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대공이 입궁하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그건 아란이 더 바빠졌다는 뜻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감을 때까지,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공 없이 국사를 돌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새삼 그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그간 그를 호되게 부리긴 한 모양이라고 아란은 속으로 자조했다.
의외로 대공은 얌전히 아란의 명을 따르고 있었다. 다나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느닷없이 찾아와 억지를 부릴 줄 알았는데 잠잠하기만 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나이를 불문하고 고위 귀족들을, 그것도 여자만 골라 만나고 다닌다고 했다. 또 무슨 꿍꿍이를 짜내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찌 됐건 당장 성가시게 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아란은 그가 무엇을 하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무시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울면서 매달릴 때는 언제고.
피식 웃었을 때, 종이 위로 잉크가 떨어져 번졌다. 그제야 아란은 자신이 한참이나 대공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아, 또…….
자꾸만 그날 밤이 생각나는 건, 그의 눈물이 그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단 한 번이다. 그간 자신이 흘린 눈물은 이미 강을 이루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의 눈물은 가증스러웠다. 악어의 눈물이었다. 아란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매달리던 그를 다시 한번 비웃으려 했으나, 입 밖으로 나온 건 웃음이 아닌 맥 빠진 한숨이었다.
아란은 잉크가 번진 종이를 다소 거칠게 구겨버리고 새것을 꺼냈다. 오늘은 특히 더 바빠 잡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지난주에 그녀는 다시 아랫배부터 시작된 불쾌한 통증을 느꼈다. 혹시나 하여 미리 대비를 해두었기에 지난번 같은 일은 없었지만, 전달보다 통증이 심해 며칠을 그대로 고생하고 나니 밀린 그 일들이 이번 주로 고스란히 넘어온 참이었다.
피를 무서워하는 아란이었지만, 제 몸에서 나온 것이라 그런지 거부감은 덜했다. 다만, 주기가 칼처럼 정확히 들어맞는 게 약간 기가 막혔다.
이제 살만해진 거야? 고작 그 정도로……?
고작 대공의 눈치를 덜 본 것만으로도.
아란은 제 아랫배를 내려다 들여다보았다. 그 아래, 다시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한 자궁이 있었다. 그것은 그간 숨죽이고 산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듯이 바로 며칠 전까지도 그녀의 배 속을 쥐어짰다. 그것이 꼭 지금 제 모습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쁜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번이고 자괴감을 곱씹었을지도 몰랐다. 아란은 겨우 종이 위로 시선을 옮겼다.
* * *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
위축된 기색이 역력한 사내가 대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가 보낸 궁의였다.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성가신 것을 몹시 싫어하는 그는 저택에 외부인을 쉽게 들이지 않았고, 들이더라도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일찍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예외였다. 황제가 자신을 위해 손수 보낸 자이니 대공도 나름대로 예의를 갖췄다.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지만.
“황궁이 아닌 곳에서 뵙는 건 처음이군요……. 저택이 매우 훌륭하여 감탄했습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자 궁의가 말을 건넸지만, 대공은 맞장구 같은 건 치지 않았다.
“피차 바쁘니 빠르게 끝내도록 하지.”
그가 짧게 말했다.
대공이 대놓고 성가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궁의는 자신이 환영받는 객이 아님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라고 좋아서 대공저를 찾은 게 아니었다. 황명이 아니었다면 그 역시 얼씬도 하지 않을 곳이었다. 게다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번번이 부재중인 대공 때문에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하고 나니 더욱 그랬다.
다행히 네 번째로 방문한 오늘에야, 그는 겨우 대공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궁의가 대공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또한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빠르게 진찰을 마치고 싶은 마음은 대공보다 그가 더 간절했다.
궁의는 평소보다 충혈된 대공의 눈과 날카로운 턱선을 훑었다. 황제가 말한 대로 그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궁의는 그 사실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대공의 놀라운 체력이야 수도에 모르는 이가 없었고, 조금 야윈 것 외엔 딱히 다른 증상이 없기 때문이었다.
“피로를 자주 느끼시고 입맛이 없습니까?”
형식적인 질문에 대공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의는 그에게 간단한 검사 몇 가지를 했으나, 별다른 증세를 찾아내지 못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궁의가 다시 요청했다.
“한번 옷을 벗어보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대공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귀찮은 내색을 참으며 시키는 대로 겉옷과 셔츠를 벗었다. 아란이 내린 벌이 무색하도록 탄탄한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이 드러났다.
