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 모습을 보며 아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저 패기 하나만큼은 조금 부러웠다.
아란의 선조들은 대대로 무인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통해 작고 힘없던 나라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국으로 재탄생시켰다. 그 피를 이어받았으니 아란에게도 조금은 투쟁심이 있을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그런 기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란은 라세르의 왕제를 생각했다. 온유해 보였지만 안에 칼날을 감추고 있었던 그를.
아란보다 최소 두 배는 나이가 많을 그가 어수선한 황궁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녀의 어설픈 허세 역시 전부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욕적인 방법으로 전면전을 선포해 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라세르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강해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제국과 맞먹으려 들 줄이야.
실의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라세르가 야욕을 드러냈으니 서둘러 대응해야 했다.
그 뒤로도 참전과 관련하여 은근한 보상을 요구하는 귀족들을 연달아 상대하고 나자 그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아까 열이 내리는 약을 먹어 어지러운 건 조금 가셨지만 탈력감이 심했다
침실로 향하는 대신, 아란은 홀로 집무실에 앉아 이즈미 국왕에게 이 비보를 알리는 친서를 썼다. 어린 자식들을, 장차 그의 뒤를 이을 후계들을 한순간에 잃은 그의 기분이 어떨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국왕인 그 역시 위험했다.
아란은 무거운 마음으로 친서 끝자락에 인장을 찍었다.
처음에 이즈미 국왕의 청을 거절했더라면 아이들은 아직 제 부모 곁에서 목숨을 부지했을지도 모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굳이 먼 길을 보냈을 터였다. 아란은 라세르 왕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자신에게도 어린 손자가 있으면서 어떻게…….
죽은 왕족들은 모두 라세르의 왕세손보다도 어린 나이였다.
아란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뒤늦게 온종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문밖에 있을 시녀들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아, 흐느낌을 죽였다.
슬픈 와중에도 그녀는 라세르 왕족들을 향한 혐오를 느꼈다. 차라리 그들이 이즈미 국왕의 목을 베어 보냈다면 상황은 더 심각했을지언정 지금처럼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선 그보다 더 지독하고 잔인한 폭력이 필요했다. 제가 대공에게 채찍을 휘둘렀던 것처럼 말이다.
아란은 늘어지려는 몸을 억지로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하늘은 어두웠지만 곧 동이 틀 시간이었다. 내일도 종일 바쁠 텐데, 제대로 일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쉬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 잠이 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도저히 침실까지 걸어갈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책상에 손을 짚고 로지나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폐하? 아니, 괜찮으세요?”
“부축해 줘.”
로지나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이 순간, 아란은 그녀가 보통 체구의 여자라는 사실이 조금 아쉬워졌다. 아주 덩치가 컸다면 업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지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나섰을 때, 아란은 그 근처에 서 있던 대공을 발견했다.
그는 발갛게 부어오른 아란의 눈가를 보았다. 아란은 시선을 내려 충혈된 눈을 감추며 딱딱하게 물었다.
“왜, 공도 짐과 흥정하러 왔나?”
그러나 심신이 너무 지친 탓인지 평소와 같은 독기는 없었다.
“몸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새삼.”
그를 상대할 힘도 없어서, 아란은 로지나를 재촉해 서둘러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며 몸이 허물어지려 했다.
로지나 덕에 겨우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계속 걷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내키지는 않지만 시종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불편하다는 핑계로 시종들을 가까이 두지 않은 게 아주 조금 후회되었다.
아란은 로지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시종을 불러줘.”
“예.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로지나는 대공의 눈치를 살피다 시종을 부르러 달려갔다. 아란은 비척거리며 복도 벽에 몸을 기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란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왜? 네가 대신 시종이 되어주려고?”
대공은 말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그가 몸을 돌려 몸을 낮췄다. 업히라는 뜻이었다.
아란은 잠시 로지나가 돌아올 시간을 가늠했다. 얼마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것조차 기다리기 벅찰 만큼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그의 등에 업혔다. 자세는 다소 어정쩡했지만, 중심은 안정적이었다.
“로지나가 화를 내면 어쩌지.”
“시녀의 사정까지 살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란이 중얼거리자 대공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요즘 그녀 앞에서 납작 엎드린 상태라고는 하나, 이럴 때 보면 천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따지고 보면 네 말이 맞겠지.”
“…….”
