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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밤-96화 (96/146)

96화

루아잔이 즉위한 지 세 번째 해를 넘기기도 전에 다시 열린 대관식은 선황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호화롭게 치러졌다.

노예처럼 금화 몇 푼에 팔려갈 신세였던 황녀는 옛 약혼자 덕에 황위를 거머쥐게 되었다. 모두들 그녀가 운이 좋다며 쑥덕거렸다.

그 운 좋은 황제는 길게 펼쳐진 붉은 융단 위를 걸어 황좌에 앉았다. 조그만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지만 그 점을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새 황제는 약한 몸만큼이나 성정마저 유약했으므로 긴장하여 그렇겠거니, 했다.

아란은 제게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곤 앙상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손가락마다 보석 박힌 반지가 몇 개씩 끼워져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전신을 장식한 화려한 보석과 예복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압사당할 것 같았다.

지금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다는 것을 아란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대관식도, 황좌도, 전부 대공이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만든 연극에 불과했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폐하.”

다른 생각에 잠긴 그녀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란의 창백한 낯이 더욱 희게 질렸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게 인사를 건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예복을 갖춰 입은 그의 얼굴엔 역광 때문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붉은 눈동자만 형형한 것이 꼭 사신 같았다.

“로아크 대공…….”

자라처럼 어깨를 움츠린 아란이 속삭였다. 이제 그녀는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제게 굴복했다는 뜻 같아 대공은 퍽 흡족했다.

그의 손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쓰는 황제의 보관(寶冠)이 들려 있었다. 황가에 연이어 닥친 불행으로 그녀를 제외한 직계 황족들이 전부 사망했기에, 그녀의 머리 위에 관을 씌우고 황제의 인장을 끼워주는 일은 대공이 맡게 되었다.

묵직한 관이 머리에 닿는 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대공이 물었다. 관의 무게에 목이 부러질 것 같아, 아란은 고개도 제대로 끄덕이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다음 할 일을 잊었다.

“손을 주셔야지요. 그간 연습하지 않으셨나요.”

대공이 작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밀자, 날카로운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그가 붉은 자국이 새겨진 손목 안쪽을 슬쩍 훑으며 희롱했다. 떨림이 한층 심해졌다. 조그만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바로 전날까지도 그녀는 그의 아래서 울고 비명을 지르고 신음했다. 지금도 호화로운 예복아래엔 그가 만든 흔적들이 처참하게 남아 있었다.

볼썽사납게 떨리는 손에서 황녀의 인장을 빼낼 때, 내내 여유롭던 대공이 잠시 멈칫거렸다. 가까이 있던 아란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짧은 망설임이었다. 그의 얼굴에 한순간 격렬한 감정이 스쳤다. 증오, 혹은 살의. 어쩌면 두 개 다일 수도 있었다.

아란은 그가 이대로 자신을 무릎꿇리고 그녀의 손을 구둣발로 무참히 밟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태연하게 인장을 완전히 빼냈다. 아란의 손등을 짓누른 건 발이 아닌 뜨거운 입술이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아란이 날카롭게 숨을 토했다.

그녀는 서둘러 손을 거두려 했으나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되레 손목을 더 세게 틀어잡혔다.

“으…….”

아란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눈물 고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대공이 아름답고 사악하게 웃었다.

“저를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폐하.”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 * *

잠들어있던 아란은 문득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커다란 그림자가 앉아있는 걸 본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곧 그 모습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꼴사납게 구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주인이 깨어났는데도 불청객은 동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대공은 대답하기에 앞서 천천히 등잔에 불을 밝혔다.

“폐하를 보러 왔습니다.”

은은한 불빛에 그의 여윈 낯이 한층 더 도드라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안광이 찌를 듯했다.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그 무도하던 남자가 떠올라 아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는 잔뜩 경계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대공과 거리를 벌렸다. 이불이 흘러내려 얇은 잠옷만 입은 몸이 드러났지만, 다행히 은은한 등잔불은 어둠을 전부 몰아내지 못했다. 휘장처럼 드리워진 어둠이 잠옷으로 전부 감추지 못한 맨몸을 숨겨주었다.

