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대공이 이 순간 떠올린 건 하나였다. 아란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벌을 받았다며 기뻐할지, 아니면 신경조차 쓰지 않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다정하니 아주 조금은 자신을 동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를 받으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지?”
그러나 그는 이대로 얌전히 죽을 생각은 없었다. 아란에겐 아직 자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죽거나 못쓰게 되면, 난 다른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들일 거야.
서툴게 협박하던 아란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대공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도 그는 아란이 다른 남자의 것이 되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궁의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잔뜩 몸을 움츠렸다.
“자,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알겠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 이 일은 당분간 폐하께 비밀로 해두어라.”
대공의 명령에 궁의가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따로 말씀드리겠다.”
“알겠습니다.”
궁의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대공은 제 건장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몸에서 병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점이 있다는 등허리 부근을 쓸어도 별다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보았던 중독자들을 떠올렸다. 허약하고 생에 대한 의지가 없는 자들일수록 일찍 죽었다. 자신은 건강하고 의지 역시 강하니 적어도 몇 년은 괜찮을 것이다. 그는 조급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국외 정세가 시끄러운 만큼, 황궁을 방문하는 외국 사절들이 부쩍 늘었다. 수수한 옷을 선호하던 아란도 그 탓에 차려입는 날이 잦아졌다.
오늘 그녀는 진주로 장식된 푸른 드레스를 입었다. 선명한 색채가 병약한 느낌을 가려주었다. 대공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를 장식한 티아라를 짧게 스쳤다.
아란은 위엄있는 모습으로 황궁을 찾기로 한 방문객들을 기다렸다. 이번엔 사절이 아닌 조금 더 특별한 손님들이었다.
일전의 협상에서 라세르는 이즈미의 자치권을 보장하기로 약조했지만, 이즈미 국왕은 반강제로 이루어진 타협이 불안한지 승계 서열이 높은 왕자와 왕녀들을 제국에서 맡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즈미의 원병 요청을 거절한 일에 은근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아란은 그의 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오늘은 그 왕족들이 제국으로 오는 날이었다. 비록 국권을 잃었지만 오랜 우방국의 왕족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아란은 손수 그들을 맞이하기로 하였다.
이즈미 왕족들이 거의 도착했다는 말에 아란은 서둘러 본궁을 나섰다.
그녀가 성문에 다다랐을 무렵, 때맞춰 커다란 마차가 황궁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 안에 있을 이즈미의 어린 왕족들을 생각하며 아란은 미소를 지었다. 낯선 나라에 와 겁먹었을 아이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아란이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마차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녀를 뒤따르던 시종장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왕족이어도 황제를 알현할 때는 응당 빠르게 마차에서 내려 인사를 올리는 게 맞았다.
열리지 않는 마차 주변을 맴돌던 이즈미 측 수행원들이 아란을 보고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화, 황제 폐하…….”
“먼 길 오느라 노고가 많았소.”
아란은 마차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녀의 등장으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는데도, 마차에선 누구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빈 마차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기척조차 없었다. 아란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불쾌감보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즈미의 왕족들은 어서 나와 황제 폐하 앞에 예의를 갖춰라.”
결국, 시종장이 마차로 다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자 근엄하게 꾸짖었다.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망국의 어린 왕족들을 거두어 주셨더니, 이즈미는 은인에게 보답은커녕 예의조차 갖출 줄 모르는가!”
이즈미 측 수행원들이 전부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시녀 한 명이 슬며시 일어나 마차 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저의 어린 주인들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불길했다.
그리고 이 자리의 모두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아란을 대신해 화를 내던 시종장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만.”
아란이 문득 앞으로 나섰다.
“마차 문이 잠겼느냐?”
“예. 그래서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녀가 어쩔 줄 모르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문을 떼어내라.”
아란의 명에 기사들이 마차에 매달려 문을 떼어냈다.
그러자 안쪽 문에 매달려 있던 듯한 한 소녀가 스르륵 마차 바깥을 향해 쓰러졌다.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 한 명이 반사적으로 소녀를 붙잡았다. 다소 거친 손길이 불편할 법도 한데, 소녀는 미동도 없었다. 기사의 품에 맥없이 늘어진 모습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소녀를 향해 다가서려다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소녀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아란도 창백한 편이었지만 눈앞의 소녀는 말 그대로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굳게 감은 눈꺼풀과 살짝 벌린 입술은 언뜻 평온해 보였지만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아란은 숨이 가빠오는 걸 느끼며 서둘러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안에는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있는 소녀와 소년이 있었다. 방금 쓰러진 소녀보다 더 어려 보였다.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즈미 수행원들이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울음 섞인 비명을 질렀다. 이 사태에 당혹스러운 건 제국 측도 마찬가지였다.
