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말해 봐.”
내내 궁금해했으면서도, 막상 기회가 주어지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면 다음에 말해도 돼.”
“5년 전에…….”
묻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잠겨 있어 대공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란은 크게 일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저렇게 주저하는지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피하고 싶었다. 그녀에게도 과거 이야기는 그리 달가운 주제가 아니었다.
“겨우 묻고 싶은 게 옛날이야기야?”
“제겐 중요한 일입니다. 꼭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고집스러웠다. 반드시 그녀에게서 대답을 듣겠다는 결의마저 엿보였다. 그가 저런 얼굴을 할 땐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는 걸 아란은 잘 알았다. 차라리 대충 둘러대어 보내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오갈 수도 있는 공간에서 과거 일이 언급되는 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아란은 대공의 뒤로 시선을 주었다.
시녀와 시종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뒤따르는 중이고,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황궁엔 늘 눈과 귀가 많은 법이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국서 때문에 말이 많은 상황에서 누군가 둘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다면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아란은 대공을 노려보다, 한마디를 던졌다.
“따라와.”
아란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그녀의 서재였다. 의자에 앉은 아란은 차 한 잔 내어주지 않고 얼른 용건을 끝내라는 듯 턱짓했다. 대공은 책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손때묻은 책들을 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때, 5년 전에 루아잔에게 가지고 계신 재산의 소유권을 넘기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심으로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간 저의 어리석음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날 선 어조로 쏘아붙였다.
“네가 아무리 실권을 틀어쥐었다 한들, 내 개인 재산까지 신경 쓸 자격은 없어.”
그러고도 모자라 재차 못을 박았다.
“건방지게 굴지 마.”
어제의 여파 때문일까, 감정 밑바닥에 찌꺼기처럼 가라앉은 죄책감이 다시 떠오르려 했다.
한편, 대공은 그녀의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에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예감이 이대로 그 일을 묻어두라고 외쳤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금지된 상자를 열어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다던 신화 속 인물의 심정이 어땠는지 알 것 같았다.
“……루아잔과 대체 무슨 거래를 하신 겁니까?”
그 질문에 아란이 어깨를 미세하게 떨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대공에게 허락 없이 고개를 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건 무척 잘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난처한 기색을 고스란히 그 앞에서 드러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덩달아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으며 차분한 척 대답했다.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아마 평범한 남매가 할 만한 거래를 하지 않았을까.”
애석하게도 대공은 그 어설픈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그는 관절 마디가 희게 드러날 정도로 꽉 쥔 작은 주먹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거래를 해야 그만한 재산이 오가는 겁니까?”
아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분노를 담아 그의 건방진 태도를 나무랐다.
“감히 황제의 사적인 일까지 간섭하려 들다니, 그대는 지금 자신이 도를 넘었다는 자각이 없나? 아니면, 그만큼 짐을 무시한다는 의미인가?”
그녀가 황제의 권위를 내세워 대답을 거부하자 대공은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아란은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닌, 황제로 남기 위해 그가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황제로서의 자긍심을 해친다고 생각하면 그 틈마저 더는 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허튼 질문이나 하는 걸 보니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모양인데, 어서 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거북해진 아란은 대공을 서둘러 돌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재차 질문했다.
“그럼 다른 것을 묻겠습니다. 저를 서쪽 국경으로 보낸 사람이 폐하이십니까?”
아란은 그의 건방짐을 꾸짖으려다, 그 내용에 인상을 썼다.
“서쪽 국경……?”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그녀는 조금 늦게 그의 얼굴에 깃든 초조한 기색을 눈치챘다.
“어서, 대답해 주십시오.”
조급하게 채근하는 그를 보며 아란은 잠시 고민했다.
내 잘못이라 탓하고 싶은 건가.
“이제 와 잘못을 따지고 싶다면 그래, 맞아. 결론적으로 내가 널 그곳에 가게 했으니.”
그녀는 그가 또 패악을 부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대공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잘잘못을 가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 절 그곳으로 보낸다는 동의서에 인장을 찍으셨습니까?”
“무슨 말이야? 내 인장이라니?”
“폐하의 인장이 찍힌 걸 보았습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그게 무슨…….”
대공은 애타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긍정? 부정? 아니, 애초에 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여 아란에 대한 사랑이 사그라들거나, 그녀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텐데.
뒤늦게 그녀를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으나, 동시에 확답을 원하는 어리석은 호기심이 그의 발을 붙들었다.
대공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아란은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난 서쪽 국경에 관련된 건 뭐든 승인한 적 없어. 내가 왜 널 그 위험한 곳에 보내겠어? 애초에 루아잔에게 재산을 넘긴 것도 그가 널 그리 보내려는 걸 막으…….”
아란은 저도 모르게 변명하다가, 쓸데없는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치부를 들킨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졌다.
잠시 침묵했던 대공이 곧 확인하듯 말했다.
“가지고 계신 재산의 소유권을 넘기는 대신 제 사면을 약속받으셨군요.”
아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파악했다. 대공이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럼, 그럼 왜 절 찾지 않으셨습니까? 시간이 많이 있었는데.”
그가 이미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것을 깨달은 아란이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설명하고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네가 그곳으로 떠났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널 찾으려고 했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했어. 그래서 죽은 줄로만 알았어. 그게 다야.”
그녀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지만 대공 역시 더는 묻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찾지 못한 건 그가 이름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으므로.
마침내 알게 된 진실 앞에 그는 할 말을 잊었다. 그녀의 말대로 차라리 모르니만 못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의도이건 아니건, 그의 무지는 그녀가 베푼 마지막 자비였다.
그는 아란이 보냈을 체념과 절망의 날들을 헤아렸다. 사랑하는 이를 떠내보내고, 형제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마음을.
그녀가 맥스웰 후작과 혼인하려 했던 것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가진 재산도 뒷배도 없는 황녀. 그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타인에 의해 결혼동의서에 인장이 찍혔을 것이다. 마치 팔려가듯이.
그러나 루아잔과 딜란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그 자신이 저지른 일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난 아란에게 제가 강요했던 역겨운 짓들을 생각하자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예전 그대로였는데, 귀를 막고 그녀를 짓누른 것은 저였다. 어리석은 에녹 로아크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진짜 죄를 마주했다. 그리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궁금한 걸 다 물었으면 이만 돌아가. 아니면 내가 나갈테니.”
아란이 명령했다. 아픈 기억을 떠올린 탓인지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공은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차라리 모르느니만 못한 진실에 그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란은 그가 더 뭔가를 묻기 전에 빠르게 서재를 나섰다.
쾅, 육중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순간에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침실로 돌아와 혼자가 되고나서도 아란은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공이 또 제멋대로 따라 들어올까 봐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다행히 문밖에선 시녀들의 기척만 느껴졌다. 아란은 그제야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대체 그가 왜 그때 일을 캐묻는 걸까. 대공이 말한 동의서와 인장 이야기가 찜찜하게 뇌리에 들러붙었다. 그건 또 뭘까.
그러나 깊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와 루아잔의 거래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였으니 굳이 비밀도 아니었지만, 직접 이야기하는 건 힘들었다.
그녀는 그 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재산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란은 고개를 내저어 좋지 않은 기억을 애써 떨쳐냈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든, 혹은 에녹을 얼마나 사랑했든, 이젠 전부 잊고 싶은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불현듯 참기 힘든 피로가 몰려왔다. 대공을 상대하고 나면 늘 그랬다. 게다가 조금 전에 괜한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란은 울적함을 잊고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옷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