, 아란이 몸을 지킬 수단 하나 없이 발을 들이기엔 위험한 곳이었다.

물론 그가 아란을 약탈했던 건 대부분 황궁이었지만, 그때도 최소한 타인 앞에서는 그녀의 자존심을 뭉개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든 대공저의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밤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어둠이 숨겨주는 시간이었다.

제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 줄도 모르고, 아란은 겁도 없이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그게 그의 충동을 다시 부채질했다. 물론 이전처럼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런 위험천만한 짓은 못 하게 하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 다급했기에 여기를 빈 몸으로 왔단 말인가. 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의 인내심이 그리 깊지 않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아란이 말이다.

“난 네 말을 믿을 수 없어. 증거가 필요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이야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대공은 그녀의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온전히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가 정중하게 대화를 거절했을 때였다. 갑자기 아란이 그의 품에 뛰어들어 두 팔로 목을 껴안았다. 그리곤 곧장 입 맞추려 했다.

안타깝게도 키 차이 때문에 까치발을 해도 입술이 닿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아 내렸다.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대공은 너무 놀라 밀어내는 것을 잊었다.

서툴게 입술이 겹쳐졌을 때, 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

뾰족한 혀가 꽉 다물린 입술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공간을 내어주지 않자 아란이 더 깊이 입술을 맞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그녀를 밀쳐냈다. 너무 다급하게 밀친 나머지 아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아란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대공을 바라보았다. 거절당할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넌 수도 없이 날 범해놓고, 나는 그러면 안 돼?”

그제야 대공은 그녀가 악에 받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답지 않게 눈망울이 흐린 것이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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