삽시간에 주인을 잃은 수행원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이의 시체를 처음 본 아란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으려 하자 뒤에 서 있던 대공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참혹한 광경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몸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 그…….”
입술을 달싹였지만 제대로 된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공이 그녀를 제 품으로 가까이 당겼다. 아란은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설명해라.”
대공이 수행원들을 향해 차게 명령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닿은 가슴팍을 통해 진동이 울렸다. 놀랄 만큼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아란은 그제야 형편없이 신하에게 기댄 제 꼴을 의식했다. 황제인 자신이 이런 상황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보셔서 좋을 게 없습니다.”
대공이 만류했지만 아란은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이즈미의 수행원들을 쏘아보았다.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느냐. 누가 감히 짐의 객에게 손을 댔느냔 말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행원들은 그저 당혹스럽고 비통한 낯빛으로 머뭇거리기만 했다. 아란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도착할 때까지 제 주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던 게 분명했다. 알았다면 감히 시체를 황제 앞까지 끌고 올 생각은 못 했을 테니까.
아란은 수행원들을 유심히 훑었다. 하나같이 놀라고 비통한 표정이었으나, 정황상 저들 중에 범인이 있었다.
아무리 망국이 되었다지만 왕족은 왕족이다. 외부인이 함부로 접촉하는 건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왕족들은 국적과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경계심이 하늘을 찌를듯한 족속들이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누구도 시해된 사실을 몰랐던 것을 보면 범인은 죽은 아이들과 가까운 사이일지도 몰랐다.
아란은 참담한 눈으로 기사의 품에 안긴 왕녀에게 눈을 돌렸다. 아직 사후경직도 시작되지 않았다. 수도에 들어선 후에 살해된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몸이 떨렸다. 아란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이건 전부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과시적인 행위였다. 암살범이 단순히 왕족들을 죽이길 원했다면 굳이 수도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었다. 황제의 권위가 가장 높게 솟은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의 객을 죽여 그녀를 조롱할 심산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참을 수 없이 역겨워졌다.
“주인이 변을 당하는 동안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
아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건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여운 목숨을 의탁하기 위해 찾아온 어린 손님들이 제 그늘 아래서 살해당하도록 내버려 둔 것 역시 죄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수행원들을 가리켰다.
“저들을 전부 가두어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색출해. 그리고…….”
왕녀를 바라보는 아란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왕녀와 왕자는 시신을 잘 수습한 후 이즈미로 돌려보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어라.”
의연한 척 명령한 아란은 조금 서둘러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이즈미 수행원들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갑작스러운 참사로 그날 일정은 전부 취소되었다. 이즈미의 수행원들은 전부 투옥되었고, 곧바로 범인 색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범인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밝혀졌다. 시해된 이즈미 왕족들을 보고 가장 큰 소리로 울던 시녀였다. 그녀는 자신이 라세르의 세작이며, 음식에 독을 섞어 왕녀와 왕자를 동시에 시해했음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그날 해가 저물기도 전에, 아란은 사형 집행을 명했다.
* * *
예상치 못한 비상사태로 수도에 있던 고위급 귀족들이 긴급히 소집되었다. 귀족들은 흥분으로 품위를 지키는 것도 잊은 채 라세르의 돌발 행위에 비난을 아끼지 않았다.
아란은 그 왁자지껄한 소리를 흘려들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충격 때문인지 아까부터 열이 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다행히 회의에서 골치 아픈 의견대립은 없었다. 담론이 오갈 것도 없이, 라세르 측에서 협상을 파국으로 이끌었으니 남은 결론은 전쟁뿐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협상할 생각 따윈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특히 라세르와 가까운 곳에 영지가 있는 비에른 후작은 이번 전쟁에 꼭 참전하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번 기회에 폐하와 제국에 대한 충정을 증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건방진 라세르를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겠습니다.”
그는 라세르와의 전쟁이 마물과 야만인들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 수월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서쪽 국경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의 일처럼 모르는 척하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이 기회에 군공도 세우고 보상도 톡톡히 받아내겠다는 속내가 빤히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