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 모습에서 그에게 매달려 애원했던 과거의 자신이 겹쳐져 더욱 굳어지기만 했다.
“이제 와 비굴한 척해도 상관없어. 네겐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을 거야. 아니, 뭔가를 줄 수도 없지. 난 가진 게 없으니.”
재산은 혈육들에게 빼앗기고, 몸과 마음은 그에게 약탈당해 아란은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치 없는 쓰레기처럼 내버린 건 대공 자신이었다.
“제가 채워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진 건 전부 드리겠습니다.”
“왜 예전에, 내가 널 그리 간절히 원했을 땐 이러지 않았어?”
앞선 질문처럼 이번에도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대공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그는 제 오만함을 깨달았다. 그녀의 애정이 무한히 샘솟을 줄만 알았다. 그녀의 다정함을 그는 지나치게 얕잡아 보았다.
뜨거운 것이 야윈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을 보며 아란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지금 우는 거야……?”
뜨거운 눈물이 발등으로 떨어지자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란 아란이 대공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대공은 자신을 뿌리친 손을 다시 잡지 못했다. 매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걸음 멀어진 아란이 낯선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지금 아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생각을 전부 읽을 수 있다고 자신했던 과거가 무색했다. 아란이 한순간에 훌쩍 멀어진 것 같았다.
격정에 휩싸인 자신과 달리, 아란은 빠르게 냉정한 태도를 되찾았다. 저렇게 담담해질 때까지 그녀가 얼마나 고통을 삭였을지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매번 용서를 빌어도 냉랭하던 그녀의 태도를, 아직 여유롭다며 비웃던 말의 의미를 그는 비로소 이해했다.
사랑을 자각하고 나서도 그는 내내 오만했다. 그는 감히 제가 딛고 선 곳이 가장 낮은 바닥이라 자신했다. 더 낮은 곳을 외면하면서.
지금껏 했던 건 사죄도, 참회도 아니었다. 또다른 괴롭힘일 뿐이었다. 끝도 없는 절망이 그를 감쌌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말이 되지 못한 오열이 터져나왔다.
이제 와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숨이 막힐 듯 고통스러웠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을 세게 짓씹었다. 여린 살이 터져 피가 흘렀다.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아란은 그가 망가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췄다.
“안 돼. 망가지지 말라고 했잖아. 그대에겐 그럴 권리조차 없어.”
아란이 대공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아주 미약했으나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늘 갈망하던 포근한 품이 그의 머리와 목을 감쌌다.
대공은 걸인처럼 허겁지겁 그 체온에 매달렸다. 온전히 느끼고 싶어 눈을 감자 서늘한 입술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죽어가는 자에게 숨결을 불어넣듯, 심장이 다시 뛰었다.
그러나 품을 내어주고 입을 맞췄어도, 아란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지는 않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초록색 눈은 쌀쌀맞기만 했다.
대공은 아란이 영영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그녀의 복수였다. 최대의 형벌이었다. 지금 이 포옹도 그의 생을 연명시키기 위한 단순한 적선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지독하던 고통이 아주 조금은 옅어졌다. 아란은 그의 구원이며 동시에 재앙이었다. 그녀는 이 비참한 생을 끝내 이어가게 만들고, 그를 나락에 빠뜨렸다가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을 던져줄 것이다. 그것이 어설픈 호기심으로 상자를 연 대가였다.
“전부 흘러간 과거야. 그러니 너도 뒤돌아보지 마. 아무리 반추해도 돌아올 수 없으니까.”
아란이 메마르게 말했다. 그가 과거에 매몰되는 건 상관 없었지만 망가지면 곤란했다.
그러나 대공은 그녀의 말대로 할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매 순간 떠올리고 과오를 뼈에 새기며 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버리고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테니까.
포옹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란이 다시 몸을 일으키자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라 일어서려 했다. 그러다 한순간 비틀거렸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귀가 웅웅 울리고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대공……?”
아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리고 시야가 새까맣게 명멸했다.
* * *
갑자기 대공이 정신을 잃자 놀란 아란은 서둘러 그의 호흡과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큰 이상은 없었다. 그저 오래 누적된 피로가 드디어 끝을 보고야 만 것이다. 아란은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그 앞에서 기절한 적은 꽤 있었어도 반대는 처음이라 몹시 생경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그녀의 옷깃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억지로 손을 떼어내고 당연하게 시종들을 부르려던 아란은 입을 다물었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그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정말로 그녀의 종이라면, 주인인 그녀 앞에서만 무너지는 게 맞았다.
“그나저나…….”
