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저택으로 돌아간 그가 멀끔한 모습으로 다시 입궁해 인사를 올리자, 아란이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체력이 좋은 걸 자랑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고집이 센 건지. 오늘 같은 날은 쉬어도 좋아.”
“어제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여전히 발치에 엎드리고 싶은 기분을 누르며 대공이 그녀에게 사죄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모두가 보고 있는 낮은 그가 감히 감정을 드러내도록 허락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정도쯤이야 용서하기 어렵지 않지. 무례했던 게 새삼 어제만은 아니었으니.”
화난 기색도 없이 대답한 그녀가 덧붙였다.
“저택으로 궁의를 보내줄 테니 한동안은 입궁하지 말고 정양에 힘쓰도록 해.”
대공은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정말로 쉬라는 건지, 아니면 오만 정이 떨어졌으니 당분간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뜻인지. 그것을 깨달은 아란이 혀를 찼다.
“정말 쉬라는 뜻이네. 돌이켜보니, 황궁으로 돌아오고 나서 공을 너무 혹사시킨 것 같아. 악독한 황제라고 그대 수하들의 미움을 산 것도 무리는 아니야.”
농담처럼 던진 아란의 말에 대공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아란이 반강제로 퇴궁시키는 바람에 그는 별수 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왜 벌써 돌아오십니까, 전하.”
이른 귀환에 당황한 집사가 물었다.
“당분간은 황궁으로 가지 않을 테니 준비할 필요 없다.”
짤막하게 명령한 그는 곧장 침실에 틀어박혔다.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그녀가 그립지만, 당분간은 도무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번에 실패하면 그녀는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때는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달아날지도 몰랐다. 지금의 그녀라면 가능했다. 아란이 죽으면 그 역시 따라 죽을 테지만, 죽음보다도 저승에서 재회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예전에 아란이 말을 잘 듣고 있으면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한 말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그녀가 다시 불러줄 것이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착하고 충직하게 말이다.
* * *
황궁에 가지 않아도 대공은 여전히 바빴다. 그가 맡았던 국책 사업과 연구를 마무리 지어야 했고, 대공령에서 올라오는 일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바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아란이 루아잔에게 넘겼던 재산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당시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 워낙 많았던데다 해외로 팔린 것, 기록이 누락된 것들도 많아 전부 찾을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지만, 그녀가 과거에 잃은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재산만이라도.
조금이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는 여기에 매달렸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을 부정하듯이, 그는 집착적으로 그녀의 재산을 모았다. 반지 하나, 그림 한 점 빠트릴 수 없었다.
대공은 먼저 그녀의 재산 중 가장 많은 몫을 차지했고, 비교적 매매 기록도 뚜렷하게 남은 금광들과 영지를 다시 사들이기로 했다. 간혹 팔지 않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도 했다. 거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보석이나 도자기 같은 사치품을 추적할 때, 그는 생각지도 못하게 곳곳에서 아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황녀가 가졌던 사치품들을 구입하는 사람들이란 고귀한 신분의 여자들이었다. 당연히 그중 상당수는 아란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보석을 팔지 않겠다는 귀부인 한 명을 찾아갔다가 우연히 당시 아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그는, 그 이후로 한 명 한 명 직접 만나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반짝이던 시절의 아란과 우연히 만날 때면, 대공은 참기 힘든 그리움을 느꼈다. 지금은 산산이 부서져 제 심장을 찌를 날카로운 파편이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조각이라도 모으고 싶어 매번 직접 움직였다. 하나둘, 과거의 흔적을 모으면 언젠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그가 도착한 곳은 전 황후와 친밀한 관계였던 포리에 공작부인의 저택이었다.
그의 기억 속 그녀는 귀부인답게 우아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지금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사이 그녀는 머리가 희게 세었고, 분별력도 흐려져 있었다. 외아들을 떠나보내고도 의연히 슬픔을 떨쳐내던 기개 같은 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몰락한 신세가 된 귀공자를 선명히 기억했다.
“아니. 네가 여기엔 웬일이냐, 에녹.”
그가 다시 신분을 회복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 공작부인이 반갑게 그를 반겼다. 그녀 옆에 서 있던 앳된 얼굴의 포리에 소공작이 기겁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보시다시피 할머니께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괜찮습니다.”
대공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호칭 따위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포리에 공작부인이 아란의 티아라를 샀다는 사실이었다. 진주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그 티아라는 아란이 황후에게서 물려받아 유달리 아꼈던 물건이었다.
“오랜만에 공작부인과 단둘이 담소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공작부인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머뭇거리던 소공작이 마지못해 자리를 피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공이 예전처럼 깍듯하게 공작부인에게 인사했다.
