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번 전쟁은 지난번 대공을 서쪽 국경으로 보내 야만인들을 처단시킨 일이나, 사일러스 공작에게 병력을 지원했던 일과는 달랐다.
제국은 아주 넓었고, 자잘한 전투나 짧은 전쟁은 일상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제국이 마지막으로 타국과 공식적인 전쟁을 치렀던 것이 벌써 80년 전 일이었다. 그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경제나 문화를 비롯한 사회 전반적으로 다시 없을 황금기를 누렸지만, 그만큼 군대 기강은 해이해져 있었다.
물론 다른 귀족들이 확신하듯, 아란도 제국이 이번 전쟁에 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국경 근처의 성 몇 개를 빼앗기는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지금은 멸망한 다른 제국들의 역사가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제가 즉위한 동안에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사일러스 공작이 말했던 극한의 두려움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몰아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간 제국의 칼날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이니 두려워 마십시오.”
“꼭 이겨. 어차피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네가 죽는 것보단 적을 죽이는 게 낫잖아.”
갑자기 대공이 웃었다. 억누르고는 있지만 맞닿은 몸으로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가 오해라도 할까, 아란은 얼른 덧붙였다.
“넌 너무 밉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까 죽으면 안 돼.”
“예. 온전히 돌아와 죽을 때까지 폐하의 체스 말로 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 말을 듣자 거짓말처럼 두려움이 조금 가셨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아란의 침실에 도착했다. 번을 서던 시녀들이 대공에게 업혀 온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란은 그의 등에서 내려와 시녀들의 부축을 받았다.
곧장 침대에 누운 그녀는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졌다.
* * *
날이 밝기 무섭게, 아란은 라세르와 국경이 닿아있는 땅의 영주들에게 전쟁에 대비할 것을 일렀다. 재위 기간이 2년도 안 되는데 이리 다사다난할 수가 없었다.
아란 외에도 황궁의 모든 사람이 몇십 년 만에 찾아온 전운에 흥분한 상태였다. 이러다 아란은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진이 빠질 것 같았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수도와 국경의 거리가 먼 덕에 수도 분위기가 비교적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 평소와 다름없는 수도를 굽어보면 잠시 복잡한 상황 같은 건 잊을 수 있었다.
전쟁의 화마가 저 평화로운 도시까지 번지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란은 가느다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형식상 라세르에 보냈던 마지막 경고는 예상대로 무시당했다. 다행히 며칠 전, 그녀는 이즈미 국왕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언제 암살당할지 몰랐다. 우선은 그를 안전한 곳으로 빼돌린 후에, 라세르에 선전 포고를 할 생각이었다.
아란은 전쟁에 관련된 건 전부 대공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주변국들의 동태를 살피고 수도로 피난 올 민간인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늘 그랬지만 최근 대공은 정말 바빴다. 그날, 대공이 그녀를 침실까지 업어준 날 이후로는 간혹 중간보고를 올릴 때를 제외하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란은 그 사실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원래 두 사람은 대공이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 사적인 시간을 함께 보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개전을 선언하기 직전까지도 대공에게 관심을 그리 두지 않았다.
그러다 군사들이 출정하기 며칠 전,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황궁 구석에서 궁의가 대공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얼굴이 낯익은 그 궁의는 분명 아란이 대공저에 보냈던 자였다.
아직도 아픈 건가?
출정이 코앞인데 그의 몸에 이상이 있다면 곤란했다.
아란은 무심코 그곳으로 가려다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 궁의 역시 대공 앞에서 몹시 저자세였다. 먼발치에서도 그가 쩔쩔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기까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궁의의 태도가 사뭇 묘했다. 그는 무슨 명령이라도 따를 듯 굽신거리면서도 이따금 고개를 세차게 젓고 손발을 크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 같았다. 아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의의 얼굴이 몹시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둑처럼 기척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당장 쓰러지는 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치료를 꾸준히 받으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들은 아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료받지 않으면 죽는다니, 누가?
“전장에도 군의관은 있다.”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으십니까……! 어떤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전장에서 제때 약을 챙겨 드실 시간이나 있겠습니까?”
궁의는 제법 완강했다. 그러나 결국 대공을 설득하는 건 실패한 것 같았다.
냉정하게 그의 말을 거절한 대공이 지체없이 그 자리를 뜨자, 궁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대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란은 서둘러 궁의에게 다가갔다.