아란은 그가 더 불을 밝게 켜기 전에 잠옷 위에 걸칠 가운을 찾았다. 그러나 대공은 등불을 더 환히 밝히는 대신 그녀보다 먼저 가운을 찾아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당장이라도 짐승처럼 달려들지 않을까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담백한 손길이었다.

아란은 고개를 들어 수려한 낯을 바라보았다. 매번 억누르고 있음에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던 그의 욕망이, 지금은 물에 희석된 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가운에 달린 끈을 묶어주는 손이 살짝 떨린 것을 보면 성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무언가에 가로막혀 저 뒤편으로 밀린 것 같았다.

아란은 예쁘게 묶인 리본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로지나에게 단단히 경고를 해야겠구나. 감히 주인의 침실에 다른 자를 매번 들이다니.”

아란이 차게 내뱉었을 때, 대공이 불쑥 뇌까렸다.

“서쪽 국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집니다.”

“…….”

“제정신으로 살아남기는 힘들었습니다.”

아란은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며 그를 비웃으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몸 역시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헛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서쪽 국경에 있던 내내.”

담담하던 그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차 떨렸다.

“끝내 오지 않으시기에 아, 전…… 폐하께서 절 버리신 줄로만 알고…….”

그는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대로 무너졌다. 아란 앞에서 무릎을 꿇은 건 처음이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절망에 빠져 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버리기로 했습니다. 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아란은 그런 그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못 참아 침실까지 숨어들었나 했더니, 아직도 과거 이야기 따위에 집착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공만큼이나 그녀도 한때 과거를 후회했다. 그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자신의 곁에 내내 끼고 있었어야 했다.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그렇다면 그는 아직까지도 하찮은 시종일지언정, 이리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벌어진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주십시오…….”

대공이 애걸했다.

“내가 널 버렸다고 생각해서, 그리 가혹하게 군 거야? 고작 종이에 내 인장이 찍힌 걸 보았기 때문에?”

인장 얘기는 오늘 처음 들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추측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에녹이 떠나고 자신이 무력해진 틈을 타 루아잔이 그녀의 인장을 훔친 게 분명했다. 당시 그녀는 심하게 앓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자는 데 허비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란이 생각한 걸 그가 떠올리지 못할 리 없었다.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애매하게 남았던 죄책감조차 날아가 버렸다. 아란은 내일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 험한 곳이라니 날 원망할 만도 했겠지. 원망할 대상도 필요했을 거고…….”

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공이 바라는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절 버리지 않았다고.”

그는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썼으나, 결국 실패했다. 묻는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아란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전쟁터로 가게 될 줄 몰랐다고,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몰랐다는 것은 변명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떠나지 않으려는 그의 등을 떠민 것은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조금 비뚤어진 마음으로, 그 이유를 대공에게 돌리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게다가 네가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잖아. 매일매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도 벅찼어.”

대공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묻는 거야.”

아란이 그런 그를 향해 물었다.

실은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한때는 그의 속내를 알고 싶어 매 순간 애태웠는데, 어느 순간 전부 의미 없게 느껴졌다. 더는 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니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설령 그가 아직도 그녀를 원망하고 탓한다 한들, 당장 그녀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얼굴만 봐도 알았다. 그 말도 안되는 명을 따르는 건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그때까지 아란은 그에게서 안전했다. 그것만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신음하던 대공이 늘어진 아란의 손을 부여잡았다. 황제의 인장이 끼워진 손이었다. 그가 그 손등 위에 입술을 묻으며 애원했다.

“저를,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폐하.”

공교롭게도 대관식 때와 똑같은 말이었다. 다만 그날과 달리 그는 더이상 득의양양하게 굴지 못했으며, 아란 역시 비루먹은 개처럼 떨지 않았다. 그는 충복답게 엎드렸고, 아란은 주군답게 엄격했다. 그 냉담한 낯을 본 대공은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졌다.

“아니, 아닙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

“아란, 아란흐로드.”

그가 다급히 아란의 이름을 불렀다.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끝까지 묻어두지 못했을까. 그에게 남은 건 회한뿐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그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들렸다. 그는 그것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는 소리만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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