궁의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그 몸을 살폈다. 같은 사내로서 부러울 법도 하지만, 애당초 골격 자체가 다르니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을 빼곡히 뒤덮은 흉터 때문에 더 야만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뒤로 돌아보십시오.”
그 요청에 대공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곧 순순히 등을 돌렸다.
그의 등을 본 궁의는 하마터면 눈앞의 상대가 대공인 것도 잊고 헉 소리를 낼 뻔했다. 앞도 그랬지만 등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대공이 사지를 오가는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건 알지만, 이건 참혹하다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흉터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건 무언가에 걷어차인 듯 깊게 파인 커다랗고 오래된 흉터와 바로 그 위를 뒤덮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다란 자국들이었다.
마치 채찍 자국을 닮은 듯한 흉터에 궁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감히 대공에게 채찍질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황제라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놀란 마음을 숨기고 대공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흉터로 가득한 것과 달리 건강한 몸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늘씬한 등허리 쪽에 붉은 반점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의사인 그조차 자칫 지나칠 만큼 아주 흐린 자국들이었다.
“이건……?”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발진? 피부병인가? 그렇기엔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그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대공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말하는 목소리가 싸늘했다. 궁의는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 세웠다. 셔츠를 입기 시작한 대공에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피부병이 있습니까, 전하?”
무슨 소리냐는 듯, 대공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등에 반점 같은 게 있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반점?”
되묻는 걸 보니 몰랐던 게 분명했다.
“증상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통증이나 가려움증 같은 것 말입니다.”
“전혀.”
무심한 태도에 궁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의 반응을 보니 대단치 않은 일 같기도 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갈지, 아니면 괜히 대공을 성가시게 해 그의 화를 살지.
후자는 정말 원치 않았지만, 그냥 넘겼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했다. 역사상 귀한 이들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의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아무래도 지금 조금 고생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황명을 담보삼아 용기를 끌어모았다.
“아무래도 자세히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은 반점의 원인을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다음번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별다른 증상도 없는데.”
대공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얼핏 상관없다는 듯이 들리지만, 그 안에 숨겨진 오지 말라는 거부의 뜻을 눈치챈 궁의는 얼른 변명했다. 그 역시 이 저택에 두 번 발 들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도 목숨이 날아갈 가능성을 만드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사, 사소한 증상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황제의 이야기가 나오자 대공의 눈빛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궁의는 그 목소리에서 은근한 기쁨을 읽었다. 슬쩍 올려다보니 늘 냉엄하던 눈빛도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예…….”
“알겠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궁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대공에게 인사를 하곤 대공저를 벗어났다.
* * *
라세르에서 다시 사신이 당도했다는 말에, 아란은 내심 긴장했다. 마냥 부드럽게만 보였던 왕제가 자국으로 돌아가 고집 세고 호승심 강한 라세르 국왕을 설득할 수 있을지 내내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신 앞에서 긴장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으므로, 아란은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하곤 라세르 국왕의 친서를 펼쳤다.
다행히 친서엔 라세르가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다. 물론 이즈미는 거의 멸망한 것과 다름없었지만, 적어도 자치권은 유지할 수 있었고, 왕족들의 목숨 역시 안전해졌다. 아란도 이로써 한시름 놓게 되었다.
사절을 융숭하게 대접할 것을 명한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회랑을 거닐었다. 때마침 사일러스 공작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란을 발견한 그가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올렸다. 아란 역시 부드러운 눈짓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기분 좋은 것이 얼굴에 티가 났는지, 그녀를 바라보는 사일러스 공작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폐하를 뵈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짐을?”
아란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예. 드디어 빈민가 개발 계획 초안이 얼추 완성되었습니다. 폐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거 정말 잘 되었구나.”
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처럼 연달아 좋은 소식만 듣는 일은 그녀에게 흔치 않았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마침 잠시 시간이 나니 어서 보여주게.”
“예. 그런데 지금 여기서 보시기엔 조금 설명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자리야 언제든 옮길 수 있지. 그렇지만 설명은 지금부터 들었으면 하네. 아주 궁금하거든.”
공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회랑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다나르는 특히 빈민가 출신 아이들이 해적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잘 해결되면 해적의 숫자도 줄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작이 말했다.
해적.
그 단어에서 풍기는 거칠고 폭력적인 느낌에 아란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공.”
얌전히 설명을 듣고 있던 아란이 불쑥 공작을 불렀다.
“예.”
“전쟁 말일세. 많이 힘든 거겠지?”
“예?”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사일러스 공작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란은 조금 민망해졌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하리만치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재차 다음 질문을 했다. 그가 아니면 달리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공도 전장에 나가본 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