“로아크 대공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대공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뒤늦게 아란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아, 폐하……!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허둥거리며 인사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공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아. 누가 치료를 받는다는 거지?”
“그것이…….”
궁의가 말꼬리를 흐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게, 눈치 없는 아란이 보기에도 굉장히 수상했다.
“왜 말을 못 하느냐?”
“별일은 아니고, 예전에 대공 전하께 지어드린 약에 관해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약?”
“예. 그 발진을 낫게 하는 약 말입니다.”
“그게 언제 이야기인데, 아직도 낫지 않았다는 말인가?”
“저도 노력하고는 있지만 이상하게 차도가 느려…….”
그녀는 궁의의 말을 끊고 명령했다.
“그가 먹는 약을 짐에게 보여라.”
“예?”
“몸이 약한 것도 아니고 한창때의 사내인데 왜 차도가 없다는 거지? 어쩌면 약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으냐. 짐이 다른 의사에게 보여 원인을 찾겠다. 곧 출정해야 하는 사람이니 사소한 질병이라도 그냥 두어선 안 된다.”
“…….”
궁의가 눈알을 굴렸다. 아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감히 짐을 속일 생각은 마라. 무슨 문제인지 고해.”
궁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황제보다야 대공이 훨씬 무섭다. 그러나 당장 앞에 있는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실은…….”
제가 아는 사실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그는 오늘부로 궁정 의사직을 그만두고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조만간 대공에게 죽든, 황제에게 죽든,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말을 마친 그는 힐끔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의외로,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겼을 뿐이다.
“중독되었다면, 당장 죽는 건가?”
“그건 잘 모릅니다. 치료를 잘 받으면 어쩌면 여기서 더 나빠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홀하면…….”
궁의는 말끝을 흐렸지만 아란은 그 뒷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알겠다. 그리고 이 일은 지금껏 그랬듯 비밀에 부쳐야 할 것이다. 궁의는 실력보다도 무거운 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예…….”
“그리고 네 신변은 짐이 보장할 테니 너무 겁먹을 것 없다.”
그녀의 말에 궁의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극적인 표정 변화가 우스울 법도 했으나 아란의 관심은 이미 궁의를 떠났다.
중독이라고…….
그건 그녀가 올해 들은 말 중 가장 재미없는 농담 같았다.
* * *
아란은 궁의가 한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지금껏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도 멀쩡히 잘 살아왔던 그가 이제 와 죽을 수도 있다니, 말도 안 됐다.
그녀는 궁의가 오진을 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가 굳건하다는 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싫어도 그는 아란이 가진 유일한 것이라, 망가지거나 사라져서는 안 됐다.
아란은 바로 그날, 은밀하게 대공을 불러냈다. 평소처럼 무덤덤한 낯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란은 말없이 그의 몸을 훑었다. 어딜 봐도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뜸 명령했다.
“벗어 봐.”
난데없는 명령에 대공은 드물게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아란에게 없었다. 무뚝뚝한 낯으로 당혹감을 감춘 그가 대답했다.
“대낮에 보실만한 건 못 됩니다.”
“내가 지금 네 몸이나 감상하자고 이러는 줄 알아?”
아란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개처럼 기어보라는 명을 내렸을 때보다 난처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빨리.”
재촉에도 그가 가만히 서 있자 조급함을 못 이긴 그녀가 직접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대공은 못내 당황했으나, 그녀가 욕망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놀라 가만히 있는 사이, 아란은 셔츠를 제외한 상의를 모두 벗겨버렸다. 뒤늦게 대공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놔.”
아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폐하.”
“놓지 않으면 다시는 널 안 볼 거야.”
어설픈 협박에 괴로운 듯 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그 표정마저 지우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벗겠습니다.”
대공이 묵묵히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아란은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제풀에 놀라 뒷걸음질 쳤을 때,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옷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얇은 셔츠 한 장만을 입고 있는 대공을 보자 민망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아란은 괜히 더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턱짓했다.
셔츠 단추가 하나둘 풀리고 마침내 늘 그녀를 유린했던 육체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아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의도 벗어야 합니까?”
난처해하던 사람답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공이 물었다.
“돼, 됐어……!”
아란이 진저리를 치며 쏘아붙였다. 쓸데없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의 몸으로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