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하의 밤-100화 (100/146)

100화

다행히 사일러스 공작은 비웃는 어조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전 단발성 전투만 몇 차례 겪었을 뿐입니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민망할 정도죠.”

“전투가 벌어졌을 때, 기분이 어땠나?”

전투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지 공작이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흥분과 긴장으로 몸을 가만히 두기가 힘들지요. 전 지휘관이니 겉으로나마 평정을 유지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두렵지는 않나?”

“물론 두렵습니다.”

“무엇이 가장 두렵지?”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들이 죽고, 무엇보다 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공작은 아란이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우선은 성실히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창밖으로 만개한 리시안셔스가 초록색 눈동자에 비쳤다.

“그럼 더 긴 전쟁은? 몇 년간 전투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 놓이면 어떨까?”

“평범한 사람은 아무래도 견디기 힘들 테지요. 많은 군인이 아편에 중독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 그 말에 아란은 또다시 대공을 떠올렸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식사를 거르고 잠을 자지 않으면 몸이 상하고, 괴로우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곧장 그 생각을 부인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정말 괴로웠을까?

대공은 잔인하고, 교활하여 상처 같은 건 받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눈물 역시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자였다.

“하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군인들이 전부 후유증에 시달린다면 군 기강이 무너질 테니까. 천성이 잔혹하여 가차 없이 적을 베고, 동료가 죽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냉혈한 이가 분명 있을 테지. 공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란이 사일러스 공작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부디 그가 자신의 말에 수긍했으면 했다. 그러나 공작은 그녀가 바라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예. 간혹 그런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 중엔 없었습니다.”

기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아란은 조금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 그렇지만 어쩌면 그건 공이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몰라.”

공작은 갑자기 차가워진 아란의 태도에 더 의아해졌지만, 특유의 농담으로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앞으로는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냉혈한이 제 주변에 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다 그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곤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한데,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걸 보니 혹시 라세르가 선전포고라도 한 겁니까?”

아란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라세르 국왕이 협상에 응하기로 했네. 다행스러운 일이야. 제국의 젊은이들이 그런 끔찍한 전쟁터로 향할 일이 사라졌으니 말일세.”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 아란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확실히, 대공처럼 전쟁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무도한 자는 드문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정말로 좋은 일뿐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조금 전까지 가벼웠던 마음이 추를 매단 것처럼 가라앉았다.

* * *

오랜만에 대공이 입궁했다. 허락을 받기가 무섭게 아침부터 입궁한 그는 침실 문 앞에서 얌전히 아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란은 간만에 보는 그의 얼굴을 무심히, 그러나 조금 오래 바라보았다.

오래 쉰 것이 무색하게 까칠한 낯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밤낮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짐이 보낸 궁의가 제대로 살펴주지 않던가?”

아란은 인사 대신 대뜸 물었다. 대공이 눈물로 용서를 빌었던 그날 밤 이후에도 그녀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이전보다 조금 더 냉랭해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성가실 정도로 꼼꼼했습니다.”

대공은 상처받은 기색을 숨기며 차분히 대답했다.

“듣기로는…….”

대공의 몸에 정체 모를 반점이 있다는 궁의의 보고를 떠올리며 아란은 그의 드러난 살갗을 훑었다. 그러나 남자답게 그을린 피부는 매끈하기만 했다. 아란은 그의 맨몸을 떠올려보려다 그만두었다. 떠올려 좋을 게 하나 없는 기억들뿐이었다.

“하기야, 그대처럼 기운이 넘치는 자를 걱정하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겠지.”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려던 아란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짐의 마음이 돌아설 일은 없으니 괜한 일에 힘 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

아무리 황궁에 처박혀 있는 그녀라도, 로아크 대공이 갑작스레 사들이는 막대한 부지와 광산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할 만큼 귀가 어두운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사들이는 것이 한때 자신의 소유였던 것들이니 더더욱 모를 수가 없었다.

아란은 대공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의 관계를 예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건 그 자신이 가장 잘 알 터였다.