대화가 끊겼다. 성인 여자를 업었는데도 힘들지 않은지, 대공은 숨찬 기색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란은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지친 몸을 늘어뜨렸다.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갑자기 그가 불쑥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눈을 깜박이는데 그가 슬쩍 덧붙였다.
“수행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즈미 국왕조차 세작이 끼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어차피 그 아이들은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 걸 보면 라세르는 언젠가 제국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곳 종자들은 워낙 탐욕스럽고 호전적인 자들이니까요.”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한 그녀는 기가 막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야?”
아란의 핀잔에 대공은 잠시 머뭇거렸다. 살면서 위로를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거의 없었으니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이번 일을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정곡을 찔린 아란이 동요했다. 그렇게 티가 났을까. 속내를 숨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지만, 감정적인 말을 내뱉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자 대공도 묵묵히 걸었다. 침실까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있었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아란은 자신을 떠받친 등을 내려다보았다. 불편하지만 익숙한 등이었다. 조금 더 높은 체온도, 안정적인 걸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란은 문득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뭐가 그리 서글픈지 간산히 추슬렀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오려 했다.
과거의 자신은 아프고 힘들 때마다 그에게 업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곤 했었다. 그러면 그는 귀찮아하면서도 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의 등에 업혀 엄살을 떨다 보면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그때를 떠올리자 마음이 한없이 약해져, 그녀는 결국 속내를 흘리고 말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내가 지키려고 하는 건 왜 자꾸만 망가지는 건지 모르겠어.”
거기까지 말한 아란이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삼켰다가 내쉬었다.
“너도 그렇…….”
무심결에 중얼거리던 그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아란은 대공을 세상 누구보다 증오했지만, 그는 그녀가 지키지 못한 것 중 가장 처참하게 망가진 자이기도 했다. 차마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이즈미의 어린 왕족들을 죽인 사람은 폐하가 아닌 라세르 국왕입니다.”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척, 대공이 건조하게 말했다.
“남 탓을 하고 싶지는 않아.”
“지나치게 자책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전에 말씀하셨듯이, 저를 망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이니 그 일에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전 진작 죽었을 겁니다. 폐하께서 제 목숨을 지켜주셨지요.”
차라리 자신이 부모와 함께 사형당하는 게 두 사람 모두에게 더 나은 결말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쓰기보다 그냥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는 언젠가 아란이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아무리 후회해도 과거가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요.”
아란이 힘없이 웃었다. 누구보다 과거에 얽매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스웠다.
“살면서 들었던 위로 중에 가장 형편없어.”
그러나 그 형편없는 위로가 그녀를 청승맞은 자책에서 꺼내 현실을 일깨웠다. 아란은 당장 닥친 일을 떠올렸다.
“……과거 따윈 돌아보지 않는 우리 대공 전하가 볼 땐 어때? 전쟁이 빨리 끝날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라세르의 병사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의 땅은 척박하니 오래 전쟁을 치를 자원이 없습니다.”
“그래. 그런 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가서 혼쭐을 내줘.”
“예.”
따로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아란은 그의 참전을 당연히 여겼고, 대공 역시 그랬다.
“다들 참전을 대가로 원하는 것들이 많던데, 넌 뭘 원해?”
“분수를 모르는 자들에게 폐하의 권위를 내보이길 원합니다.”
아란이 피식 웃었다.
“고작 그게 다야? 넌 두렵지도 않아?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곳이잖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그의 목소리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는 문득 지금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 얼굴에 정말 한 점 망설임이 없는지, 그 눈빛은 목소리처럼 굳건한지.
아란의 침묵이 길어지자 그 뜻을 오해한 대공이 덧붙였다.
“최소한만 죽이고 끝내겠습니다.”
“넌 정말…….”
궁금증이 싹 날아갔다. 그런 걸 궁금해한 자신이 멍청했다. 그가 전쟁 따위를 두려워할 리 없다. 아란은 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애매한 한숨을 내쉬며 그의 등에 뺨을 더 깊게 묻었다. 그 등은 너무 넓고 단단해 매번 그녀를 떨게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지지대였다. 그녀의 몸이 밀착되자 탄탄한 등 근육이 잠시 움찔거렸다.
“나는 무서운데.”
아란이 속삭였다. 이리 쉽게 속내가 흘러나오는 걸 보니 몸처럼 마음도 약해진 모양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가장 솔직한 감정의 밑바닥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은 대공뿐이었다. 비록 그녀의 의지로 내보인 적은 거의 드물고, 대부분 그가 강제로 파헤쳐 꺼내 본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두려움을 전부 가지고 갔으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