아란은 난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살이 빠졌다해도 그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아란은 끙끙거리며 간신히 그를 제게서 떼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붙잡고 침대까지 질질 끌고 갔다. 그 짧은 거리를 옮기는 동안 몇 번이나 멈춰서 숨을 돌려야 했다.
마침내 침대 앞까지 그를 끌고 간 아란은 간신히 그의 상체를 일으켜 침대 다리에 기대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곤 쪼그리고 앉아 대공이 입고 있는 겉옷 단추를 끌렀다. 바닥을 문대고 다닌 더러운 옷을 입힌 채로 그를 제 침대 위에 눕힐 생각은 없었다.
마침내 겉옷을 벗겨내자 거의 녹초였다.
“애를 먹이네…….”
아란이 무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목까지 채워진 셔츠 단추도 풀어주던 그녀의 눈에 긴 목과 어깨에 새겨진 채찍 자국이 들어왔다. 단추를 풀던 손이 멈췄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상처는 이미 딱지가 떨어져 분홍색 흉터로 변했다. 아란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고작 그의 혀를 깨물어 피를 본 것만으로도 벌벌 떨었던 자신이 어떻게 그리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를 내리치던 채찍의 감촉은 생생하고 분명하게 뇌리에 남아있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짓이었다. 그런 종류의 후련함 따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 경험으로 아란은 폭력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길 서슴지 않는 그 역시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에 장단을 맞췄으니 그녀 역시 지독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란은 조심스레 그 흉터를 만져보았다. 이제 고통은 없을텐데, 대공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감은 눈에선 아직도 눈물이 흘렀다. 아란은 저도 모르게 그 액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뜨겁고 축축한 감촉이 새삼스러웠다.
“내가 널 버리지 않았다는 게, 네겐 눈물을 보일만큼 괴로운 일이니?”
아란은 대답할 수 없는 그에게 물었다. 채찍으로 얻어맞고 개처럼 기면서도 태연하던 그였기에 고작 이런 일로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라도 흘리는 걸 보면 통쾌할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처럼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안타깝지도 않았다. 그냥 형용할 수 없이 복잡했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주체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아란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온 힘을 끌어모아 대공을 침대 위로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발을 헛디뎌 대공과 함께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아란은 가쁜 숨을 고르며 그대로 바닥에 늘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아란은 혼절한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아란처럼 바닥에 모로 누운 채였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운 것이 수포가 되었다. 어차피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꼴 좋다…….”
아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복수는 달콤했지만 뒷맛이 어쩐지 씁쓸했다.
“꼴 좋아, 에녹. 사랑 때문에 무너지는 기분이 어떠니? 너무 낭만적인 벌이라, 나는 아쉽기만 해.”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아란은 다시 일어나 남은 힘을 전부 쥐어짜서 그가 쓰러지지 않게 침대에 상체를 잘 기대놓았다. 이젠 기력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으므로, 아란의 배려는 그게 끝이었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정신을 차리겠지. 수도 없이 탈진해본 그녀였기에 잘 알았다. 아란은 그를 그대로 둔 채 침대 위로 올라가 마저 잠을 청했다.
* * *
정신이 든 대공은 제가 황제의 침대 다리에 기대어 앉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의아해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울다가 그녀의 품에서 혼절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
참혹할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눈물을 보인 것보다 밤중에 불쑥 찾아와 추태를 보였다는 사실이 더욱 그랬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재에서 아란의 확답을 받은 이후,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저질렀던 행동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온통 싫다는 그녀를 비웃으며 강제했던 기억뿐이었다. 심지어 이 저택 안에서조차 그는 아란을 수치스럽게 했었다.
눈이 돌았다.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녀의 침실이었다. 그리고는…….
어쨌든 전부 변명이었다. 그는 부디 아란이 제게 더 정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하기야, 이미 떨어질 정도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눈을 붙인 덕인지, 아니면 아란의 곁에서 잠든 덕인지 혼탁하던 머리는 꽤 맑아졌다. 돌아보니 아란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마 자신을 옮기다가 포기한 것 같았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니 그 와중에도 비실 웃음이 나왔다. 메마르고 버석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또다시 눈물이었다. 보는 눈이 없으니 이번엔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란이 예전처럼 꿈결에서나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랐다. 그러나 아란은 꿈도 꾸지 않을 듯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대공은 저도 모르게 아란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이내 거두었다. 모든 전말을 알고 나니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는 것도 겁이 났다. 더는 그녀를 괴롭힐 수 없었다. 더 뻔뻔하게 굴 수 없었다. 그는 아란이 깨어나기 전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