말을 마친 아란은 대공이 대답하기 전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대공은 자연스레 그녀를 뒤따르려다 멈칫하고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신하로서 함께 걸어도 좋다는 황제의 허락을 듣지 못한 탓이었다. 이전이라면 당연히 그녀를 따랐을 것이지만, 제 월권을 깨달은 이상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아란 역시 그가 따라올 것을 예상하고 발길을 재촉했다가, 그와 거리가 한참이나 벌어진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따가운 시선만은 여실히 느껴졌다. 아란은 그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저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고분고분한 척하고 있어도 언제 또 변덕을 부려 불쑥 침실로 찾아올지 몰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란의 예상은 틀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가 그녀의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아란을 찾기 전에 정식으로 알현을 요청하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이 법도에 맞았지만, 이전까지 대공은 그녀의 집무실 역시 마음대로 드나들었으므로 퍽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란은 제 앞에 차분한 태도로 서 있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몇 가지 사안에 대해 그녀의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슨…….”

이번엔 무슨 속셈이냐 물으려던 아란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새삼 그의 속내가 궁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나오든, 황제의 권위를 손상시키려 드는 게 아니라면 무시할 생각이었다.

“드릴 게 있습니다.”

잠깐 침묵이 흐르고, 대공이 갑자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보석함이었다.

아란은 경계의 눈초리로 상자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이 쓰게 웃었다. 지난날 사파이어 목걸이를 선물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의 애정을 알게 된 지금도 그녀의 불신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그게 뭐지?”

그는 과거에 그랬듯 성마르게 그녀를 재촉하는 대신, 손수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을 확인한 아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대공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상자를 향해서.

“이건…….”

티아라를 집어 드는 손길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동안 어머니의 유품을 쓰다듬던 그녀는 뒤늦게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그가 내민 선물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상관없었다. 아란이 티아라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그는 안도했다.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티아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란을 보며, 그는 비로소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왜 진작 자세히 살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늘 아란에게 신경을 기울였다고 여겼으나 그것 역시 그의 착각이었다. 익숙하던 장신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그저 취향이 바뀐 탓이라고만 여겼던 과거의 자신이 못 견디게 한심했다.

한참 후에야 상자를 닫은 아란이 뒤늦게 그가 올린 문서에 서명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게.”

아란이 말했다. 대공은 시키는 대로 그녀의 집무실을 나섰다. 미련은 남았으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아란이 제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다. 텅 빈 마음이 아주 조금은 차오른 것 같았다.

* * *

궁의가 다시 대공저를 방문했다. 벌써 몇 번이나 저택을 오가며 성가시게 한 탓에, 대공의 인내도 슬슬 한계였다. 아란이 보낸 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 궁의를 저택 밖으로 내쳤을 것이다.

궁의는 궁의대로 대공의 벗은 등을 보며 남몰래 진저리를 쳤다. 흉터로 뒤덮인 몸은 몇 번을 보아도 적응이 안 됐다. 그러나 그는 얼른 표정을 지우고 대공의 허리를 살폈다. 반점은 나날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궁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전하.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다시 셔츠를 걸치며 돌아섰다. 저번엔 기어이 피까지 뽑아가더니, 무슨 일인지 오늘따라 궁의의 기색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이지?”

“전하, 정확한 건 더 알아봐야겠지만…….”

궁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그건 아닙니다!”

궁의가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부인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 어쩐지 그 말이 떠올랐다. 대공은 놀라거나 화를 내는 대신 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화내지 않을 테니 솔직히 말하라.”

그 말에 망설이던 궁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반점이 아무래도 중독 증상 같습니다.”

“중독?”

“예. 확실치는 않지만 평범한 독은 아니고 마물의 피에 중독되신 듯한데…….”

새하얗게 질린 사내가 내뱉는 말을 대공은 표정 변화도 없이 들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서쪽 국경에 있을 때, 외상도 없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시름시름 앓다 죽는 자들을 간혹 보았다. 그중 절반은 마음의 병이었고, 나머지 반은 독성이 강한 마물의 피에 중독된 것이었다.

생명이 일회용처럼 소모되는 서쪽 국경이니 치료가 제때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아무리 조심했다고 한들, 수도 없이 마물을 상대하고 그 피를 뒤집어썼던 몸이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간 아무 증상도 없다가 이제 와 나타날 이유가 있나.”

그가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워낙 건강하신 탓에 증상이 없다가 피로가 누적된 지금에야 나타난 것 같습니다. 아직은 괜찮다 해도 계속 무리하신다면 계속 몸을 좀먹을 것입니다.”

“완치될 가능성은?”

궁의는 힐끔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이 없는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거짓말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궁의는 괜한 말로 화를 사지 않도록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그것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 그래도 치료를 받고 관리를 잘하신다면 완치도 어렵지는 않으실 겁니다.”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는 거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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