“왜 이리 얼굴이 상했느냐. 또 누가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공작부인이 그의 까칠한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아들을 일찍 잃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선대 대공비와 나눈 얕은 친분 때문인지, 그녀는 대공이 시종일 때에도 그를 다정하게 대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아닙니다.”
“나라도 널 살폈어야 했는데, 요즘 아들이 속을 썩여 바쁘지 뭐냐.”
공작부인은 마치 죽은 아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들이 죽은 일은 깨끗하게 지워졌으니 그녀로선 이상할 게 없었다.
대공은 괴로운 기억을 전부 지워버린 그녀가 못내 부러웠다. 자신도 그처럼 망각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망각이 필요한 건 그가 아니었다. 아란의 기억에서 제가 한 짓을 깨끗하게 도려낼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상념을 깨고 공작 부인이 안부를 물었다.
“넌 어떻게 지내느냐?”
“운이 좋아 조그만 영지와 작위를 얻었습니다.”
“그래? 그거 정말 잘 되었구나! 쉽지 않았을 텐데 운이 굉장히 좋았나 보다.”
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매끄러운 미소로 화답한 대공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인. 이전에 경매에서 황녀 전하의 소유였던 티아라를 구입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티아라?”
“예. 제가 다시 사고 싶습니다.”
공작부인이 미간을 모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공은 부디 그녀가 그것만큼은 떠올려 주길 바랐다. 티아라의 행방 자체야 소공작에게 물어봐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굳이 정신도 온전치 않은 공작 부인에게 묻는 건 그때의 아란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 기억났다. 내 손녀가 결혼할 때 선물하려고 사들였는데, 그 애가 파혼하고 유학을 가는 바람에 묵혀 두었지. 가만있자.”
공작부인이 시녀를 시켜 티아라를 찾아오게 했다. 시녀는 곧 상자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안에는 한때 아란의 머리를 곧잘 장식했던 티아라가 곱게 놓여있었다.
티아라를 보는 공작 부인의 눈에 잠시 이지가 돌아왔다.
“이걸 보니 황녀 전하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나는구나.”
대공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아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무슨 생각 말씀입니까?”
“나중에 황녀 전하를 만나 왜 그 소중한 물건을 파셨느냐 여쭸더니,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고만 대답하시지 뭐냐. 화폐 가치도 모르시는 분이 그리 말씀하시기에 의아했어.”
“…….”
“그러더니 갑자기 본인께서 황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게 아니겠느냐.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황족은 정략혼을 해야 하니 싫다고.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셨어.”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지 공작부인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공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가, 곧 그녀를 따라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놀라셨겠군요.”
“그래. 백 년 만에 태어난 황녀께서 신분을 포기하시겠다니, 아무리 철없는 농담이라도 기겁할 노릇이었지. 아무튼, 엉뚱한 면이 있는 분이시잖니. 그나저나, 황녀 전하는 잘 계시고? 요 몇 달간 도통 그분을 찾아뵙질 못했구나.”
아란을 만나지 못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는 사실 역시, 공작부인은 알지 못했다.
“……예.”
대공은 거짓말을 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지내십니다.”
뒷말은 그의 바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공작부인은 그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네가 곁에서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물론 옛 인연을 핑계로 허튼짓할 생각은 말고. 넌 분별이 있는 아이니까 잘할 거라 믿는다.”
눈앞의 남자가 그 옛 인연을 빌미로 아란의 영혼을 파먹던 파렴치한인 줄도 모르고, 공작부인이 신신당부했다.
“예.”
대공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날 그는 원하는 목적을 전부 이루었다. 티아라를 되찾았고, 그토록 원하던 아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티아라를 보며 공작부인의 말을 몇 번이나 되새김질했다. 물론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으니 그 말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란 어려웠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건 부인이 말한 대로 어린 소녀의 철없는 투정에 불과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황녀임을 포기하겠다니, 사랑에 눈이 먼 그가 듣기에도 절로 비웃음이 나올 만큼 허황된 소리였다.
그러나 대공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의 재산을 넘기고도 원하는 만큼 그의 지위를 끌어올릴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기꺼이 자신이 낮아지길 바랐을 것이다. 철부지 소녀의 치기 어린 애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의 부모조차도 그런 사랑을 주지는 않았다.
이제 그 소녀는 어른이 되었고, 정략혼을 입에 담았다. 저를 위해 버리려 했던 그 신분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 혼인의 상대 역시 자신이었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결국 그녀에겐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대공은 천천히 티아라가 든 상자를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